제주여성가족연구원-4.3희생자유족부녀회 공동포럼
제주4.3 여성 유족 100인, 미래세대에 메시지 전달

8일 오전 제주 아스타호텔에서 개최된 ‘제주 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말하다)’에서 이춘화 할머니가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8일 오전 제주 아스타호텔에서 개최된 ‘제주 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말하다)’에서 이춘화 할머니가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날 이후로 할머니는 항상 머리맡에 칼을 두고 주무셨어요. 어딜 나갈 때도 옷 속에 칼을 지녔습니다. 그때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어요”

75년 전 제주에서 벌어진 비극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김순자 할머니의 증언이다.

김 할머니는 “너무나 가슴 아파서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라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8일 오전 제주 아스타호텔에서 개최된 ‘제주 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말하다)’에서 오종희 할머니가 증언하고 있다.
8일 오전 제주 아스타호텔에서 개최된 ‘제주 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말하다)’에서 오종희 할머니가 증언하고 있다.

제주여성가족연구원과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는 8일 오전 제주 아스타호텔에서 ‘제주 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말하다)’를 열어 제주 여성들이 서로의 아픔을 꺼내고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제주 여성들은 가슴 깊숙한 곳에 켜켜이 묻어뒀던 저마다의 기구한 사연을 들려줬다.

“‘금방 사탕사고 오겠다’는 아버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며 운을 뗀 이춘화 할머니는 그날의 비극을 힘겹게 꺼냈다.

1948년 동백이 봉우리 지는 10월, 두 살배기 동생을 업은 아버지와 집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그런데 무서운 표정을 한 순사들이 나타나 아버지와 몇 마디 나누더니 이내 아버지를 끌고 갔습니다. 그때까지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런데 몇 시간 뒤 고요하던 마을에 ‘탕탕’하고 총소리가 났습니다. 소리가 난 공터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사이를 어머니와 비집고 들어갔어요.

그 속에는 피범벅이 돼 쓰러져 있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어요. 저와 어머니는 그 속에서 아버지를 찾았어요. 어머니가 목놓아 우시던 모습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그날 이후로 남은 가족은 ‘연좌제’로 고통받았어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두 오빠와 저는 일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항상 연좌제라는 꼬리표가 함께 했어요.

공장을 열어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던 작은 오빠는 ‘빨갱이’라며 알 수 없는 죄명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온갖 모진 고문을 당했어요.

그 후유증으로 육체적, 정신적 손상을 입은 작은 오빠는 수십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고통 속에 살고 있어요.

무엇보다 가장 애통한 것은 긴 세월 동안 모두가 숨죽여 살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4·3 이후로 벙어리 아닌 벙어리로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긴 싸움 끝에 2016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입니다.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모두가 애쓰고 있지만 가끔은 온몸이 굳어지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이제 닫힌 마음을 열고 새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아픔을 후손에게 알리고 또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나아가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춘화 할머니의 증언으로 현장은 눈물바다로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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