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재심, 역사의 기록] (78) 제37차 군사재판 직권재심 30명 전원 무죄

영장도 없는 구금과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 변호인도 없이 끝난 재판 결과는 피고인들조차 나중에서야 알았다. 또 사형·무기징역이라는 이유만으로 뒷전으로 밀려 뒤늦게 제주4.3 희생자로 결정된 30명의 명예가 70여년 만에 회복됐다. 

29일 오후 제주지방법원 형사제4-2부(강건 부장)는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단장 강종헌,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제37차 군사재판 직권재심 대상자 30명 전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37차까지 이어진 군사재판 직권재심 명예회복 4.3 피해자는 1061명으로 늘었다.

군사재판 직권재심 대상자 30명 중 10명은 1948년 1차 군법회의에 회부돼 내란죄를, 나머지 20명은 1949년 2차 군법회의에 회부돼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쓴 피해자들이다. 

이들 중 15명은 사형 선고를, 나머지 15명은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사형 선고를 받은 피해자 중 일부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무기징역을 살던 4.3 피해자 대부분은 형무소에 수감된 후 행방불명됐거나 총살됐다. 일부는 고문으로 건강이 나빠진 상황에서 열악한 형무소 생활을 이기지 못해 숨을 거뒀다.  

1~2차 군법회의(군사재판) 4.3 피해자는 총 2530명으로, 수형인명부에 이름과 주소, 언도일자, 복형장소 등이 기재돼 있다. 

군사재판 피해자들은 전원 징역 실형을 살았다는 이유로 4.3 희생자 결정 때 후순위로 밀린 바 있다. 

아무에게나 징역 실형을 선고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며, 추후 4.3 군사재판 절차가 위법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들에 대한 희생자 결정이 시작됐다. 

그 속에서도 사형·무기징역 피해자는 뒷전으로 밀렸다. 아무에게나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다. 

1차, 2차 군법회의 모두 1년 내내 진행된 것이 아니라 짧은 기간에 일괄적으로 이뤄졌다. 물리적으로 2530명에 대한 적법한 절차 진행이 불가한 기간이며, 피고인들의 공소사실조차 명확하지 않다.

4.3 군사재판 피해자들은 일정 모둠으로 나뉘어 모둠별로 똑같은 형에 처해졌다. 사형·무기징역 피해자도 마찬가지다. 

37차 군사재판 직권재심 대상자들은 당시 만 17세에서 37세 사이의 젊은 청년들이었고, 대부분 농사를 짓거나 어업에 종사하던 선량한 양민들이었다.  

밭에서 일하다가 군경에 끌려갔거나, 젊은 청년을 모두 잡아간다는 소식에 산으로 몸을 숨겼다가 붙잡혔거나, 거짓신고로 방화범으로 몰렸거나, 군경이 마을을 모두 불태우자 다른 마을로 피신했다가 붙잡혔다. 일본에서 태어났거나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다 제주에 와 4.3을 겪은 피해자들도 있다. 

37차 군사재판 직권재심 대상자들의 유족 대표 대부분은 영유아 시기 4.3을 겪거나 추후 전해들었을 뿐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고 입을 모았다. 

수십년간 ‘빨갱이의 가족’으로 내몰린 2차 피해로 인해 후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입 밖으로 4.3 때 피해 얘기를 꺼내지 않아서다. 특히 이날 재심 대상자들 모두 사형·무기징역이라서 ‘속숨한 세월(속숨하다=가만히 있으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의미의 제주어)’이 더 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합동수행단은 4.3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무죄를 구형했고, 변호인도 무죄를 변론했다. 이에 맞춰 재판부도 30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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