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대 4.3융합전공 첫 학술대회 신진 연구자 세션
현재 진행형 문제의식으로 날카로운 4.3 인식 ‘눈길’

피해자 재심과 보상까지 이뤄낸 제주4.3을 향해, 누군가는 ‘완결’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신진 연구자들은 여전히 풀어야 하는 과제들이 남아있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20일 열린 제주대학교(제주대)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 과정 제1회 학술대회 두 번째 세션은 대학원생과 신진연구자들이 담당하며 주목을 받았다. 발표자들은 4.3 항쟁성, 민보단, 백조일손유족회를 통한 보상 협상 작업, 사후양자 논쟁, 희생자성, 피해자의 명예 인식까지 다양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며 4.3 연구의 미래를 전망했다.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 과정 제1회 학술대회 두 번째 세션이 20일 열렸다. / 사진=제주대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 과정 제1회 학술대회 두 번째 세션이 20일 열렸다. / 사진=제주대

4.3 문학 속 항쟁성

김소영(제주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은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이전 4.3소설 속 ‘항쟁’ 담론을 분석했다. 

김소영은 “4.3의 경우, 체제에 반기를 들었던 이들은 국가에 의한 희생자 선별 과정에서 제외됐으며, 4.3의 역사적 성격과 책임의 문제를 규명하는 시도보다는 ‘무고한 피해자성’의 범주에 벗어나지 않는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 문제에 중점을 둔 국가 주도의 ‘법을 통한 과거청산으로 이어졌다”고 바라봤다.

그러면서 “이번 연구는 국가폭력론으로의 4.3 담론 형성이 이뤄낸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한편으로 4.3뿐만 아니라 한국의 과거사와 현재의 분단체계를 인식하는 사유체계를 일원화하고 문학적·정치적 상상력의 지평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했다.

김소영은 “민주화 이행기에 나타난 4.3소설에서의 통찰은 오늘날 ‘사실’의 영역에서 과거화된 4.3을 다시 ‘운동’으로 사유해 현재화하려 한 시도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소설의 면면에 감지되는 작가들의 불안의식은, 4.3의 문제를 과거라는 시공간에 박재해 진실 찾기, 추모와 애도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 내지 불가능성을 예감하는 것으로 읽어낼 수 있다”고 밝혔다.

소설 ‘화산도’ 등장인물을 통한 당대 청년들의 고민

방선미(제주대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는 김석범의 대하소설 ‘화산도’ 속 등장인물을 분석하면서, 국가의 건설이라는 당면 과제 앞에서 제주 청년들의 교양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고찰했다.

방선미는 “소설 ‘화산도’는 반성하지 않는 문학자로 실존 인물인 이광수와 허구적 인물인 나영호를 비판한다. 그리고 자기반성적 태도를 여러 제주 청년들을 통해 보여준다”면서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적 인물인 이유원의 자기반성은 자신의 교양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는 속물 교양주의와의 대결을 보여준다. 또한 한성일보 윤봉은 재경유학생 모임에서 도의회 의원 한성규와 친일에 대한 공방을 벌이는데, 이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반성적 태도는 이방근의 시선과 연결돼, 해방기 국가의 건설이 친일파를 토대로 이뤄진 신생독립국이었음을 지적하며 반성적 문학자의 사유가 왜 필요한지 강조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마지막으로 ‘화산도’는 귀환 청년들이 ‘빨갱이=비국민’의 논리에 따라 국가 건설의 과정에서 배척당하는 상황을 통해 그들의 교양이 외면당했음을 보여준다”며 “(등장인물들은) 4.3에 동참한 제주 청년들이 비국민으로 내몰리자 이들을 살리고자 밀항을 계획한다. 이러한 생명 윤리는 (화산도의) 속편인 ‘바다 밑에서’에서 남승지를 통해 4.3난민 구출이라는 혁명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화산도’는 해방기 국가의 건설 과정에서 벌어졌던 제주 청년들의 길항을 통해 이 시기 우리가 갖췄어야 할 교양이 무엇이었나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방선미 발표에 대해 토론자 고은경(제주4.3평화재단 연구원)은 “소설 ‘화산도’에서 4.3 당시 죽음에 대한 윤리적 문제는 다양하게 읽어낼 수 있다. 남승지를 통해서 당조직의 문제, 양준오의 죽음과 이방근의 죽음의 선택에 있어서도 윤리적인 문제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한다. 윤리의 문제에 좀 더 주목해서 교양과는 별개의 논문으로 발전됐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

두 번째 세션 발표, 토론자들. / 사진=제주대
두 번째 세션 발표, 토론자들. / 사진=제주대

4.3의 대리전 행위자 ‘민보단’

임혜송(UCSD 역사학 박사 수료)은 4.3 당시 민보단을 살폈다. 그는 “4.3 특별법에 비춰보면 두 가지 한계점이 드러난다. 무형의 정신적 트라우마는 고려되지 않으며, 명확한 가해자 없이 피해자만 존재하며 가해와 피해, 양 축 사이에 존재하는 보다 복잡하고 모호한 경험들은 4.3사건의 법적 고찰에서 고려되지 않고 있다”면서 “이러한 가해자성, 피해자성 사이에 존재하는 복합성과 다층성을 드러내기 위해 4.3사건에서 민보단의 양면적 역할과 위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임혜송은 “민보단을 미군정-이승만 정권-토벌대-서북청년단-민보단으로 이어지는 대리적 폭력의 피라미드형 명령 구조 속에 위치”시키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아시아 사람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군사화(soldiering) 전략을 제시했는데, 1970년대 베트남전과 1902년 필리핀·미국전쟁”을 예로 꼽았다.

임혜송은 “(4.3 당시) 제주도민들은 생계를 위한 식량을 구할 길도 막막했지만 동시에 토벌대에 의해 보초 임무를 수행해야 했고, 토벌대와 무장대 양측에 식량을 제공해야 했다”며 “토벌대의 진압작전에 동원되는 과정에서, 민보단원들은 강제로 불려나오거나 명령을 받아 다른 제주민들을 죽창 등으로 죽일 것을 명령받았다. 4.3사건이 진행되는 기간, 학살은 무차별적이었고 아기와 임산부에 대한 학살 또한 많은 증언과 조사 기록에서 확인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자신이 민보단원으로서 누군가를 죽이거나 공격했던 경험을 털어놓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민 대다수가 민보단으로 편성됐던 규모를 생각하면, 이 침묵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준다”고 짚었다.

임혜송 발표에 대해 하유식(김해시청 시사편찬 담당관)은 “제주도 민보단의 역할과 관련해 기존 발굴된 자료에서 ‘피해’의 경험뿐만 아니라, 직접 살해와 기부금 강요 같은 ‘가해’의 자료와 ‘중간자’로서의 자료를 분류해 살펴보거나, 지역별로 구분해 민보단의 조직 체계와 활동을 정리하는 것이 민보단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백조일손유족회가 보여준 “협상의 정치”

진영옥(제주대 사회학과 박사과정)은 백조일손유족회 증언을 중심으로 4.3보상을 둘러싼 협상의 정치에 대해 고찰했다.

그는 “백조일손유족회는 가족들의 피해가 공식적인 4.3과는 무관한 피해였다는 논리를 내세워 1997년 4.3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를 탈퇴했고,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해 2007년 진실규명결정문을 받았다. 이후 백조일손유족회는 변호사를 선임해 집단적으로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그 결과, 2015년에 보상을 획득했다”고 소개했다.

진영옥은 “백조일손유족들은 긴 세월 자신만의 언어를 갖지 못하고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의 위치로서 침묵하고 말을 못하고 살았다”면서 “그 과정에서 제도를 활용하는 협상의 기술을 학습했고, 증언의 가능성을 찾으면서 살아왔다”고 설명했다. 또한 “제도적 틀을 활용한 진실말하기는 자신들만의 이해관계에 기반해 국가기구를 활용하는 도구로 쓰였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빨갱이가 아니고 4.3과 무관한 사람들이었다는 집단기억을 만들기 위해 백조일손유족회의 리더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피해자성·희생자성을 극대화하고 기억을 단일화시켜왔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진영옥 발표를 두고 김민환(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은 “매우 민감하면서도 흥미로운 사례를 소재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은 너무나 분명하다”면서 “어떤 요소를 중심으로 백조일손유족회가 전개한 ‘협상의 정치’의 양상을 살펴보면서 이 연구의 목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연구수행과 글의 서술 과정에서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두 번째 세션 발표, 토론자들. / 사진=제주대
두 번째 세션 발표, 토론자들. / 사진=제주대

풀리지 않고 남아있는 갈등...사후양자

염현주(제주대 사회학과 박사수료)는 4.3을 둘러싼 사후양자 논쟁을 다뤘다. 그는 “4.3 희생자 유족과 보상금 청구권자의 범위, 방계혈족, 제사봉행 및 분묘관리 등의 기준들이 교차하며 논의되는 가운데, 떠오른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사후양자”라고 꼽았다.

염현주는 “사후양자는 논쟁 끝에 결국 보상금 청구권자에서 배제됐지만 4.3특별법 개정으로 유족의 범위에 포섭될 수 있게 됐다”면서 “하지만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위원회)가 사후양자 결정을 하려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이해관계인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이 경우 위원회는 해당 이해관계자의 이의가 있는 경우에는 사실상 양친자관계가 존재한다는 결정을 해서는 아니된다는 조항이 단서로 붙어 사후양자 논쟁은 이제 법적 차원을 넘어 행위자(신청자) 차원에서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염현주는 실제 4.3 사후양자 다섯 명과 인터뷰를 가졌고 “위 사례들을 보면 법으로 수렴되지 않는 가족과 돌봄의 관계들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9.11테러 이후, 미국에서 보상금 수령권자를 놓고 소송이 벌어졌다. 희생자의 레즈비언 배우자가 15년 이상 지속됐던 친밀한 관계를 입증하면서 생물학적 가족이자 보상금 수령권자였던 희생자 오빠에게 승소해 정당한 법적 배우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게 됐다”며 “4.3도 현재와의 관계성 속에서 사회적 의미를 확장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염현주 발표에 대해 남경우(을지대 강사)는 “보상받을 권리에 대한 논의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라면 구술 내용으로 사례를 들면서도, 보다 명확한 사례의 구분이 있어야 한다”며 “기존 가족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라면 그에 대한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시각 또한 보완돼야 할 것”이라고 제시했다.

4.3 운동사에 있어 분기점이 된 두 소송

안향선(UCSD 사회학 박사수료)은 4.3과 연관된 두 가지 소송을 통해 4.3 희생자성(Victimhood)의 형성과 발현을 짚었다. 1999년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씨가 제민일보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 2017년 제주지방법원에서 제기된 수형 희생자 재심 청구 소송이다. 

안향선은 “2007년과 2021년의 4.3특별법 개정과 같은 법적 변화는 이러한 소송의 영향을 받았다”고 판단하며 “각 소송에서의 승리는 희생자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생존자와 유족들 사이에 강력한 긍정적 피드백 루프를 생성했다. 재판은 개인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입법 개정을 추진하는 활동가들에게도 중요한 모멘텀을 제공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소송 과정은 단순히 법적 분쟁 해결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며, 침묵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정체성을 재평가하며, 사회적 담론에 도전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안향선의 발표에 권태윤(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 위원장)은 “변호사로서는 늘 사회운동의 최후 수단, 종착역으로 소송이 이용되는 현실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한번 확정된 판결이 얼마나 무거운지, 판결을 뒤집는 것이 얼마나 오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그만큼 승소한 판결을 통한 긍정적 피드백 루프가 큰 영향력을 가지는지를 생각한다면, 사회운동에서의 법적 동원에 너무 소극적인 태도도 옳지는 않겠다”고 의견을 냈다.

학술대회 모습. / 사진=제주대
학술대회 모습. / 사진=제주대

4.3 희생자에게 ‘명예’란 무엇인가

이규홍(제주대 사회학과 석사과정)은 4.3수형인 재심 재판을 통해 4.3 피해자들의 진정한 명예와 명예회복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졌다.

이규홍은 “수형인의 명예는 재심재판을 통한 무죄 판결에 의해 회복됐다고 볼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서 “4.3과 관련한 명예는 재심재판의 피고인과 희생자에 국한되는 요소일 수 없다. 또한 삶의 여러 국면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을 타자와 연결하려는 노력과 함께 개인의 다양한 욕구와 염원과도 관계함으로써 명예는 입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규홍은 “먼저 4.3에서 명예를 ‘회복’ 해야 하는 또는 명예회복을 ‘조치’ 해야 하는 관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며 “명예에 대한 단일한 시각 속에서 당사자의 생애는 죄의 유무 여부로 규정돼 버리며, 명예회복의 완결성을 주장했을 때 당사자의 시간과 공간, 행위들은 더 이상 입체적으로 조명되기 어렵다. 명예를 개인 또는 집단의 경험과 의식에 의해 개척되고 구축되는 것으로 간주했을 때, 명예 자체에 대한 사회적 해석은 다각화될 여지가 생긴다”고 전망했다.

또한 “4.3에서 명예의 담지자를 수형인으로 규정하는 현재의 논의를 넘어 좀 더 다양한 정체성의 형성과 정립을 고려하고, 당사자가 드러내는 인식과 정치 행위에 기반해 새롭게 정의하는 시도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고 제시했다.

이규홍 발표에 대해 김종곤(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은 “이 글이 던지는 질문이 흥미로웠던 것은 일반적으로 국가폭력 사건에 있어 ‘명예’를 막연히 피해자·유가족 지위 인정, 진상규명에 따른 국가의 잘못 인정(정부의 입장표명), 금전적 보상, 그리고 이 글에서 문제를 삼고 있는 사법재판(재심)의 결과에 따라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어떤 것’(부수적인 것)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명예 그 자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추상적이고 때로는 수사적으로 개념을 안일하게 사용했다는 질타를 받는 것 같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발표자가 강조하듯, 여전히 수형인이란 이름으로 죄의 유무를 판단하고, 법정에 서는 개인에 한해서만 명예회복을 운운하는 한국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명예의 명에를 씌워 ‘명예폭력’과 ‘명예살인’을 자행했던 그때 그곳에서 큰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발표문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음에도 그런 생각에 씁쓸함이 남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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