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마을신앙] ③ 건입동 영등송별제

한국의 대표 관광지 제주도, 그러나 앞서 긴 세월 동안 제주는 고유한 마을신앙과 함께 끈끈한 공동체를 유지해온 섬이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2023년 연구자 68명과 함께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전라북도, 그리고 제주도의 마을신앙을 조사했다. 일명 ‘한국의 마을신앙―전라·제주권’ 조사 보고서다. [제주의소리]는 ‘한국의 마을신앙―제주도편’을 매주 토요일마다 연재한다. 급변하는 변화 속에 급격히 사라지는 제주의 마을신앙을 통해 제주 공동체 문화의 근원을 만나본다. / 편집자 주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영등송별제

조사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조사일시
2023년 03월 04일 16시 50분~17시 30분(사전조사)
2023년 03월 05일 16시 50분~17시 30분(참여관찰)
2023년 03월 06일 16시 50분~17시 30분(사후조사)
2023년 04월 27일 16시 50분~17시 30분(사후조사)

조사자
허용호(경주대학교)

제보자
고덕유, 49세, 남, 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 전승교육사(심방), 2023년 영등굿 주무

고산옥, 71세, 여, 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 이수자(악사), 2023년 영등굿 악사

이용순, 77세, 여, 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 회장, 전승교육사(심방)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건입동 전경.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마을 개관

건입동建入洞은 제주시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제주시 원도심의 주요한 동 가운데 하나로 제주항 주변과 동문 로터리 동북쪽, 사라봉 서쪽 일대를 아우른다. 전체면적은 2.53㎢이다. 2022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8,866명(남: 4,503명, 여: 4,363명)이다. 산지천을 서쪽 경계로, 사라봉을 동쪽 경계로 하고 북쪽에는 제주항이 자리를 잡고 있고 남쪽으로는 일도동이 있다. 건입동의 지형을 정리해 본다면 동쪽의 사라봉, 북쪽의 바다, 그리고 제주시 동쪽(동문통)을 관통하여 흘러내리는 산지천으로 요약할 수 있다. 

건입동은 산지천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마을이기 때문에 ‘산지’라 부르기도 한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는 ‘산지촌山地村’이라 표기되어 있다. 건입동이라는 명칭은 옛날부터 산지천 하구 지역을 ‘건들개’라고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옛 문헌이나 지도에도 건들개의 이두식 표기인 ‘건입포建入浦’ 또는 ‘건입포巾入 浦’라 표기되어 있다. 건들개의 어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고을라의 15대손 3형제가 신라에 가서 많은 비단과 보물을 받고 돌아올 때 건강한 모습으로 들어온 개의 어귀라 해서 건들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 첫 번째 설이다. 두 번째 설은 북쪽이 바다라는 건입동의 지형적 조건이 바람이 건들건들 불어오는 지역이라 해서 건들개라 불렀다는 것이다.

산치천의 하구에 있는 포구인 건들개 근처에 모여 고기잡이와 물질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이룬 마을이 건입동이다. 건입동은 본래 어업을 주 생업으로 하는 어촌이었다. 1904년에 나온 『제주목삼군호구가간총책濟州牧 三郡戶口家間總 冊』에 따르면 건입리의 가호家戶는 198호, 인구는 481명이다. 그런데 1920년대 건입포의 항만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1927년 5월 개항함에 따라 상공업을 위주로 하는 마을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주정 공장을 위시하여 크고 작은 각종 공장이 건입동에 자리했다. 제주항이 제주도의 관문 역할은 물론이고, 관광 지원항, 물류 중심항의 역할을 함에 따라 건입동의 중심 생업이 바뀌게 된 것이다.

제의의 유래와 전승

제주도에서는 음력 2월을 영등달이라 한다. 제주도 사람들은 영등달에 영등신이 제주도로 들어와서 여러 마을을 거쳐 다시 2월 보름날에 나간다고 생각한다. 2월 초 하룻날 한림의 수원리로 들어와 보름에 성산포 우도를 거쳐 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등신의 여정에 맞춰 제주도 해안가 마을을 중심으로 굿을 벌이는데, 이를 영등굿이라 부른다. 영등굿에서는 풍어와 해상안전, 그리고 소라·전복·미역 등의 풍성함을 기원한다.

제주도 영등굿과 관련한 문헌 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이원진李元鎭(1594~1665)의 『탐라지耽羅志』, 홍석모洪錫謨(1781~1850)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2월 초하루에 영등굿을 했고, 보름날이 되면 파했는데 이를 연등燃燈이라 했다’라는 내용이다. 영등달에는 ‘배 타는 것을 금했다’라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삼는다면, 적어도 16세기 초반부터 영등굿이 벌어졌다고 할 수 있다.

김석익金錫翼(1885~1956)의 『해상일사海上逸史』와 담수계淡水契의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1954)에는 영등굿의 유래가 언급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상인의 배가 난파되고 이에 따라 시신이 머리, 손과 발 네 부분으로 흩어져 어등포, 고내포, 애월포, 명월포에 떠올랐다. 이 때문에 매년 음력 정월 그믐 때 온갖 바람이 서해로부터 불어왔고, 이를 영등신이 오시는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이에 음력 2월 10일부터 보름까지 지역민과 무당이 함께 굿을 하게 되었다.

문헌에 기록된 영등굿 유래담은 구술 전승되는 것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 제주도 한림읍 한수리에는 영등신을 모시는 당이 있는데, 영등신 본풀이 역시 전한다. 이에 따르면 외눈배기섬으로 표류한 어부들을 죽음의 위기에서 영등이 구해주었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영등은 외눈배기에게 죽임을 당했다. 세 토막이 난 영등의 몸은 머리는 우도, 발은 한수리, 몸체는 성산에 올랐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영등을 위해 음력 2월에 제를 올리게 되었다. 제일을 음력 2월로 정한 것은 영등이 어부들을 구해줄 때, 영등달 초하루에는 자신을 생각하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등굿 관련 유래담이 문헌과 구술로 전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건입동 칠머리당과 직접 관련은 없다. 칠머리당과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유래담은 현용준이 조사한 여자 심방 이씨의 구술이다. 그 내용은 위의 영등신 본풀이 내용과 거의 유사하지만, 후반부가 좀 다르다. 심방 이씨의 구술에 따르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은 예상한 영등은 은혜를 갚으려는 어부들에게 해마다 “정월 그믐에 소섬牛島에 도착하고, 2월 초하룻날엔 산지(제주시 건입동 산지)에 왼발을 디디고 수원리에 오른발을” 디딜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도착했다는 증거로 바닷가의 보말을 다 까먹으며 갈 것이니, 보말 속이 비었거든 자신이 도착한 줄 알고 제를 지내라고 하였다. 그 후로 2월이 되면 보말 속이 다 비고, 영등이 2월 초하룻날 와서 보름날 나간다 하여 수원리 영등당에서는 매년 큰굿을 하게 되었다. 이 유래담은 앞의 유래담과는 달리 산지 곧, 건입동과 영등의 연관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영등신이 산지에 왼발을 디딘다’는 언급에서 건입동 칠머리당에서 영등굿을 하는 연유를 파악할 수 있다.  

이월 초에 내방來訪하는 영등신은 제주도 곳곳의 산과 물 구경을 다닌다고 한다. 그 노정은 ‘어승생 단골머리 → 소렴당 → 산방산 → 더리디끗(교래리) → 세경너븐드르 → 각 마을의 해변’으로 이어진다. 영등신은 제주도 곳곳을 구경하고 우도 질진깍을 거쳐 돌아간다. 이때 제주도 400리를 돌아가며 고기씨, 소라씨, 전복씨, 오분재기씨, 문어씨 등을 많이 뿌려두고 간다고 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영등신의 노정인데, 건입동 칠머리당 본풀이에서 역시 유사하게 구송된다. 하지만 칠머리당에서의 제의와 칠머리본향당신의 역할이 덧붙여져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영등신이 이월 초하루에 내방하면 영등손맞이를 하고 칠머리당신인 도원수 감찰관이 팔목을 잡아 한라산, 백록담, 삼방산 등을 함께 구경하고 이월 열나흗날 영등송별대제를 한다는 것이다. 영등신의 내방과 귀로의 노정에 건입동 칠머리당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제주도에서의 영등굿은 16세기 초반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앞에서 살폈듯이 관련 문헌 기록이 이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20세기 이전의 기록에서 건입동 칠머리당 영등굿을 특정한 경우는 없다. 건입동 칠머리당 영등굿과 관련한 가장 이른 시기 기록은 1950년대 말에서 1960년에 걸친 조사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성기와 현용준에 의해서 이루어진 칠머리당 본풀이 조사 기록을 통하여 1950년대 이후 칠머리당 영등굿의 존재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심방 이달춘과 홍상옥은 칠머리당 본풀이를 구술하면서 음력 2월 1일에 ‘환영 영등제’ 혹은 ‘영등 손맞이’를 하고, 2월 14일에 ‘송별제’ 혹은 ‘송별대제’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칠머리당 영등굿은 이전에도 제주도 영등굿을 대표하는 의례 중 하나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8년 북촌당에서 벌어진 영등굿에서 씨드림 대목을 보면 “오널 영등달 열사을날十三日 손맞이 받고, 뉠來日은 산지山地 칠머리 받곡 대보름날大 望日 소섬牛島 진질깍으로 배船 놓아 가져 허시는디”라 하여 칠머리당 영등굿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1960년대에 포착되었던 칠머리당 영등굿은 이후 전승 과정에서 적지 않은 변화를 거쳤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당의 이동이다. 이는 칠머리당 본풀이에서도 “지방턱에 올라서 좌정하였다가, 거기는 축항하게 되어서 칠머리 노단 어깨”에 신들이 좌정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제주항 건설과 확장으로 인해 현 현대아파트 자리에서 현 부두터미날 부근의 구릉곶으로 옮겼다가, 다시 현재의 사라봉 뒤쪽 기슭으로 당이 옮겨진 것이다. 1970년대 초반에는 제단과 위패가 철거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당의 위치 변화는 제의의 변화를 추동하기도 했다. 그 사례가 ‘씨드림’ 연행 방식의 변화이다. 씨드림은 어획물의 풍요를 기원하면서 바다에 직접 씨를 뿌리는 행위이다. 이러한 씨드림을 지금은 ‘시멩텡이’에 씨를 담아 던지는 ‘씨멩텡이 놀림’의 형식으로 연행한다. 소미 두 명이 등장하여 씨앗을 담은 씨멩텡이를 들고 춤을 추다가 높이 던졌다 받기를 여러 차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칠머리당이 바닷가에서 비교적 거리가 떨어진 곳으로 옮겨지면서 직접 씨를 뿌릴 수 없게 되어서 일어난 변화이다. 김윤수 심방에 의하면 씨드림이 씨멩텡이 놀림 형식으로 변화가 이루어진 것은 1985~6년경이라 한다.  

칠머리당 영등굿의 전승 과정에서 일어난 제의 내용상의 또 다른 변화는 영감놀이 대목의 삽입과 확장 및 정교화이다. 과거 칠머리당 영등굿에서 영감놀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감놀이 대목의 삽입 이유를 단골 중에 배를 부리는 선주들이 많아서 그들을 위해서 마련한 것이라 하기도 하고, 재미와 흥행을 위해서 삽입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기록상으로 볼 때, 칠머리당 영등굿에서의 영감놀이 등장은 적어도 1984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영감놀이에 대한 조사보고는 1965년 현용준에 이루어졌지만, 칠머리당 영등굿에서의 영감놀이 연행은 1984년에야 확인할 수 있다. 1984년 음력 2월 14일 칠머리당 영등굿에서 안사인이 수심방으로 오방근 외 2명이 ‘영감 도깨비’ 역을 맡아 연행한 기록이 있다. 이후 영감놀이는 칠머리당 영등굿의 한 제차로 자리 잡는다. 영감의 내력을 풀고, 굿당에 청하여 모시고 놀린 후, 배를 띄워 보내는 구성을 갖추고 연행한다. 실제 등장하는 영감들은 초기 3명이 등장했지만, 현재는 영감 일곱 형제 모두가 연행자로 등장하는 양상을 보인다. 칠머리당 영등굿의 후반부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대목으로 영감놀이가 자리 잡는다.

제당 형태와 제의 절차

제당 형태와 신격

당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건입동 지역의 ‘칠머리’라 불리는 곳에 칠머리당이 있었다. 하지만 제주항이 만들어지고 확장됨에 따라 몇 차례 이동을 거듭하다가 현 위치인 사라봉 뒤쪽 기슭에 자리하게 되었다. 경사진 곳에 직사각형 형태로 자리한 칠머리당에는 자연석 3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그 뒤로는 낮은 돌담이 п자 형으로 둘러쳐 있다. 당 입구 서쪽에 ‘제주칠머리당’이라 쓴 표석이 있다. 멀리 보이는 바다를 등지고 자리한 3개의 자연석에는 신위가 각각 두 분씩 새겨져 있다. 서쪽 자연석에는 ‘海神船王 靈登大王 神位’, 가운데 자연석에는 ‘都元帥 配龍王夫人 神位’, 동쪽 자연석에는 ‘南堂할바님 南堂할마님 神位’라 쓰여 있다. 이로 보아 칠머리당에는 총 여섯 분의 신이 모셔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칠머리당의 주신은 ‘도원수 감찰지방관’과 ‘용왕 해신부인’이다. 부부인 두 신을 간결하게 ‘都元帥 配龍王夫人 神位’로 표기하여 칠머리당 중앙에 모셔 놓았다. 도원수 감찰지방관은 강남천자국의 천하 명장으로 나라를 어지럽히는 적들을 평정하고, 용왕국으로 들어가 용왕부인을 배필로 삼아 함께 제주도로 들어와서 칠머리당에 좌정했다고 한다. 그는 마을 전체의 토지, 주민의 생사, 호적 등 생활 전반을 관장하고 지켜준다고 알려져 있다. 용왕 해신부인은 마을 사람들이나 심방 모두 ‘요왕 해신부인’이라 부른다. 이 신은 어부와 해녀의 생업, 외지에 나간 주민들을 지켜준다고 한다.

건입동 칠머리당.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칠머리당 동쪽에 모셔진 남당 하르방과 남당 할망 역시 부부신이다. 자연석에는 ‘南堂할바님’과 ‘南堂할마님’이라 쓰여 있지만, 보통 남당 하르방, 남당 할망이라 부른다. 이들은 원래 칠머리당의 신이 아니었다. 제주시 일도동 막은골에 있었던 남당의 신이었는데, 당이 헐리면서 칠머리당에 함께 모셔졌다. 서쪽에 모셔진 해신선왕과 영등대왕 역시 칠머리당의 신은 아니다. 해신선왕은 배를 관장하는 선신船神이고, 영등대왕은 영등신이다. 두 신은 모두 해상 안전과 어업을 수호해 주는 신이어서 칠머리당에 함께 모셔 놓았다.

제의 준비과정

제수 준비

영등굿을 앞두고 칠머리당 단골인 산지 어촌계(건입동 잠수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제물로 쓸 해산물을 직접 채취한다. 제물로는 전복과 소라, 문어 등이 쓰이는데, 건입동 잠수회 소속 해녀들이 직접 잡는다. 굿상에 올릴 다른 제수 역시 건입동 잠수회 회원들 중심으로 준비한다. 과일과 떡, 술, 그리고 양초, 옷감(폐백) 등을 사거나 직접 준비하는 것이다.

굿청 장식물과 무구 만들기

칠머리당 영등굿은 제주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 소속 심방들이 맡는다. 이들은 굿을 앞두고 굿청을 장식하고 굿에 쓰이는 무구를 정비하거나 새로 만든다. 기메, 열명지列名紙, ᄃᆞᆯ래지, 지전, 지게살장(살창), 오방각기, 통기전, 짚배 등을 만들고 정비하는 것이다. 기메는 천지월덕기(큰대), 감상기, 군문기, 요앙기 등에 매다는 무구로 보통 한지로 만든다. 열명지는 굿에 참여하는 마을 사람들, 기관, 단체 등의 이름을 한지에 쓴 것으로, 굿을 할 때 굿청에 건다. ᄃᆞᆯ래지는 저승길에 매다는 것이고, 지전은 저승 노자돈으로 쓰이는 것이다. 지게살장(살창)은 신을 모신 방에 쳐 가리개 구실을 하는 것이고, 오방각기는 신들의 왕래를 통제하기 위해 굿청에 매다는 기이다. 통기전은 굿청에 등롱燈籠으로 매다는 것이다. 짚배는 영등굿의 마지막 제차인 배방선을 할 때 바다에 띄워 보내는 것이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배방선을 할 때 바다에 띄워 보낼 짚배.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영등송별제 현수막 중앙 위로 솟아 있는 월덕기와 좌우의 좌둑기, 우둑기. 현수막 아래로는 열명지, 지게살창, 신명을 적은 천 등이 걸려있다./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새로 만들거나 정비를 한 장식물들은 굿하는 날 아침 일찍 굿청에 설치한다. 한편으로는 제물을 진설하고, 한편으로는 장식물을 굿청에 설치하는 것이다. 굿청 장식물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큰대이다. 북쪽 바다를 등지고 큰대를 세우고 기를 매어 단다. 가운데에 월덕기, 왼쪽에 좌둑기, 오른쪽에 우둑기를 달아매는 것이다. 그리고 ‘다리’라 부르는 긴 무명과 긴 오방색 천을 월덕기에 묶어 길게 늘어뜨려 굿청의 하늘을 장식한다.

제상 차리기

칠머리당 영등굿의 대표적인 제상은 도제상都祭床이다. 도제상은 마을 전체의 기원용으로 차려 올리는 제상을 말한다. 도제상은 관례적으로 선주회장과 건입동장이 차려왔지만, 최근에는 건입동 잠수회를 중심으로 한 단골들과 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에서 준비하고 차린다. 도제상으로는 초감제상, 영등호장상, 제석상, 요왕맞이상, 요왕차사상, 대령상, 공싯상 등이 있다.

초감제상은 굿을 처음 시작하는 초감제 때 차리는 상이다. 칠머리당에 모셔진 신들의 각 위패 앞 제단에 차린다. 쌀·실·돈, 메, 시루떡, 제물, 채소, 과일 등을 초감제 상 위에 진설해 놓는다. 초감제상 앞에는 대령상과 공싯상이 놓인다. 대령상에는 마량(쌀), 향로, 잔 3개, 바라 등이 올려지고, 공싯상에는 떡, 과일, 쌀, 잔 3개, 멩두 등이 올려진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마을 주민들, 단체, 기관 등에서 축원을 위해서 올린 상. 돌래떡, 술, 쌀, 과일 등이 제물로 올려져 있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요왕맞이상은 요왕맞이를 할 때 다시 차리는 제상이다. 나까도전(큰 시루떡), 제물(작은 시루떡과 돌래떡), 과일, 계란, 채소, 잔 3개, 쌀, 펜포(명태), 소지 3장 등이 올려진다. 요왕차사상과 영등호장상은 당 입구 쪽에 놓인다. 요왕차사상에는 제물, 과일, 계란, 채소, 잔 3개, 쌀, 펜포, 지전 3장, 무명천 3개 등이 올려진다. 영등호장상에는 시루떡, 돌래떡, 과일, 계란, 채소, 잔 3개, 쌀, 소지 3장, 지전 3장 등이 올려진다. 영등호장상 밑에는 전복, 소라, 문어, 오곡씨(보리·조·쌀·팥·콩) 바구니 등을 올린다. 

마을 차원이 아니라 각 집안에서 준비해서 올리는 상도 있다. 단골들이 집안 축원을 위해서 제물을 각각 차려와 올리는 것이다. 이 상에는 메, 돌래떡, 계란, 채소, 과일, 술, 쌀, 소지 3장, 지전 3장 등이 제물로 차려진다.

제의 진행과 절차

건입동 칠머리당 영등굿은 매년 음력 이월 초하루에 영등환영제를 하고 이월 열나흗날에 영등송별제를 한다. 2023년의 영등송별제는 3월 5일 오전 9시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삼석울림과 궤문열림으로 시작하여, 초감제, 공연, 요왕맞이, 씨드림·씨점, 액막이, 영감놀이, 배방선, 도진 등의 절차를 다 하고 저녁 7시경에 마무리되었다. 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장인 이용옥 심방이 굿 전반을 주관하는 수심방 역할을 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고덕유 심방이 수심방으로 주요한 굿 절차를 주도했다. 칠머리당 영등굿의 진행과 절차는 시대와 조사·연구자에 따라 조금은 다르게 정리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제주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의 ‘2023년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영등송별제’ 팸플릿 제차 구분에 의거하여 정리한다.

삼석울림과 궤문열림  삼석울림은 하늘 옥황 삼천제석궁三千帝釋宮에 연물을 연주하여 굿을 시작한다는 것을 알리는 제차이다. 소미들이 북, 설쇄, 대양 등을 잠시 연주한다. 느린 장단인 ‘늦은 석’으로 시작하여 보통 빠르기 장단인 ‘중판 연물’을 거쳐, 빠른 장단인 ‘잦은 석’으로 마무리한다. 삼석울림이 마무리되면, 수심방은 청신삼배請神三拜를 하고 요령을 흔들며 향불을 올려 신에게 굿의 시작을 알린다.

이어서 궤문열림을 한다. 궤문열림은 당 안에 본향당신이 거처하는 곳인 ‘궤’의 문을 여는 제차이다. 제주도의 본향당굿에서는 궤문을 열어야 굿이 시작되고 궤문을 닫아야 굿이 마무리된다. 궤는 보통 구멍이거나 함의 형태를 띠는데, 건입동 칠머리당에는 구체적인 궤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구멍을 덮어 놓은 돌을 치우거나 함을 여는 등의 궤문을 여는 구체적인 행위가 벌어지지는 않는다. 수심방이 상궤문, 중궤문, 하궤문을 연다는 사설만을 할 뿐이다. 

수심방이 초감제 중 열명을 하는 가운데, 단골들이 신위에 절을 하고 있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수심방이 초감제 중 열명을 하는 가운데, 단골들이 신위에 절을 하고 있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소미가 초감제 새도림 제차. 단골들을 앉혀 그들의 몸에 낀 부정을 씻어내고 있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소미가 초감제 새도림 제차. 단골들을 앉혀 그들의 몸에 낀 부정을 씻어내고 있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초감제  초감제는 칠머리당굿과 관련되는 신들을 굿하는 시공으로 청하는 제차이다. 먼저 수심방이 나서서 이 굿을 맡게 되었음을 아뢰며 절하고, 굿을 하는 날짜와 장소를 말한다. 이를 ‘날과국섬김’이라 한다. 이어서 단골인 해녀와 선주의 성명과 나이를 신에게 고하는 ‘열명’을 한다. 그리고 굿을 하게 된 연유를 아뢰는 ‘연유닦음’을 한다. 또한 굿판으로 청할 신들의 직책과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는 ‘신도업’을 한다. 이어서 이제 신들이 지상에 내려올 수 있도록 하는 ‘군문열림’ 제차를 진행한다. 군문열림은 신들이 인간 세상으로 내려올 수 있도록 문을 여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제차이다. 군문열림 다음에 ‘새도림’을 한다. 신이 내려오는 길과 굿을 하는 장소, 그리고 굿에 참여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혹 있을지 모르는 부정한 것을 씻어내는 재차이다.

새도림  다음 제차는 이제 깨끗하게 정화된 굿청으로 신을 청하는 ‘신청궤’와 ‘정데우’이다. 여기서 1만 8천 신들을 모두 굿청으로 오시도록 청한다. 여기서 칠머리당 본향신도 청해지는데, 이 대목을 ‘본향듦’이라 부른다. 본향듦은 초감제가 아니라 독립적인 제차로 구분할 정도로 강화되고 확장되어 벌어지기도 한다. 칠머리당 본향신인 도원수 감찰지방관이 바로 이 대목에서 위엄있고 강렬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본향신까지 청해서 굿청에 들인 후 심방과 단골은 물론이고 굿판에 모인 사람들까지 모두 어울려 함께 노는 ‘석살림’이 이어진다. 이 석살림을 마지막으로 초감제는 마무리된다. 초감제가 끝나고 난 후 점심을 먹기 위해 굿이 잠시 중단되었다. 심방과 단골, 그리고 굿을 보기 위해 모인 모든 사람이 함께 굿판에서 점심을 나누어 먹었다. 

공연(供宴)  점심을 먹은 후 굿청에 모신 신에게 제물을 권하는 제차인 공연이 시작되었다. ‘추물공연’, ‘금베리잔’, ‘나까시리놀림’, ‘지장본풀이’ 등을 이 제차에서 연행한다. 추물공연은 차린 제물을 하나하나 언급하면서 신에게 권하는 대목이다. 금베리잔은 술잔을 권하는 대목이다. 나까시리놀림은 시루떡을 높이 던졌다 받아내기를 여러 번 하고, 그 시루떡을 조각내어 신에게 바치고 단골에게도 나누어 먹이는 대목이다. 이러한 절차를 거친 후 지장아기씨의 내력을 푸는 지장본풀이 구연이 이어진다.

요왕맞이  요왕맞이는 용왕과 영등신을 청하여 대접하는 제차이다. 본향듦이나 석살림을 제외하고 앞서 연행했던 초감제 절차를 다시 한번 더 연행하는 것으로 요왕맞이는 시작한다. 심방이 줄곧 서서 진행한다는 점도 앞서 행한 초감제와 다른 점이다. 초감제를 마친 후 바다에서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방광침’을 한다. 그리고 추물공연을 하는데, 앞에서 연행했던 추물공연도 동일하다.

본향신의 징표인 ‘팔찌거리’를 팔에 두르고 있는 수심방.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본향신의 징표인 ‘팔찌거리’를 팔에 두르고 있는 수심방.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칠머리당 본향신인 도원수 감찰지방관이 몸속에 들어온 수심방의 모습.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칠머리당 본향신인 도원수 감찰지방관이 몸속에 들어온 수심방의 모습.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점심을 먹는 심방과 단골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점심을 먹는 심방과 단골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나까시리 놀림을 하는 소미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나까시리 놀림을 하는 소미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굿 참여자들이 소미가 나누어 주는 떡을 받고 있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굿 참여자들이 소미가 나누어 주는 떡을 받고 있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이어서 ‘요왕질침’을 한다. 용왕신이 오가는 길을 치우고 닦아 문을 여는 제차이다. 댓가지를 양쪽에 나란히 세워 ‘요왕질’(용왕길)을 만들고, 그 사이를 심방이 여러 차례 오가며 길을 돌아본다. 또한 길을 치우고 닦는 모습을 보여주고, 흰 천을 깐다. 그리고 댓가지 끝을 묶어두었다고 하나씩 푼 후, 풀어낸 댓가지를 뽑아낸다. 이러한 심방의 행위는 용왕이 오가는 길의 문이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씨드림·씨점  씨드림은 바닷가에 씨를 뿌려서 어획물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차이다. 원래 직접 바다에 나가 씨를 뿌렸지만, 지금은 씨멩텡이 놀림 형식으로 연행한다. 소미 두 명이 등장하여 씨앗을 담은 씨멩텡이를 들고 춤을 추다가 높이 던졌다 받기를 여러 차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칠머리당이 바닷가에서 비교적 거리가 있는 곳으로 옮겨지면서 바다에 직접 씨를 뿌릴 수 없게 되어서 일어난 변화이다. 씨멩텡이 놀림을 끝낸 후, 좁쌀을 돗자리에 뿌려 그 흩어진 모양을 바탕으로 어획물의 풍요를 예상해 보는 씨점을 친다.

요왕맞이에서 심방이 서서 초감제를 하고 있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요왕맞이에서 심방이 서서 초감제를 하고 있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요왕맞이 요왕질침 대목에서 용왕이 오가는 길에 흰 천을 깔고 있는 단골과 소미.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요왕맞이 요왕질침 대목에서 용왕이 오가는 길에 흰 천을 깔고 있는 단골과 소미.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씨멩텡이 놀림을 하는 소미.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씨멩텡이 놀림을 하는 소미.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씨점을 치는 단골과 심방.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씨점을 치는 단골과 심방.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액막이  한 해 동안 마을과 집안에 나쁜 일이 생기지 않게 막는 제차이다. 심방이 제상 앞에서 기원을 한다. 마을 전체의 액을 막는 ‘도액막음’과 단골 가족들의 운수를 알아보는 ‘각산받음’을 이 제차에서 한다. 보통 도액막음에서는 닭을 대신 죽여서 닥칠지도 모를 나쁜 재앙이나 운수를 미리 막지만, 2023년 칠머리당영등굿에서는 이러한 대신대명 행위가 벌어지지 않았다.

영감놀이  선왕을 대접하고 돌려보내는 제차이다. 먼저 풍어를 이루게 해주는 영감신의 내력을 푸는 ‘선왕풀이’ 또는 ‘영감본풀이’ 구연이 이루어진다. 이어서 영감신들을 청하여 모시고, 놀리는 영감놀이가 벌어진다. 돼지고기, 술, 떡 등으로 영감신들을 대접하고 서우제소리를 부르며 한바탕 놀게 한다. 그리고 영감들을 돌려보낸다.

제상을 치우고, 굿청 장식물을 정리하는 가운데 심방이 액막이를 하고 있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제상을 치우고, 굿청 장식물을 정리하는 가운데 심방이 액막이를 하고 있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영감신의 내력을 구연하고 있는 심방.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영감신의 내력을 구연하고 있는 심방.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굿판에 등장한 영감신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굿판에 등장한 영감신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배방선  제물을 실은 짚배를 바다에 띄워 보내는 제차이다. 이 제차는 칠머리당에 마련된 굿청에서 연행하는 것이 아니라, 바닷가에서 행해진다. 수심방이 소미들을 시켜 제물을 실은 짚배를 바닷가로 가지고 가게 한다. 칠머리당에서 바다까지는 거리가있어서, 트럭에 짚배를 싣고 바닷가까지 간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영감신과 제물을 실어 보내는 내용의 사설을 하며 짚배를 바다 멀리 띄워 보낸다. 띄워 보낸 짚배가 순조롭게 바다 멀리 떠가면 좋다고 여긴다.

도진  칠머리당 영등굿의 마무리 제차는 도진이다. 굿을 하기 위해 굿청으로 모셔왔던 모든 신들을 제자로 돌려보내는 제차이다. 심방이 평복을 입고 연물 장단에 맞춰 모셔왔던 순서대로 신들을 돌려보낸다. 배방선을 위해서 일부 심방과 단골들이 바닷가에 가 있는 동안, 남아있는 심방이 진행한다.

제의 관련 조직과 결산

칠머리당 영등굿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두 핵심 축은 제주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와 건입동 잠수회이다. 제주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는 굿을 하는 심방과 악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칠머리당 영등굿이 1981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사실상 굿을 주관하는 대표 조직이다. 건입동 잠수회는 칠머리당 영등굿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또 다른 핵심 조직이다. 현재 총 12명으로 구성된 건입동 잠수회는 칠머리당 영등굿의 상단골이라 할 수 있다. 선주협회 또한 단골로 칠머리당 영등굿에 참여한다. 굿과 관련한 비용은 문화재청과 제주도에서 지원한다. 2023년 영등굿에는 약 2천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 관련 비용 대부분이 외부 지원을 받은 것이기에 사단법인 제주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 감사를 통한 자체 결산과 이에 대한 외부 점검이 이루어진다.

가득 제물을 실은 짚배를 바다에 띄워 보내려 가는 영감신 연희자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가득 제물을 실은 짚배를 바다에 띄워 보내려 가는 영감신 연희자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바다에 띄우려고 트럭에 실은 짚배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바다에 띄우려고 트럭에 실은 짚배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도진.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도진.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영등송별제의 의의 및 변화

제주도의 마을굿은 대체로 본향당굿이다. 마을 본향당신에게 마을 전체의 안녕과 집안의 평안을 비는 신년과세제 같은 당굿을 정초에 크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건입동에서는 좀 다르다. 건입동 칠머리당에서는 일 년에 두 번 굿을 하는데, 모두 영등신과 관련이 있다. 이월 초하루 영등환영제와 이월 초나흗날 영등송별제가 그것이다. 본향당신을 위한 정월의 신년과세제를 이월에 영등신을 위한 굿으로 갈음한다. 영등신에 대한 환영과 송별을 다 하는 건입동 칠머리당은 사실상 영등굿의 본산이 되었다. 이월에 제주도를 찾아오는 영등신을 위한 대표적인 굿으로 칠머리당 영등굿이 자리 잡았다.   

물론 칠머리당에서의 굿 전체가 영등신 중심인 것은 아니다. 본향듦 제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본향당신을 청하고 그 위엄 있는 모습을 강조하기도 한다. 영등굿과 본향당굿이 결합한 독특한 양상을 보이는 것이 칠머리당영등굿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굿이 어부와 해녀의 해상 안전과 어업의 풍요를 영등신에게 비는 제차로 짜여있다. 2006년 6월 ‘제주칠머리당굿’에서 ‘제주칠머리당영등굿’으로 공식 명칭을 변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칠머리당은 건입동의 본향당이다. 그런데 여기서 벌어지는 굿은 건입동 주민 모두를 염두에 두는 본향당굿이라 하기에는 조심스럽다. 주로 바닷일과 관련된 일을 하는 해녀와 선주들이 적극 참여한다. 본향당에서 벌어지는 유일한 굿이 본향당신 보다는 내방한 영등신을 위한 제의가 두드러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 강정식, 2015, 『제주굿 이해의 길잡이』, 민속원.
• 고유봉, 2006, 「제주항」, 『디지털제주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jeju.grandculture.net, 2023년 5월 29일 접속.
• 김미진, 2006, 「건입동의 지리사회환경」, 『디지털제주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jeju.grandculture.net, 2023년 5월 29일 접속.
• 문무병, 2006, 『바람의 축제 칠머리당 영등굿』, 황금알.
• 사단법인 제주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 2023,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영등송별제」(2023년 
공개행사 팸플릿), 사단법인 제주칠머리당영등 굿보존회.
• 진성기, 1991, 『제주도 무가본풀이사전』, 민속원.
• 황나영, 2011,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의 음악적 구성과 특징」, 한양대 석사논문, 한양대 
대학원 국악학과.
• 현용준, 1969, 「제주도의 영등굿 –북촌리의 영등굿을 중심으로」, 『한국민속학』 창간호, 
한 국민속학연구회.
• 현용준 외, 1974,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제주도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 현용준, 1980, 『제주도 무속자료사전』, 신구문화사.
• 현용준, 1986, 「제주 칠머리당굿」, 『제주도 무형문화재 보고서』, 제주도.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