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편지 (2)] 동물들에게는 예비의 계절인 가을
단풍나들이는 한번 하셨는지요.
아침 저녁으로 기온차가 심할수록 단풍이 곱다던데,
올해에는 유난히 단풍색이 곱습니다.
영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내리노라면
오백장군 벼랑을 불사르는 붉은 물결에
마음까지 타오르는 것만 같습니다.
낮에 포근하던 날씨가 밤이면 기온이 뚝 떨어집니다.
백록담 고스락엔 매일 아침 무서리꽃 피어나고
수은주는 물이 어는 0℃를 맴돌고 있습니다.
칼바람까지 불어대면 몸으로 느끼는 체감온도는
정말이지 한겨울 추위 못지않은 법이지요.
이렇게 한라산의 가을밤은 겨울연습이 한창입니다.
급기야 오늘 아침엔 선작지왓의 노루샘 물도 얼어붙고,
바람결에 뒤틀린 무서리들이 춤추듯 피었더군요.
가을 깊어갈수록 겨울이 가까워집니다.
사람들에겐 수확의 계절이지만
숲속의 동물들에게 가을은 예비의 계절입니다.
혹독한 겨울나기를 위해 다람쥐나 여치 같은 새들은
열심히 도토리를 둥지로 모아둬야 합니다.
겨울잠이 없는 한라산의 귀염둥이 노루들에게도 겨울은 시련의 계절입니다.
가을이 깊어지는 만큼 노루들은 제 몸의 털들을 두툼하게 합니다.
갈색이던 털 색깔이 이맘때가 되면 회갈색으로 짙어집니다.
보이지 않는 적으로부터 위장하고, 추위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죠.
오리털파카도 보일러도 없는 저들 나름의 생존전략입니다.
시간이란 관념의 세계를 초월한 동물들은 몸으로 계절의 변화를 예감하는 법입니다.
불어오는 바람의 언어를 해독하고 다가오는 시련을 예비합니다.
그런 예비 없이 맞닥드릴 겨울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몸 속 깊은 곳에 흐르는 유전자를 통하여 전이받는 모양입니다.
사람과 달리 동물들에게는 임신기간이 정해져 있답니다.
냉정한 자연의 법칙에 거스르지 않고 무사하게 종족번식을 하기 위해선 아무 때나 새끼를 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끼들이 추위를 걱정하지 않고 무사히 자랄 수 있으니까요.
출산한 어미도 파릇한 새싹으로 출산후유증을 앓지 않고 몸을 추수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봄을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라 하나 봅니다.
봄과 여름을 거치며 어느 정도 자라난 새끼들도 이맘때가 되면 생애의 첫 겨울을 맞이할테지요.
선작지왓에 사는 노루들은 이제 눈덮이는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대책회의로 분주한 날을 보내는 듯합니다. 먹이를 찾아 山아래마을로 갈 때 어느 길로 가야할 것인지, 어느 목장에 가야 먹이도 풍부하고, 자신들을 노리는 적을 피할 수 있는지, 어느 산록도로를 통과해야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을는지, 부지런히 논의들을 하고 있겠지요.
예비하지 않았던 추위는 한겨울보다 더 춥게 느껴지지 않던가요.
옷깃을 여미고 겨울을 예비하는 마음으로
山길을 걷습니다. 바람에 안개들이 묻어옵니다.
※ 오희삼 님은 한라산국립공원에서 10년째 청원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한라산지킴이입니다. 한라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좋은 글과 사진으로 담아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