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편지(3)] 첫눈을 기다리며....
안개 자욱 머금고 메마른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가을의 비는
왠지 별다르게 느껴집니다.
낙엽을 떨구며 겨울을 재촉하는 것 같기도 하고
숨가쁘게 달려온 이 가을을
한번쯤은 되돌아보라는
성찰의 메시지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누렇게 변색되어 이삭을 날리는
고개숙인 억새들처럼 말입니다.
햇살에 그을린 듯 붉게 타는 정금나무 잎새와
새까맣게 농익은 열매를 보니
이제 가을도 막바지를 향해 치닫는 것 같습니다.
이웃하여 자라는 산벚나무는
화려했던 잎새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앙상한 가지만이 11월 찬바람에 부르르 몸을 떨고 있네요.
스산한 바람 불어대는 山마을에
까마귀 울음소리 여운을 남기며 숲속으로 번집니다.
온갖 나무의 줄기들이 선명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신록 푸르던 시절엔 무성하던 나뭇잎들에 가려 뵈지 않던 것들이죠.
하늘을 향해 곧추선 층층나무 같이 잘 생긴 놈이 있는가 하면
이웃한 큰 나무의 등걸을 휘감는 다래 넝쿨도 눈에 들어옵니다.
꽃보다도 화려한 열매를 가지 그득 맺는 참빗살나무,
비수같은 가시 사이로 고운 열매를 매단 매발톱나무,
모두들 쓸쓸한 가을숲에 피어난 봄날의 함박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숲에는 나무의 종류도 많았습니다.
눈길을 돌릴 때마다 저마다 이름을 가진 녀석들이
‘내 이름이 뭔지 아세요?’하며 물어오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산길을 걷다가
잎새들을 모두 떠나보낸 숲 사이로
유난히 붉은 빛을 발하는 녀석을 만났습니다.
바로 ‘겨우살이’란 놈이지요.
이 녀석에게 ‘놈’이라고 부르는 데는 제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겨우살이는 참나무나 단풍나무 줄기에 빌붙어 사는
일종의 기생식물입니다.
스스로 광합성을 하여 양분도 생산하지요.
그런데 제가 만들어낸 양분으론 성에 안차는지
숙주식물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낙엽까지 떠나보내며
알뜰히 저축해놓은 양분을 야금야금 빼먹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한겨울에도 푸른 잎을 뽐낸답니다.
오죽 푸르렀으면 옛사람들이 동청(凍靑)이라 했을까요.
그런데 겨우살이의 열매엔 끈적한 점액질이 있어서
새들이 열매를 먹을 때 애를 먹는답니다.
열매를 삼킬 때 부리에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 바람에
새들은 부리를 나무줄기에 비벼댑니다.
이 때 열매속에 있던 씨앗이
숙주나무가 될 줄기에 둥지를 트는 것이죠.
참 영악하리만치 기발한 번식방법인 셈이지요.
지혜로운 것인지, 약삭빠른 것인지
숲속에서도 우리들이 알아챌 수 없는
허영심을 가진 놈들이 더러는 있나봅니다.
이런 저런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이 놈들이 있어 단풍잎 시들고
스산한 바람만이 가득한 늦가을의 숲이
그리 적적하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하나하나 떨어집니다.
겨울이 다가오는 신호음처럼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
낮게 내려앉은 하늘에
까마귀떼 까악까악 소리치며
솨악솨악 날아갑니다.
꼭 가고 싶었던 곳이었거나
꼭 읽고 싶었던 책이었거나
꼭 보고 싶었던 영화였거나
이 사람에게 만큼은 꼭 써야할 편지였거나
지나쳐 버리진 않았는지요.
가을은 더 이상
머뭇거림을 기다려줄 겨를이 없습니다.
첫눈을 그리며 오늘도 山길을 걷습니다.
※ 오희삼 님은 한라산국립공원에서 10년째 청원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한라산지킴이입니다. 한라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좋은 글과 사진으로 담아냅니다.
오희삼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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