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임관호지사②] 제주읍장실 폭탄테러...청사에는 인공기 걸려

박진경의 후임에는 최경록(崔慶祿) 중령(30세)이 임명됐다.
오리무중에 빠졌던 사건은한 하사관의 제보에 의해 사건전말이 밝혀져 또다시 사회를 놀라게 했다.

조사결과 제11연대 3중대장 문상길(文相吉) 중위가 손선호(孫善鎬) 하사 등 일부 하사관에게 박 대령의 암살을 지시하고 하사관들은 연대 위생병에게 지시하여 이뤄진 것으로 밝혀졌으며 암살으로 검거된 4명이 사형됐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발생한 뒤 서울에 있는 제주도민친목단체인 제우회(濟友會)는 6월21일 미군정청과 UN에 청원서를 제출하고 "제주도의 사태는 결코 소수분자의 정치적 충동에 의한 파괴적인 음모로 볼 수 없는 다른 중대한 원인이 있으며, 1947년 3월1일 기념행사 때에 경찰측의 경솔한 발포사건으로 야기된 총파업을 군정당국이 공정하고 건설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제주도의 정치적 환경을 민주적으로 해결하는 것만이 사태수습의 유력한 방법이며 현재와 같은 무력진압은 중단돼야 한다"는 의견을 내었다.

조병옥 경무부장, "소련연방화와 위성국화를 기도하는 공산당의 남조선파괴공작"

그러나 미군정청의 자세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일부에서 제주도의 사태원인을 호도시키고 있다고 공박했다.

특히 조병옥 경무부장은 6월22일 담화에서 "정부기관의 책임자나 정치·사회단체 또는 언론기관이 제주도의 사태원인을 행정과 사법기관의 편파적인 인사행정, 경찰의 비민주적인 과오로 돌리고 있는데 그것은 폭동의 간접 또는 보충적 원인에 불과하고 실제로서는 조선의 소련연방화와 위성국화를 기도하는 공산당의 남조선파괴공작에 있으며 수습의 근본방침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말하고 강경한 진압방침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임관호 지사는 거듭되는 사회혼란을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주민들과의 간담회를 수시로 가지며 의견을 청취하는 동시에 경찰 등 관계기관의 협조를 당부했다. 그런데다가 4.3사건으로 졸지에 가옥을 잃었거나 당국의 소개조치로 거주지를 잃은 이재민에 대한 대책도 당장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당시 임관호 지사가 밝힌 담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생지도를 위해서는 주민들의 참다운 소리를 존중해 사태를 조속히 수습하도록 하겠다. 또 이런 사태로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의 구제를 위해 이재민구원회를 조직하여 중앙정부의 국고보조를 받아 강력한 구호사업을 전개할 방침이며, 일부 청년단체의 탈선행위에 대해서는 경찰당국과 긴밀한 연락으로 철저히 단속하고 양민에게 자극을 주는 일체의 행동을 금지시켜 나가겠다."

임 지사는 이어 공무원들의 부정부패와 각급 학교의 수업결손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일반 행정관청은 물론 경찰내부에까지 잠복하고 있는 탐관오리의 숙청을 단행하여 일반 민심을 안정시키고 주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관도(官道)를 세움으로써 관민 일체를 촉진시켜 나가겠으며 아직 출석률이 40∼50%밖에 되지 않는 초·중학교에 대해서도 학부형의 협력을 얻어 조속히 회복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임 지사는 취임후에 가진 첫 기자회견을 두 달여만인 1948년 7월20일에야 가졌다.
이 자리에서도 임 지사는 민심을 읽은 듯 우익청년단체들의 탈선행위와 탐관오리에 대한 숙정작업을 단호히 실시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해 보였다.

그러나 행정력은 사태를 수습하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군대와 경찰이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데다가 이들과 직접 관계된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관여를 못해 도청의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서북청년단의 민폐행위는 주민들의 원성을 사는 일이 많았으나 좀체 시정되지 않았다.

2기 제헌의회개원...제주출신 오용국 헌법기초위원

이와는 달리 중앙정치는 숨가쁘게 변하고 있었다. 그해 5월31일에는 임기 2년의 제헌국회가 중앙청 회의실에서 개원됐다. 제헌국회는 개원과 함께 최고령자인 이승만(李承晩)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한 후 무기명 투표에 의해 이승만을 정식으로 의장으로 선출했다. 제헌국회는 6월1일 본회의 의결로서 제주출신 오용국을 포함한 헌법기초위원 30명을 선출하고 위원장에 서상일(徐相日)을 뽑고 전문위원 유진오(兪鎭午)가 미리 준비한 헌법기초안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제헌국회가 구상했던 의원내각제는 헌법기초위원회의 심의를 거의 종료되는 순간에 이승만의 반대로 대통령제로 수정 채택됐다.

제헌국회에서 제정된 헌법은 그해 7월17일 정식으로 공포됐다. 7월20일에는 실시된 초대 정·부 대통령선거(국회 간접선거)에서 재적의원 198명중 196명이 출석한 무기명 투표에서 이승만 180표, 김구 13표, 안재홍 2표, 무효 1표로서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부통령에는 이시영(李始榮)이 선출됐다.

나흘 뒤인 7월24일에는 중앙청 광장에서 정·부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됐으며 8월4일에는 이범석(李範奭) 국무총리를 포함한 초대 내각이 구성됐다.
1948년 8월15일 드디어 미군정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제주도에서는 정부수립 기념식에 임관호 도지사를 대신하여 이인구 사회과장이 참석했다.

임 지사는 제주도 자체적으로 가진 정부수립 기념식에서 치사를 통해 "이제 우리나라는 비록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됐지만 비로소 우리 정부를 가질 수 있게 됐다"고 말하고 "모든 도민과 공무원은 각자가 책임을 다해서 치안유지와 민생안정에 적극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때까지 제주도청과 사무실을 같이 사용하고 있던 미군정청은 옛 제주농업학교에 콘센트 가건물을 짓고 이전했다. 또한 행정에서도 사실상 손을 떼기 시작했다.

제주도는 정부수립과 때를 맞춰 민·관·군·경 합동의 제주도치안대책수습위원회를 구성하고 사회수습에 모든 기관이 최선을 다해나가기로 했다. 치안대책위원회에는 경찰에서 동득춘( 得春) 사찰과장, 군에서 작전참모 김명(金明) 대위, 도청에서 이인구 사회과장이 위원회의 사무국장으로 참여했고 사회단체에서는 김재능(金在能) 서북청년단장, 민간인으로서는 박우상, 박치순, 강지수 등이 참여했다.

치안대책수습위원회 발대식이 열린 제주극장에는 주민들과 공무원, 사회단체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그러나 모처럼 마련한 화해의 초석 자리임에도 대부분의 지역유지들은 불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참석을 하지 않으려 하다가 임관호 도지사를 비롯한 관계기관의 설득으로 식장에 참석하기도 했다.

치안대책수습위원회는 우선 군과 경찰이 민간인과 재산(在山) 무장대를 구분하지 않고 양민을 학살하는 행위를 금지시키고 폭동으로 부족한 물자를 정부에 긴급 요청하여 피해복구와 민생안정에 진력하기로 했다.

치안대책수습위원회는 이를 위해 먼저 경무대(景武臺) 등 관계기관에 "제주도민들이 본의 아니게 4.3사건 폭동으로 피해를 보고 있으며,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고 농사를 짓지 못하는 바람에 모든 농민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어서 지원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를 놓고 위원들 중에는 탄원서만 올릴 것이 아니라 직접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현지실정을 소상히 알려 도움을 청해야 옳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상경하는 데에는 비용이 문제였다. 여러 가지 방법이 제시된 끝에 일본에서 수입되는 물품에 징수되는 통관수수료를 경비로 쓰기로 했다. 당시 외국에서 들어오는 수입물품이 통관되기 위해서는 도지사의 승인증명이 필요했다.

건축기술자에 의한 제주읍장실 백주대낮 폭탄 테러

한편 1947년 10월 투서에 의해 제주경찰서장을 사임해야 했던 김차봉(金次鳳)이 제주읍장으로 기용된 것은 1948년 8월23일이었다.
임 지사에 이어 김 읍장의 임명은 아무런 기준없이 외부 투서만을 가지고 기관장을 해임시켰던 인사행정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 읍장의 관운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읍(邑) 행정이 채 자리도 잡기 전인 9월초순 2층에 자리하고 있는 읍장실이 알 수 없는 폭발물의 투척에 의해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나고 집기들이 파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백주 대낮에, 그것도 읍장실에 자행된 폭탄 테러로 모든 공무원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김 읍장은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외출중이어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경찰은 범인색출에 나섰지만 뚜렷한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로부터 며칠 후에 일어났다. 제주읍 청사의 국기 게양대에 대한민국의 국기 대신에 북한의 인공기(人共旗)가 결려 있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인공기가 며칠째 걸려 있었는데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주민의 신고에 의해 발견해낸 것이었다.

임관호 지사는 이 같은 사실을 보고 받고 김 읍장을 불러 누구의 소행인지를 철저히 밝히라는 엄명을 내렸다. 관기(官紀)는 무너질 대로 무너져 내렸고, 경찰은 경찰대로 허를 찔린 꼴이 되고 말았다.

김 읍장은 폭탄투척과 인공기 게양은 청사출입이 자유로운 내부직원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인공기가 내 걸렸던 날을 전후한 숙직자들을 대상으로 혐의자를 조사했다. 그중 건축기술자인 朴某 직원의 하숙집을 수색한 결과 인공기를 그린 것으로 보이는 붉은 잉크 등이 발견돼 계엄사령부에 체포됐다.

<김종배의 도백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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