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과 평화가 승리하는 사회를....

영겁의 시간 속에 또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 묵은 달력을 걷어내고 새 달력을 걸 때는 언제나 기도하는 심정이다. 부디 새 달력 속의 하루 하루가 의미 있는 날들로 채워지기를 바라며 조용히 지난 계미년 한해를 되돌아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나라 경제는 청년실업자와 신용불량자를 양산했고, 빚에 쪼들린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는 끔찍한 '엽기' 시리즈, 시험 성적을 비관한 어린아이들의 자살 등은 우리 사회를 온통 어두운 잿빛으로 채색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아이들의 죽음은 철옹성 같은 학벌사회의 구조 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희망을 주지 못하는 어른들에게 던지는 처절한 항변이다.

미친 듯 치솟는 집 값과 '차떼기' 대선자금 비리는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민초들에게 한없는 좌절과 울분을 안겨주었다. 단 한번의 배팅과 단 한 통의 전화로 수 천만 원에서 수 백억 원의 돈을 집어삼키는 희대의 투기노름과 권력노름 앞에 힘 없고 돈 없는 보통 사람들은 그저 할말을 잊는다.

화물연대 파업에서 부안 핵폐기장 건설 반대투쟁, 노동자, 농민들의 시위 등 크고 작은 여러 이해집단들의 저항에 정부는 무원칙, 무소신, 무대책으로 오락가락하며 사태를 미봉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대화와 타협으로 이해당사자들의 이해를 구하고 설득하는 성숙함은 보기 어려웠다. 정부는 밀리면 안 된다는 강경 방침으로 기싸움을 하는 듯한 인상도 보였다.

대구 지하철 참사와 태풍 매미호의 막심한 피해에서 우리는 재난을 미연에 방지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국가 방재 시스템에 심각한 구멍이 뚫려 있음을 보았다.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전답과 삶의 터전을 빼앗겨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국가는 무엇으로 달래고 보상할 것인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온전히 지켜야 하는 일차적인 소임과 기본을 등한시한 국가의 책임은 어찌할 것인가.

당당한 자세로 할 말은 하겠다던 대미외교는 미국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끌려 다니며 굴종을 보이더니 끝내는 그들의 압력에 못 이겨 추악한 침략전쟁에 3천 명의 군대를 파병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전쟁광에 대항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분노의 총구가 우리 형제들의 가슴에 겨누어지고 있다.

남북 고위급 인사들, 체육·예술인들, 또 관광객들이 서울과 평양, 금강산과 제주도를 왕래하고 있는 이 개명한 탈냉전 시대에, 케케묵은 냉전의 유물인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서슬 퍼렇게 살아 국민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시험하고 있다. 군사독재 시절 해외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며 37년 간을 '경계인'으로 떠돌다 조국 땅을 밟은 초로의 한 철학자는 아직도 채 한 평이 안 되는 싸늘한 감방에 갇혀있다. 이 반시대적, 반문명적인 야만을 무슨 논리로 설명할 것인지 황당하고 난감할 따름이다.

이렇게 우왕좌왕하다 보니 한해가 저문 것 같다. 최근에 배달된 교수신문엔 '사자성어로 풀어본 2003년 한국사회'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2003년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를 정리할 수 있는 사자성어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우왕좌왕(右往左往)'을 꼽았다. 그 뒤를 이은 사자성어로는 점입가경(漸入佳境), 이전투구(泥田鬪狗), 지리멸렬(支離滅裂) 등이 눈에 띈다. 모두 지난 한해 우리 사회를 얼룩지게 했던 우울한 초상들이다.

'우왕좌왕'은 글자 그대로 한 사람이나 집단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뚜렷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행태를 지칭한 말이다. 한 마디로 무정견, 무소신, 무철학의 소산이다.
철학이 없음은 스스로 삶을 이끌어나갈 큰 갈래. 즉 중심이 없다는 말이요, 삶에 중심이 없으므로 가야 할 방향을 못 찾고, 갈피를 못 잡는다는 말이다. 뿌리가 얕은 나무가 바람에 쉬이 흔들리는 이치와 같다. 철학이 없으므로 정견(定見)을 갖고 소신대로 자신의 길을 가기 어려운 것이다. 귀가 얕아 남의 말에 쉽게 미혹되며,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자유와 평화, 평등 등 인류 보편의 가치와 대의는 설 땅이 없어지고, 약삭빠른 술수와 편법이 판을 치게 된다.

국민의 여망과 기대 속에 출범했던 '노무현호'의 1년은 방향타를 잃고 표류하고 있다. 국민경선 드라마와 선거 과정에서 굳어진 '노무현표'에서 개혁과 진보의 참신성을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은 개혁과 보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모습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물론 여기엔 거대 보수 언론들의 흔들기와 수적 우위를 악용한 야당의 횡포도 한 몫을 했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철학의 바탕 없이 이뤄진 '코드 맞추기식' 정치의 한계에 있다고 본다. 파행의 정치가 하루빨리 올곧은 갈래를 찾아 튼튼한 반석 위에 놓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갑신년 올해엔 부디 폭력과 야만 앞에 이성과 양심이 승리하는 사회, 상쟁과 분열 앞에 평화와 상생이 승리하는 크고 넉넉한 사회, 청년실업도, 노숙자도 없는 사회, 아무도 생활고를 비관해, 성적을 비관해 존귀한 생명을 버리는 일이 없는 밝고 건강한 사회가 도래하기를, 국민에게 믿음과 희망을 주는 정치가 개화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김현돈의 살며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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