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편지(5)] 돌매화

   

바람이 불어옵니다.
바람 앞장 세우고 겨울이 오는 소리 세차게 달려옵니다.
깊은 밤 지새우며 山이 울어예었는지,
지나던 바람이 흘리고간 회한(悔恨)처럼
세상이 온통 은빛 물결입니다.
나뭇가지며 잎새마다 바위마다 서리꽃 하얗게 하얗게 피었습니다.
山이 흘린 눈물처럼 푸른 산에 돋아난 새하얀 꽃들이
왜이리도 눈이 부시는지요.

   

한갓진 선작지왓 초원에 저녁 어스름이 내리깔리고
화구벽 너머로 허연 보름달이 섬처럼 홀연히 떠올랐습니다.
몸서리치도록 그립던 연인을 만난 듯하여
차마 울지는못하고 이슬을 안주삼아 차디찬 소주 한잔 기울였습니다.
한잔 소주에 칼바람 훑고간 빈 가슴으로 뜨거움 한덩이 밀려듭니다 그려.
허허로운 마음 한번 달래려
옷깃을 여미고 11월 쓸쓸한 바람이 춤을 추는 벌판을 걸었습니다.

   

겨울에도 푸르른 구상나무 잎새들이 오늘은
서릿발로 꽁꽁 얼어붙은채 맨살의 바람에 입맞추고
윗세오름 산장 너머 화구벽으로 바람이 山안개를 몰아갑니다.
세모시 치맛자락 같은 안개들이 화구벽을 감싸듯이 껴안습니다.
그 바위의 정수리에서
화구벽 검은 바위 그늘에 지난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꽃한송이 떠올립니다.

   

돌매화. 이 세상에서 가장 키작은 나무.
다 자란 키가 고작 2cm에 불과한 한라산정의 꽃.
사나운 회오리바람 휘몰아치는 검은 바위 벼랑에 샛별처럼 영롱하던 열정의 꽃.
그 이름 앞에 서면 가슴속 깊은 곳에 새겨둔 멍울이 꽃으로 피어납니다.
형벌(刑罰)같은 바위벽에 오랜 세월 바람결에 실려온 한줌 흙에 제 몸 기대고
바위의 이슬 마시며 순백(純白)의 꽃잎을 피우는 순수의 영혼.
어쩌면 부평초 같은 바람을 사랑하여 쌓인 정한(情恨)이 토해낸 눈물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세상 아닌 곳에서 태어나 이 한 세상 떠돌다가
다시 세상 아닌 곳으로 홀연히 소멸해버린
저 자유의 바람을 사랑한 죄로 이 형벌의 땅에 영원히 유배된
고독한 영혼은 아니온지요.

   

해마다 6월이 오면 山의 부르심에 최면에 걸린 듯 돌매화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서북벽을 오르는 한 시인(詩人)의 노래가 바람결에 실려옵니다.

바람의 손금같은 선율로
너는 핀다.

내 마음의 산정에
그 차가운 벼랑에

칼바람 에이는 바위가슴에
피맺힌 발부리 가누어
결곱게 피어나는
작은 꽃이여
야성의 혼이여

꺾이어 쓰러질 때마다
아픈 눈물 먼 훗날로 미루고
부르라
사랑하는 별의 이름을

김순이(金順伊)의 ‘한라산정의 꽃을 위하여 -岩梅’전문

   
그랬습니다. 돌매화는 울지 않았을 것입니다.
뜨거웠던 여름의 열정 속울음으로 접고 푸르던 잎 붉게 붉게 피로 물들였을 겁니다.
단풍으로도 차마 떨구지 못하고 사랑하는 별의 이름을 불렀을 것입니다.
그 별에게 다가서는 마음으로 바위에 엎드리며 맨살의 칼바람 껴안았을 겁니다.

고고(孤高)한 돌매화 한번 품어보려고 날마다 山안개 화구벽으로 파도처럼 밀려드는지 모를 일입니다.

세상과의 타협마저 거부하고 산정 높은 곳에서
저 혼자 고독을 삼키며 바위를 떠나선 살 수 없는 한 목숨.
겨울이 채 오시기도 전에
돌매화 피는 여름을 떠올림은 무슨 욕심이련지
바람에도 끄덕없는 피맺힌 꽃잎에 술 한잔 올립니다.

   

※ 오희삼 님은 한라산국립공원에서 10년째 청원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한라산지킴이입니다. 한라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좋은 글과 사진으로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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