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자연유산을 가다(3)] 하와이 화산 국립공원(하)

하와이 화산국립공원과의 자매결연을 제주자연유산과 제주관광의 홍보기회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와이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필요할 듯싶다.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세계자연유산만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제주의 여타 자연환경과 민속문화에도 관심을 가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제주’가 있다면, 일본에 ‘오끼나와’가 중국에는 ‘하이난(해남성)’이 있다. 그리고 미국에는? 당연히 ‘하와이’가 비교 대상이 된다. 이 네 지역의 공통점은 해당 국가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섬이며, 그 나라를 대표하는 관광지라는 점이다(이 외에도 여러 가지 유사점이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요즘은 그 빈도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으나 7~80년대 제주를 홍보할 때 자주 등장했던 문구가 있으니 바로 ‘동양의 하와이’다. 하와이만큼 제주도 아름답다는 표현일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제주가 벤치마킹해야 할 이른 바 ‘선진 관광지’라는 부러움이 감추어져 있었다고 본다. 심지어 ‘지상최후의 낙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칭호까지 붙여져 있던 섬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세월이 지나 ‘동양의 하와이’라는 슬로건은 이제 별로 찾아보기 힘들지만, 아직도 많은 국민들과 도민들의 의식 속에는 여전히 하와이가 가보고 싶은 해외관광지 중 하나로 자리매김해 있다.

하와이는 화산 폭발로 인해 생겨난 화산섬으로, 섬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화산 덩어리다. 제주 또한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섬이다. 하와이 해안을 돌다보면 낯익은 검정색 현무암을 볼 수 있다. 이 또한 하와이와 제주의 유사점 중 하나다.

▲ 오아후섬을 돌다 보이는 바닷가의 현무암. 제주 바다와 똑같다. ⓒ 제주의소리
▲ 오아후섬을 돌다 보이는 바닷가의 현무암 ⓒ 제주의소리

하와이의 주도 호놀룰루시의 대표적인 관광타운인 ‘와이키키’ 해변. 이 와이키키 지명 중 ‘와이’라는 말이 용천수를 뜻하는 것이라 한다. 하와이 또한 제주처럼 해안 용천수를 중심으로 취락이 분포돼 있다는 말이리라.

▲ 와이키키해변 ⓒ 제주의소리

하와이=신들의 고향=제주도

또한 놀라운 것은, 하와이(Hawaii)라는 단어가 하와이어로는 ‘작은 고향’이라는 뜻이지만 폴리네시아어로는 ‘신이 있는 장소’ 라는 뜻이라는 사실이다. 이 얘기를 처음 들으며, 제주의 다른 별칭인 ‘신들의 고향’이 자연스럽게 떠올려진다. “작은 고향 + 신이 있는 장소 = 신들의 고향”이라고 해도 무난하지 않겠는가. 그래서인지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주목할 것은 하와이의 또 다른 별칭이 ‘알로하 스테이트(Aloha State)’라는 것이다. 하와이 관광청 웹사이트에는 이와 관련한 설명이 아래와 같이 쓰여 있다.

전 세계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알로하 정신’은 하와이인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하와이인들은 알로하 정신이 시키는 대로 따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하와이인들은 항상 외지 사람들에게 관대해야 하며, 부드럽고 환한 미소를 지어야 하며, 하와이의 아름다움을 함께 나눌 마음의 여유를 지녀야 한다. 만약 거리에서 혹은 식당에서 비록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알로하!’ 하고 인사하게 된다면, 이미 당신은 알로하 정신을 배웠다는 증거이다. 하와이를 관광하고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더 중요한 것은 알로하 정신을 배워가는 것 이다.

이렇게 하와이는 ‘알로하 정신’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아직도 완벽히 정립되지 못했지만 그 동안 제주정신의 하나로 일컬어져 온 ‘삼무정신’ 속에도 이러한 하와이의 알로하 정신 또한 녹아 있다고 본다. ‘도둑, 대문, 거지가 없다’는 삼무정신이야 말로 ‘평화의 정신’이요, 차별과 장벽이 없는 ‘평등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 속에 ‘환대 정신’은 당연히 녹아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아름다운 전통이 역사시대를 거치며 중앙 정부와 외부 세력의 침탈 속에, 최근에는 천민자본주의 침투 속에 왜곡되고 뒤틀려 온 게 아닌가는 생각이다.

   

최근 들어 제주가 불친절하고 환대할 줄 모른다는 비판에 자주 직면하는 경우가 많지만 “제주인의 심성은 따뜻하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필자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할 줄 모르는 것은 큰 문제다. 노예적 서비스를 강요받기 전에 우리 스스로 우리 내면에 깊숙이 내재해 있는 환대정신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하와이 알로아 정신처럼 “제주인들은 항상 외지 사람들에게 관대해야 하며, 부드럽고 환한 미소를 지어야 하며, 제주의 아름다움을 함께 나눌 마음의 여유를 지녀야 한다.” 이 환대가 단순히 굴욕적인 환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하와이를 관광하고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더 중요한 것은 알로하 정신을 배워가는 것”이라는 말 속에 스며있다. 하와이인들의 자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올해 초 ‘지구촌 제주인’의 하나로 인터뷰했던 하버드대의 오상석 교수도 하와이에서 보낸 5년 반의 유학 시절 기간 하와이의 ‘따뜻한 사람 인심’ 때문에 행복했었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세상 어느 곳을 가 봐도, 이곳만큼 후한 사람 인심을 접해 본 적이 없다”고 까지 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사람들이 아름답지 못하면 안 온다는 관광의 대원칙을 다시금 떠 올린다. 

하와이 원주민들의 비극적 역사

어느 지역을 여행하더라도 그곳의 역사를 모르고 방문한다면 결코 그 곳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뛰어난 경관과 웅장한 건축물에 감탄 할 수 있지만 그 곳에 스며들어 있는 역사를 보지 못한다면 반쪽짜리 관광만 한 셈이 된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기나긴 태평양 전쟁의 시발점이 된 세계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던 하와이. 하와이 왕국의 역사는 어떨까?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북서항로를 찾다가 1778년 처음 발견한 하와이 제도는 1850년대까지 ‘샌드위치 제도’라고 불렸다. 쿡 선장의 원정을 후원한 영국 해군성의 샌드위치백작의 이름을 따서 이렇게 이름 붙였는데 이것이 하와이가 세계에 알려진 시초였다.

영국 선원들이 이 땅을 밟으면서 ‘이른바’ 미개한 섬의 원주민들에게 새로운 문명을 소개했을 터이다. 기록에 따르면 멜론, 호박, 양파와 같은 야채들도 이 시기에 섬에 소개되었단다. 동시에 불행하게도 무서운 전염병도 함께 전해져 하와이인들을 파괴시켜 갔다. 일설에 따르면, 쿡 선장이 발견할 당시 하와이 제도는 인구가 30만 명 정도였는데, 80년 후에는 6만으로 줄었다 할 정도다.

   

쿡 선장이 하와이 제도를 발견했을 당시는 각 섬을 중심으로 서로 패권을 다투는 군웅할거(群雄割據)가 계속되던 시기였다. 이즈음 하와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시킨 카메하메하 대왕(Kamehameha the Great)이 등장한다. 카메하메하 대왕은 서양의 진보된 과학을 재빨리 흡수해 하와이 왕국의 발전을 도모한다(1795년 하와이 왕국 잠정 통일, 1810년 완전 통일). 카메하메하 3세 때까지 하와이의 최대 수입원은 포경업(捕鯨業)이었다. 포경업은 고래의 부족과 석유의 등장으로 쇠퇴기에 들어갔으나 다행히 본토는 골드러시(Gold Rush) 시대로 접어들어 서부(LA 및 샌프란시스코) 해안에 인구가 급증하면서 하와이가 설탕 공급지로 주목받게 된다. 그 결과 사탕수수 농장이 급성장하면서 노동력 부족 현상을 초래 했다. 이에 백인 농장주들은 노동자를 해외로부터 수급하게 되고 그 첫 번째로 중국(1852), 이어서 일본(1868)으로부터 계약 노동자들의 이민을 받아들였다. (하와이 관광청 웹사이트 자료)

▲ 호놀롤루시 중심가에 있는 카메하메하 대왕(Kamehameha the Great) 상 ⓒ 제주의소리

설탕생산은 하와이 원주민들의 문화와 하와이섬의 토양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회사가 일본인, 중국인, 필리핀인 노동자를 수입하면서 하와이 원주민들은 사탕수수 농장과 설탕공장에서 조차 일자리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마이클 예이츠, “Cheap Motels and a Hot Plate" )

하와이의 정치적 균열은 하와이를 문명의 세계로 이끌었다는 선교사(독일계 미국인 루터교 선교사)의 후예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하와이왕조가 방매하는 토지를 사들여 거의 모든 땅을 소유하기 시작하였으며 주요 농산물인 사탕수수를 제일 많이 소비하는 국가인 미국과의 결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상게 자료)

백인들이 하와이 섬을 개발하고 하와이 원주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전유하기 시작했을 때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키고 제국주의 열강의 이념을 지원하기 위해 하와이 섬을 누비고 다녔다. 하와이에 진출한 백인기업가들은 설탕 산업에 뛰어들어 사탕수수 농장을 지배하며 넓은 토지와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지배하게 된다.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여왕이었던 릴리우오칼라니(Liliuokalani 재위 1891~1895)는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왕(前王)이 서명한 진주만(眞珠灣)을 미국에 양도한다는 1887년의 갱신상호호혜조약에 반대했다. 이 때문에 외국인 기업가들이 연합하여 그녀를 폐위시키려 하였으며, 1893년 1월 샌퍼드 돌(Sanford Ballard Dole)이 이끄는 선교당의 요구에 의해 퇴위하게 된다. 왕당파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고, 여왕은 투옥된 지지자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공식퇴위서에 서명(1895)한다. (마이클 예이츠, 상게서) 참으로 안타까운 스토리가 아닌가.

친미 백인세력의 지배하에 있던 하와이는 1898년 스페인 미국전쟁의 발발로 그 군사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같은 해 8월 21일 합병안이 미의회를 통과했으며 그 후 1900년에 정식 영토가 된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하와이가 더욱 유명해지고 관광의 중심지로 급속히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런 가운데 드디어 1959년 8월 미국의 50번째 주로 흡수되었다. (상게 자료)

한인 이주민의 역사

이상이 하와이 원주민들의 비극적인 역사다. 비록 제주 4·3과 같이 일정 기간 내의 대규모 피의 학살은 없었지만, 쿡 선장 부대의 잔학한 원주민 학살 역사도 간간이 전해오는 등 평화롭던 이 섬이 어떻게 주인이 바뀌어 가는 지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다. 다음은 하와이 한인이주민의 역사를 살펴 볼 차례다.

최초 모집된 한인 이민단은 통역관 2명을 포함하여 총 121명이었다. 대부분 인천 ‘내리교회’ 신도들이었던 이들은 1902년 12월 22일 개릭(Gaelic) 호를 타고 ‘신천지’를 향해 인천항을 떠난다. 일본 고베 항(神戶港)을 경유하면서 이곳에서 실시된 종합 신체검사로 20명이 탈락하고 101명만이 고베 항을 출발,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으나 다시 추가로 15명이 탈락하여 최종적으로 86명만이 상륙 허가를 받았다. 이들이 최초의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이다. 이후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약 950명 정도의 ‘사진 신부’가 하와이로 건너온다. 기록에 의하면 1910년에 시작된 사진결혼으로 1924년까지 하와이에 951명, 미국 본토에 115명의 한인 사진 신부가 입국했다. 힘들고 고단하고 모든 일이 순탄치 않았을 사탕수수 노동 이민자들이지만, 우리의 이민 선조들은 조국을 위해 쌈짓돈을 모아 해방 전까지 고국에 무려 300만 달러가 넘는 거금을 보냈다고 하니 그 애국심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상게 자료)

오하우섬 최북단에 있는 ‘카후크 마을’은 사탕수수 초기경작지로서 한인들의 첫 이민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정작 사탕수수는 별로 보이지 않고 지금은 사탕수수밭 대신 골프장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하와이에서는 유일한 36홀짜리 터널베이 리조트다. 이곳은 원래 사탕수수 1차가공소인 증포소가 있던 곳이다. 아직 마우이섬이나 빅아일랜드에는 남아 있으나 70년대 중반을 거치며 오하우섬에서 사탕수수는 거의 사라졌단다.
 
1914년 하와이에서 군사력을 키우며 일제로부터 무력 독립을 계획하던 박용만은, 미국 유학 후 LA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한다. 그러나 이후 이승만은 주도권 싸움으로 국민회(國民會)를 분열시키고 따로 자파세력을 규합, 동지회(同志會)를 결성함으로써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박용만 등과 대립하였다. 한편 동지회는 1953년 한인 기독학원을 폐교하고 그 건물을 매각하여 남은 돈 18만 달러를 하와이와 인연이 깊은 인천에 기증, 인천과 하와이의 첫 자를 각각 따서 만든 ‘인하대학교’ 설립의 초석이 되었다. (상게 자료)

하와이에 가서 박용만 장군이라는 생소한 독립운동가를 알게 됐고, 이승만의 이곳에서의 추잡한 행적도 알게 됐다. 이러한 활동을 등에 업고 임시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 그는 이 후 사사오입 개헌 등으로 독재를 이어가려 했으나 4·19 혁명을 통해 무산되고 결국 다시 하와이로 망명, 1965년 7월 사망한다. 하와이 독립운동을 분열시켰던 그가 다시 망명길에 올라 삶을 마감한 곳이 바로 하와이라는 것. 이 모습을 지켜본 하와이 독립운동가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한인들의 하와이 노동이민 역사는 ‘사탕수수’에서 ‘파인애플’로, 1930년도에는 마우이의 ‘생강농장’ 이민을 거쳐 ‘난 농장’, 가깝게는 인천 어부들의 ‘참치잡이’ 이민 등으로 이어진다. 90년대 이후 노동이민은 거의 사라지고 요즘에는 돈을 들고 오는 이민이 많아졌다고. 현재 5만명 정도의 한인이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 4세까지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한인들은 하와이 각계로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 하와이 주정부 대법원장도 한인계 인 로날드 문(문대양)씨이며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빅 아일랜드 해리 킴 시장도 한인계다. 그들이 이만큼 자리 잡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고 땀 흘렸을지 상상하기 조차 어렵다. 하와이 빅아일랜드 섬에 있는 공동묘지를 찾았을 때 한국인 섹션에 있는 한 비석에 새겨 있는 ‘아부지’라는 글자가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 빅아일랜드에 있는 공동묘지. 한국인섹션과 한국이민조상기념비 ⓒ 제주의소리
▲ 빅아일랜드에 있는 공동묘지. 한국인섹션 ⓒ 제주의소리
▲ 1956년도에 돌아가신 ‘아부지’를 추도하는 비석 ⓒ 제주의소리

WHO ‘안전도시’ 공인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다시 돌아와 질문을 던진다. 하와이는 ‘지상최후의 낙원’인가?

“수박겉핥기식 탐방의 한계”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필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경관가치로만 보아도 제주만 훨씬 못하다. 하와이에는 일출봉이나 지삿개 같은 빼어난 경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와이 경관의 트레이드마크인 에머랄드빛 해변을 배경으로 한 하얀 백사장도 그렇다. 하와이는 인공으로 모래를 뿌려 넣은 백사장이 대부분이란다. 그래서 연간 모래 수입 소비량이 엄청나다. 이 모래가 호주산이라고 소문나 있지만 주로 인근 태평양 섬에서 공급한다고. 물론 제주의 해수욕장도 개장시기만 되면 일부 지역에서는 모래를 사다가 뿌리는 경우도 있지만, 제주 해안을 둘러싸고 촘촘히 분포하고 있는 해수욕장들의 모래들은 자연 산이 아니던가.

미국 내 다른 관광지에 비해서는 치안이 비교적 좋은 편이지만 그것도 호텔이 몰려 있는 와이키키 인근에 한정된 얘기인 듯하다. 와이키키 지역은 해만 지면 중심 도로에 순찰차량이 세워져 있으며, 사복경관이 관광객이나 홈리스처럼 위장하여 순찰을 돌고 있다고. 와이키키 시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한 하와이 여행안내 책자에는 이러한 글이 쓰여져 있다.

편리하고 저렴한 시티버스(The Bus) : 주요노선은 아침 5시부터 밤12시 정도까지 운행되고 있다. 낮에는 안전하지만 밤늦게 혼자 타는 것은 피하는 것이 상책...

선셋비치(Sunset Beach) : 트리플 크라운을 시작으로 국제적인 서핑대회가 열리는 세계유수의 서핑장소... 하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해가 지기 전에 와이키키로 돌아오는 게 좋다.

그러고 보면 제주만큼 관광객들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곳도 별로 없다. 제주가 세계자연유산이라는 홍보도 좋지만,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안전도시’로 공인받았다는 점도 적극적으로 홍보한다면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물론 ‘치안’과는 좀 차이가 있는 개념이긴 하지만). 이 또한 세계자연유산 지정과 비슷한 시기에 공인받았으나,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해외여행을 다녀보면 ‘안전’이 얼마나 중요한 관광상품인지 실감하게 된다.

   

“하와이에서는 가난하면 죽어도 서있어야 한다”

‘지상 최후의 낙원’임을 동의하는 이들도 있음직하다. 바로 홈리스라고 불리어지는 ‘노숙자’ 들이 그들이다. 하와이는 홈리스들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전 미국 홈리스들의 소원이 바로 하와이에 오는 것이라 할 정도다. 1년 내내 평균 기온 24도 정도의 따스한 날씨에다 어디든 나가서 쓰레기통을 뒤지면 수십개 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으니 그럼직도 하다. 낮에는 잘 보이지 않으나 밤만 되면 공원 이곳저곳에서 잠을 청하는 홈리스들을 볼 수 있다.

홈리스 얘기가 나온 김에 ‘슬프면서도 기묘한’ 얘기 하나 덧붙인다. “하와이에서는 가난하면 죽어도 서있어야 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게 무슨 말? 미국은 매장문화가 일반적이다. 전통적인 장례방식이다. 그런데 이곳도 땅이 좁은 만큼 부지가 비싸다. 그래서 홈리스가 사망하면 관을 세워서 매장한다는 것. 우리나라 같으면 화장장으로 직행인데 여기서는 절대 그러지 않는단다. 그 이유가 무얼까?

첫째는 인권보호, 둘째는 환경보호를 위해서란다. 관련 인권단체과 환경단체의 반대를 의식해서 그렇고. 또 하나의 이유는 함부로 화장했다가 만일 연고자가 나중에 나타날 경우 법정 소송 등으로 문제가 심각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와이 야자나무에는 야자가 없다”는  이유도 그렇다.

하와이에는 야자와 관련한 유명한 소송과 판결이 있다. 한 관광객이 야자나무에서 떨어진 야자열매에 의해 머리를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법적 소송이 붙어 결국 주정부가 패소했고 몇 백만 달러를 물어주어야 했다는 것. 이후 주정부는 미리 야자나무에 열매가 맺기 전에 쳐내고 불임 시술까지 하기도 하며 전담 공무원까지 두고 있단다. 물론 하와이의 모든 야자나무는 아니며 주로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밀집 공공장소에 한해 그렇단다.

하와이에는 도축장이 없다!  

화산 국립공원이 있는 빅 아앨랜드 북부 지역 마우나케아산 기슭에는 엄청난 규모의 목장이 있다. 파커목장(Parker Ranch)이 그것인데 총 면적이 2억 7500만평, 약 250마리의 말과 3만∼3만5000마리의 소들이 방목되고 있다 한다. 하와이 쇠고기의 약 3분의 1이 이 목장에서 생산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규모에서 놀라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렇게 많은 소를 방목하면서도 하와이에는 ‘도축장’이 단 한군데도 없다는 사실이다. 매년 하와이는 약 4만 2천여마리의 소를 배에 태워 도축 전 비육을 위해 3500㎞ 떨어진 캘리포니아로 보낸다고 한다. 거기서 도축된 소고기가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 소비된다는 것.

이러한 물류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도축장 시설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를 안내한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환경오염 우려 때문이란다. 이게 사실이라면 유사한 지질구조를 갖고 있는 화산섬에 살고 있는 제주도로서는 참으로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외에도 하와이에서 벤치마킹해야 할 일이 또 하나 있다. 오아후 섬을 안내하던 가이드가 카일루아비치를 지날 무렵 하와이의 ‘물’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이곳에는 자연물탱크가 10여개 있으며... 이곳에서 마시는 물은 20여년 전 함양된 물”이라는 등 해박한 지식을 선보인다. 궁금해서 물어 보았더니 하와이의 관광가이드들은 가이드자격증을 따려면 하와이주 수도국에서 2주간 교육 수료를 받아야 한다고.

제주관광 가이드들에게도 이러한 프로그램을 도입하면 어떨까. 1년에 600만에 가까운 관광객들이 오는 데 이들을 안내하면서 5분만 시간을 낸다면 제주 물의 소중함과 가치를 전국적으로 더 나아가 국제적으로 인식시키는데 탁월한 홍보효과를 볼 터이니 하는 말이다. 자고로 입소문만큼 좋은 게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이 외에도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 많지만 생략한다. 이 글의 주제가 하와이 관광과 경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하와이 보다 제주가 자원 가치는 더 크게 보인다는 점. 그렇다면 해법은 “구슬도 제대로 꿰어야 보배”라는 것을 자각하고 새로운 실천에 옮기는 것이 아닐까? <제주의소리>

<이지훈 편집위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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