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도 지도 (C)장용창

1. 결7호 작전

동굴 속에 숨겨 놓은 전쟁 무기라. 점심시간 학교 도서관에서 오래된 역사 책을 뒤져보던 창완은 가슴이 뛰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느 교수가 썼다는 이 책에 따르면 1945년 일본이 2차 대전에 패망하기 직전에 일본이 “결7호 작전”을 펼쳐, 제주도를 전초기지로 삼았으며, 제주도 곳곳에 인공 동굴을 파서 무기들을 숨겨 놓았다는 것이다. 창완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무기만 숨겨 놓았겠는가?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통치한 걸 보면 무서울 만큼 철저했다. 그렇다면 무기뿐만 아니라 전쟁 자금도 숨겨 놓지 않았겠는가? 만일 급작스런 패망 소식에 황급히 후퇴했다면 전쟁 자금으로 쓰려고 숨겨 놓은 금괴 등을 동굴 속에 숨겨 놓았을지도 모른다.

“긴급소집방과후도서관작전회의.” 창완은 황당트리오의 멤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중학교2학년인 강창완 에게는 친한 친구 둘이 있었으니, 남들은 이 셋을 황당트리오라 불렀다. 공부는 대충 하는 년놈들이 생각하는 것은 늘 엉뚱한데, 어쩌면 그리도 셋이 궁합이 잘 맞는지 황당한 일들을 잘도 벌였던 것이다.

“야, 아무리 읽어봐도 금괴 얘기는 없잖아.” 황당트리오 중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지남준 이 방과 후 소집된 작전회의에서 말했다. “심방은 어떻게 생각해?” 창완의 질문에도 김만덕은 아직 말이 없었다. 할머니가 작은 무당이었던 만덕은 가끔씩 신비로운 눈빛을 내는 아이였다. 황당트리오 친구들마저도 만덕을 심방, 즉 무당이라고 놀리듯 얘기했지만, 사춘기 소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생각이 깊은 만덕은 그런 얘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 가보자.” 만덕은 짧게 말했다. 길게 설명할 필요를 못 느꼈다. “그래, 일단 가보는 거야. 집구석에 있어봐야 피씨게임밖에 더 하겠어? 갔다가 금괴 없으면 옛날 무기라도 훔쳐오는 거지 뭐. 박물관에 우리 이름으로 기증하면 그 업적으로 대학 들어갈 때 도움될지도 모르잖아? 갔다가 아무 것도 없으면 그냥 자전거 타고 구경 잘 했다고 생각하면 되고.” 처음 제안한 창완이 남준을 설득하려고 얘기했다.

말로 설명은 안 했지만 창완이 책에서 읽은 동굴 얘기를 했을 때 만덕은 어렴풋한 영상들이 휙휙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만덕은 숨겨 놓은 금괴나 무기가 아니라 그 영상의 비밀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셋은 여름 방학 일주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금괴를 찾으러 동굴 탐사를 떠나기로 하였다. 부모님을 설득하든 속이든 그것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놓았다. 언제 이 황당트리오가 부모님 허락 받고 일 저지른 적이 있었던가?

▲ 제주도 지도 (C)장용창

2. 첫날밤

제주도가 생각처럼 크지는 않았다. 황당트리오의 고향인 선흘리를 출발하여 산굼부리를 지나 한라산을 넘고 산의 남쪽에서 다시 큰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 오후 서너시쯤 되자 돈내코 유원지 간판이 나왔다. 첫날부터 무리하지 말고 체력을 아끼자는 창완의 제안에 돈내코에서 묵어가기로 했다. 황당트리오지만 나름대로 이벤트에는 뛰어나서 텐트와 버너 등 야외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왔다.

저녁을 먹고 맥주까지 텐트 안에서 한 캔씩 몰래 까먹은 아이들 셋이 누웠다. 셋은 어릴적부터 친구였다. 선흘리가 작은 마을이라 뭐 편가를 것도 없지만 셋은 유난히 잘 모여 다녔다. 그 깊은 동백동산 곶자왈 숲도 셋이 함께 돌아다니며 탐험하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셋만 오붓이 누워보긴 처음이다. 남준은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하는데도 팔에 닿은 만덕의 피부를 느끼며 자꾸 만덕과의 하룻밤이 상상되었다. 침착하자고 노력하지만 술 기운인지 야릇한 생각이 들기는 창완도 마찬가지였다. “짜식들 놀고 있네.” 말이 없는 놈들의 성적인 긴장감을 만덕이 눈치 채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덕은 양팔을 위로 뻗는 척하더니 팔꿈치로 옆에 누워 있는 놈들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으악” 동시에 놈들이 소리쳤다. “야, 느그들 시방 먼 생각 해부렀냐?” 만덕이 텔레비젼에서 봤던 전라도 깡패들 흉내를 내면서 놀려댔다. “느그들 이 형님을 여자로 생각했다가는 갈비뼈가 뿌러질 줄 알어라이. 알아 뫼시겄냐?” 옆구리가 찢어질 듯 아팠지만 남준과 창완은 차라리 이게 편했다. 성적 긴장감은 아무래도 불편하다. 환상에서 깨게 해준 만덕이 고마웠다. “네 형님, 알아 뫼시겄습니다.”

“야, 근데, 너희들은 금괴 발견하면 뭐할 건데”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만덕이 둘에게 물었다. 만덕은 새로운 이야기 거리를 생각해 내고 질문을 던지는 데 선수였다. “글쎄, 난 가만히 은행에 뒀다가 어른 되면 사업해서 돈 벌래. 다들 돈이 최고래잖어.” 걱정이 많은 남준이 말했다. 남준 생각에 자신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돈이었다. “사실 난, 금괴보다 일본인들이 남겨 놓은 무기를 찾으면 더 재미날 것 같애.” 모험을 좋아하는 창완다운 발언이었다. 난 나중에 제주도 역사 같은 걸 연구할 거야. “야, 그런 거 연구해봐도 공부만 댑따리 많이 하지 돈도 못 번대.” 남들이 현실적이라고 부르는 남준이 말했다. “심방, 넌 뭐할 건데?” 글쎄, 난 잘 모르겠어. 자신의 뇌리를 스쳐간 영상을 만덕은 아직 기억하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털어놓을 때가 아니라고 믿었다.

“야, 근데, 그 일본놈들 있잖아. 진짜 나쁜 새끼들 아냐? 그 결7호 작전, 결국은 미국놈들이랑 싸울 거면서 전쟁은 일본이 아닌 제주도에서 하겠다는 거 아냐? 미군이 비행기로 폭탄 떨어뜨리면 결국은 제주도 사람들만 죽을 뻔 했어. 작전이 개시되기 전에 8.15해방이 되었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엉뚱한 제주도 사람들만 죽을 뻔 했잖아?” 처음에 책을 읽었던 창완이 분노하면서 얘기했다. “그러게, 진짜 나쁜 놈들이네. 싸움 하려면 자기 나라에 가서 하든가 말이야.” 남준도 거들었다. 하지만 만덕은 침묵을 지켰다. 침략하는 자도, 침략받는 자도 모두 전쟁의 피해자임을 만덕은 알고 있었다. 만덕에게는 모두다 불쌍한 중생일 뿐이었다.

▲ 삼광조 (C)장용창

3. 알뜨르 비행장 섯알오름

황당트리오가 섯알오름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오후였다. 도서관에서 찾아낸 책에는 알뜨르비행장에 대한 얘기만 나와 있어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가면서 찾아왔다. 제주도에도 이렇게 너른 벌판이 있다니. 곶자왈 깊은 숲과 오름들로 둘러싸인 선흘리의 촌놈들. 읍내에 있는 조천중학교로 갔지만 밭들이 조그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여기는 왜 이렇게 넓어? 이 넓은 알뜨르비행장에서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 몰라 일단 나무그늘에서 좀 쉬자고 눈에 띄는 솔숲을 찾아 들었으니, 이들은 몰랐지만, 여기는 섯알오름이었다.

자전거에 실어 놓은 짐을 푸는 사이 만덕은 솔숲 사이를 날아다니는 삼광조를 발견했다. 할머니가 삼광조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죽은 자들의 넋이라고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선흘리에도 전에는 잘 없던 것이, 마을이 4.3 때 불에 타 없어진 자리에 동백나무 숲이 만들어진 후로는 삼광조가 날아온다고 했다. 할머니는 이 새가 고향을 못 잊고 찾아오는 넋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도 삼광조가 있다니. 만덕은 아이들에게 따라 오라 하고는 삼광조를 좇아갔다. 숲을 통과하여 건너편으로 갔더니 그곳에 거대한 구덩이가 보였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만덕이 발을 헛디뎌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굴러 떨어진 만덕은 구덩이 아래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듯 깨어나지 못했다. 남자 아이들 둘은 어찔할 바를 몰라 조심조심 구덩이 아래로 내려갔다. 흔들어 깨웠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만덕을 들쳐 엎고 구덩이 위로 겨우 올라와 반듯이 눕혀 놓고는 팔다리를 주물러 만덕을 깨웠다.

만덕은 의식을 잃고 영혼들의 꿈을 꾸었다. 영혼들은 자기들이 4.3 때 학살당했으며, 그 뼈가 이 곳에 묻혔기에 아직도 하늘로 못 올라가고 있노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만덕은 꿈 속에서 놀랐지만 침착하게 도와 주겠노라고 했다.

깨어난 만덕이 아이들에게 말했다. “응, 이 구덩이에 옛날 4.3 때 사람들이 묻혔대.” “야, 죽은 줄 알고 걱정했잖아. 근데 니가 그걸 어떻게 알어?” 남준이 물었다. “꿈속에서 영혼들이 가르쳐줬어.” 만덕이 대답했다. “놀고 있네. 야 심방. 너 아무리 심방이라지만 좀 심한 거 아냐?” “어? 뻥이야. 놀랐지?” 만덕은 아이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소용 없음을 깨닫고 슬쩍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여기서 좀 쉬었다 가기로 하자. 아까 구르면서 다쳤는지 몸이 좀 아프네.” 만덕이 제안했다.

▲ 알뜨르비행장 격납고 (C)장용창

4. 격납고

섯알오름 소나무숲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셋은 근처를 둘러보기로 했다. 소나무숲에서 쉬는 동안 만덕은 다른 아이들에게 화장실 간다고 핑계를 대고는 몰래 영혼을 달래는 제의를 지냈다. 향을 피우고 물 한 사발 떠놓고 기도를 올리는 간단한 제의였지만, 만덕은 이런 일을 대비해 집에서부터 준비를 해두었었다. 제의가 끝날 때쯤 다시 영혼들이 나타나 고맙다며 격납고 쪽으로 가보라고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덕은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기 싫어 이런 얘기는 두 아이들에게 전혀 하지 않았다.

섯알오름 솔숲에서 조금 더 나아가자 비행기 격납고처럼 보이는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기 시작했다. 창완과 남준은 금괴를 벌써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환호를 질렀다. 그 중 하나를 택해 들어갔다. 손전등은 이미 챙겨왔다. 먼지가 가득 차고 퀘퀘한 냄새가 나는 곳이었지만 셋은 이를 즐겼다.

격납고 안쪽을 샅샅이 뒤지던 중 창완은 어느 순간 발 딛는 소리가 다름을 깨닫고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야, 이 아래가 좀 이상해.” 다른 둘도 발을 굴러보더니 소리가 다름을 인정하고는 그 아래를 전등으로 잘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준비해온 일자 드라이버 등을 이용해서 바닥의 판을 들어냈다. 거기에 나무 상자가 들어 있었다. “우와 보물이다.” 돈에 눈이 먼 남준이 소리쳤다. 다른 두 아이도 흥분되긴 마찬가지였지만 조금 더 침착했다. “가만히 좀 있어 봐”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더니 둘둘 말린 뭉치가 보였다. “금괴가 아니잖아.” 실망하는 남준의 목소리.

셋은 주도 면밀했다. 상자는 뚜껑을 닫고 바닥의 판을 그대로 덮은 다음 둘둘 말린 뭉치만 꺼내 밖으로 나왔다. 만덕은 이것이 섯알오름 구덩이의 영혼들이 얘기한 거라고 믿었다. 격납고가 여럿 있었지만, 만덕이 이곳을 먼저 보자고 한 것도 영혼들의 조언을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굳이 아이들에게 얘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도는 모두 한자와 일본어로 되어 있었다. 지도의 뒷면에 여러 얘기가 있었지만 이 얘기를 아이들은 겨우 알아냈다. 資金保管位置: 第二本部 “자금보관위치: 제2본부. "그것 봐 내가 있을 거라고 했지. 그러니까 자금이 제2본부에 있다는 소리 아냐?” 창완이 자신의 진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소리쳤다. 다른 두 아이도 긍정했다. 그리고는 셋이 다시 한번 지도의 앞면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리고는 챙겨서 온 요새 지도와 비교해보았다. 제2본부라고 표시된 지역을 오늘 지도에서 보니 관광지로 표시된 가마오름 평화박물관이었다. 목적지가 확인되자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달려갔다.

▲ 평화박물관 (C)장용창

5. 가마오름 평화박물관

중학교2학년밖에 안되었지만 아이들은 주도면밀했다. 낮에 찾아가서 보물을 찾겠노라고 하면 어른들이 믿을 리 없고 쫓겨날 게 뻔했다. 더욱이 돈 내고 입장해봤자 허가된 구역만 볼 수 있을 것이 뻔했고, 거기에 금괴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일단 관광객처럼 돈을 내고 휙 둘러본 다음 저녁을 먹으면서 느긋이 기다렸다가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면 “침투”하기로 결정했다. 관광객처럼 안내원을 따라 들은 얘기가 바로 결7호 작전 얘기였다. 셋은 제대로 찾아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저 안내원이 금괴를 알 리가 없지만.

밤 9시가 넘어 사무실의 불도 모두 꺼지자 황당트리오 특공대가 “침투”를 개시했다. 무인경비시스템이 어느 곳에 설치되어 있고, 어느 곳에 설치되어 있지 않은지까지 이미 낮에 봐두었다. 아이들은 개발이 안되었으니 “출입금지”라고 적혀 있는 동굴 구멍 쪽을 이용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만덕은 집에서 준비해온 무명실을 동굴 밖의 나무 기둥에 단단히 묶고 조금씩 풀면서 들어갔다. 전에 이야기책에서 들었던 방법이었다.

동굴 안에 들어오긴 했지만 도대체 이 넓은 동굴을 어디서부터 찾는단 말인가? 만덕은 잠깐 집중을 하고 기도를 올리며 물어봤다. 섯알오름에서 봤던 영혼들의 목소리가 “쥐를 따르라”고 했다. 만덕이 눈을 뜨자 희한하게도 쥐 한 마리가 나타났다. “저기다. 쥐를 따라가자.” 만덕이 아이들에게 소리쳤고, 셋은 따져볼 것도 없이 쥐를 따라갔다.

쥐를 따라 가다가 셋은 갑자기 멈춰 섰다. 지금까지는 평평한 길이었는데, 지금 세 아이의 앞에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구멍이 놓여 있고, 쥐가 그 아래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손전등으로 비춰 보았지만, 굴곡이 져 있어서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번 내려가면 다시 올라오기도 쉽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만 돌아가자.” 안전한 것을 좋아하는 남준이 제안했다. “쥐가 무슨 대수라고 미친 놈들처럼 쥐를 따라 가냐?” “야, 저렇게 위험한 데니까 오히려 금괴를 넣어두었을 것 같지 않니?” 모험심이 조금 더 강한 창완이 반대했다. “다시 올라오기 힘들 수 있으니까, 일단 나만 내려 갈께. 밧줄 준비해왔지? 너희들 두 명은 힘이 세니까 여기서 지키고 있다가 밧줄로 나를 끌어올려줘.” 만덕의 제안이었다. 남자 아이들은 만덕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보다 담력이 강하다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덕만 내려가기로 했다.

▲ 와흘리 본향당 (C)장용창

6. 금괴

밧줄을 타고 얼마 내려가자 작은 방이 나왔다. 방에는 한 명의 시체가 기다란 총과 함께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나무 상자 하나가 보였다. 만덕은 매우 침착했다. 나무 상자를 열어보니 금괴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금을 찾아 왔는가?” 물어보는 남자의 목소리에 만덕은 놀랐지만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숨을 죽였다. 제복을 입은 군인의 영혼이 만덕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위협적이라기보다 불쌍해 보였다. “금을 찾아 온 것이 아니오. 당신을 보았기 때문이오. 당신의 얘기를 들어 주러 왔소. 어찌 하여 내 앞에 나타난 거요?” 만덕은 침착하게 말했다. 만덕은 이 영혼이 맨 처음 학교 도서관에서 금괴 얘기를 들을 때 스쳐 지나갔던 영상임을 깨달았다.

“난 일본군 장교였소. 결7호 작전을 수행하다가 전쟁에 졌으니 철수하라는 명령을 듣고 자살을 했소. 전쟁에 진다는 것은 장교의 수치라 생각했소. 그러나 죽고 보니 후회되오. 사람 사는 게 별 거 있소. 낮이면 일하고 저녁이면 가족들과 오붓이 한 끼 밥 먹고 따뜻한 방에서 누워 자면 그만인 것을. 충성이니 영광이니 하는 것이 허망한 것임을 죽어서야 깨달았소. 헌데 내 육신이 이 동굴 안에 있으니 영혼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소. 나를 도와 주시오.”

만덕은 심방이라는 자신의 역할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산자는 물론 죽은자의 얘기를 잘 들어주고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 영혼이 살았을 때 친구였든 원수였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산사람에게조차 친구니 원수니 하는 것은 얼마나 유치한 말인가.

“저 금괴는 어떻게 할까요?” 만덕이 오히려 물었다. 수십년 세월을 이 영혼이 금괴를 지키고 있었으니 예의상 물어야 하는 것이다. “금괴가 탐이 나오?” “아니, 전혀요.” “그렇다면 다행이오. 금괴란 사람을 파멸로 이끌 뿐이오. 저 밖에 두 아이들도 혹시 이 금괴를 알게 된다면 안 좋은 일이 생길 수 있소.”

만덕은 방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뒷쪽으로 다시 좁은 틈이 보이고, 그 아래로는 다시 낭떠러지처럼 수직으로 틈이 있었다. 만덕은 금괴가 담긴 나무 상자를 그 틈으로 밀어 넣었다. “당신이 고향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 드릴께요.” 만덕은 이 말을 남기고 총을 챙겨 위로 올라갔다. 밧줄을 단단히 잡은 후 아이들에게 끌어올리라고 소리쳤다.

남준과 창완이 차례대로 밧줄을 타고 내려가 유해를 보고 왔다. 동굴 밖으로 나가 아이들은 내일 일을 의논했다. 남준은 금괴가 없어 아쉽다고 했지만, 창완은 총을 발견한 것도 대단한 것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다음날 어른들에게 알려 유해와 총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유해를 일본으로 보내는 일은 어른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며칠 후 만덕은 일본군 장교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의를 고향마을 선흘리의 본향당에서 홀로 지냈다.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자신의 역할이 점점 더 분명하게 보였다.<제주의소리>

<장용창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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