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돈 칼럼] 사진가 고 김영갑의 삶과 예술정신
벽에 걸린 또 한 점의 사진으로 눈길을 돌린다. 화면 가득히 연보라, 노란, 하얀빛 들꽃의 물결이 출렁인다. 낮은 바람 따라 꽃물결의 이랑이 잔잔히 부서지고 있다. 작가가 평소에 ‘대표작’으로 아끼던 작품이다. 그 들녘 어딘가 삼각대 위에 고정시킨 카메라와 함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마르고 껑충한 한 사나이의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마라도 주민의 삶과 생태를 담담하게 기록한 초기의 흑백 사진 소품에서부터 제주의 오름과 바다와 중산간 들녘을 담은 파노라마 컬러 사진에 이르기까지 그가 남긴 전 작품엔 대상에 대한 섬세하고 예민한 직관력과 자연친화적인 감수성, 인본주의를 지양한 생태주의적 사고, 그리고 제주의 인문과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 포착한 건강한 아름다움이 배어난다.
훌륭한 사진은 끊임없는 기다림의 고행 끝에 얻어진다.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했던가. 그에게 있어 한라산은 전체가 명상센터였다. “수행자처럼 엄숙하게 대자연의 소식을” 기다렸다. 기다림은 “자신을 정화시키기 위한 정진”이었다. 뷰파인더를 응시하며 사각의 프레임 속에 시시각각 형과 색을 달리하는 하늘과 구름과 흔들리는 바람의 결, 단 한번 눈앞을 스치는 황홀한 절정의 순간은 쉬이 오지 않는 법. 이 세상에 두 번 다시 존재하지 않는 그 찰라의 공간을 절단하고, 시간을 붙잡아 넣기 위해 그는 추위와 눈보라, 비바람 속에서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하염없이 기다렸던 것이다. 약간의 돈이라도 생기면 우선 필름과 인화지부터 샀고,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자학을 하다시피 몸을 돌보지 않고 강행한 작업의 연속이 속에서 불치의 병마를 키워왔는지 모른다.
그는 노장 사상에 흐르고 있는 도(道)의 예술정신을 삶 속에서 그리고 작품 속에서 실천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가 즐겨 말하는,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아도 잡을 수 없는 것, 형상도 없고, 물체도 없는데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환상”은 곧 노자가 말하는 도이다. 이러한 환상이 자연 속에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했고, 노자는 ‘도법자연(道法自然)’ 즉 도는 자연을 따른다고 했으니, 자연 속에 있는 도, 자연을 따르는 도의 순리대로 살아가려고 한, 무위자연을 추구한 그의 삶의 철학과 그 속에서 잉태된 예술 정신의 빛남을 능히 짐작케 한다.
불치의 병을 진단 받고도 그는 성산포에서 가까운 삼달리의 옛 삼달 분교를 리모델링하여 사진갤러리를 만드는데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무서운 집착을 보였다. 제주 올래의 형상에서 컨셉을 얻은 듯, 운동장 전체를 돌아 미로처럼 돌담을 쌓고, 토종 들꽃과 나무를 구해다 심었다. 교실은 나무랄 데 없는 상설 전시 공간이 되었다. 갤러리를 방문할 때마다 돌담은 높아갔다. 그만 해도 좋겠다고 했지만 그는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자꾸만 꾸미고 손을 대었다. 아마 그에겐 그러한 집착이 생의 마지막을 지탱하게 해준 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이젠 거의 다 됐다고 할 정도에 이르러 숨을 놓아버렸으니.
김현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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