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돈 칼럼] 사진가 고 김영갑의 삶과 예술정신

   
책상 앞 유월의 캘린더에 박힌 한 장의 사진에 눈길이 머문다. 시절은 녹음이 짙어가는 초여름의 어디쯤인 듯. 나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피사체는 용눈이 오름에서 바라본 다랑쉬 오름일 것이다. 일몰의 역광을 받아 전경에 붙잡힌 용눈이 오름의 깊고 얕은 굴곡의 변화가 주는 빛과 음영, 전경에서 후경으로 이어지는 색감의 부드럽고 미묘한 콘트라스트는 풍부한 회화적인 공간감을 부여하며, 완만하고 유려한 오름의 선과 선, 형상과 형상이 만나서 풍만한 볼륨과 농염한 관능의 조형미를 연출한다. 그것은 바로 범접하기 힘든 제주 자연의 속살이다. 전체적으로 시정이 넘치는 음악적 울림 속에 무섭도록 적요한 신비감이 화면을 휘감는다.

   
제주 자연의 외피를 예쁘고 화려하게 묘사한 작가는 많지만 이처럼 무균질의 속살을 가감 없이 드러낸 작가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다. 그 속살엔 제주의 신화와 설화와 역사가 문신처럼 아로새겨져 있음을 느낀다.

벽에 걸린 또 한 점의 사진으로 눈길을 돌린다. 화면 가득히 연보라, 노란, 하얀빛 들꽃의 물결이 출렁인다. 낮은 바람 따라 꽃물결의 이랑이 잔잔히 부서지고 있다. 작가가 평소에 ‘대표작’으로 아끼던 작품이다. 그 들녘 어딘가 삼각대 위에 고정시킨 카메라와 함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마르고 껑충한 한 사나이의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작가는 가고 이렇게 작품만 남았다. “예술이란 유한한 열정으로 영원한 자연을 표현하는 것”이라던 앙드레 말로의 말이 떠오른다. 사진에 바친 그의 못다한 열정은 영원한 자연으로 되살아남을 것이다. 김영갑. 그는 이제 그가 무던히도 아끼고 사랑했던 제주의 오름과 초원으로 되돌아갔다. 한 점 바람과 들꽃으로 화해. 사람을 비롯한 뭇 생명체의 모태인 자연의 그 자리, 영혼의 고향으로.

마라도 주민의 삶과 생태를 담담하게 기록한 초기의 흑백 사진 소품에서부터 제주의 오름과 바다와 중산간 들녘을 담은 파노라마 컬러 사진에 이르기까지 그가 남긴 전 작품엔 대상에 대한 섬세하고 예민한 직관력과 자연친화적인 감수성, 인본주의를 지양한 생태주의적 사고, 그리고 제주의 인문과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 포착한 건강한 아름다움이 배어난다.

훌륭한 사진은 끊임없는 기다림의 고행 끝에 얻어진다.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했던가. 그에게 있어 한라산은 전체가 명상센터였다. “수행자처럼 엄숙하게 대자연의 소식을” 기다렸다. 기다림은 “자신을 정화시키기 위한 정진”이었다. 뷰파인더를 응시하며 사각의 프레임 속에 시시각각 형과 색을 달리하는 하늘과 구름과 흔들리는 바람의 결, 단 한번 눈앞을 스치는 황홀한 절정의 순간은 쉬이 오지 않는 법. 이 세상에 두 번 다시 존재하지 않는 그 찰라의 공간을 절단하고, 시간을 붙잡아 넣기 위해 그는 추위와 눈보라, 비바람 속에서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하염없이 기다렸던 것이다. 약간의 돈이라도 생기면 우선 필름과 인화지부터 샀고,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자학을 하다시피 몸을 돌보지 않고 강행한 작업의 연속이 속에서 불치의 병마를 키워왔는지 모른다.

   
자신과의 외롭고도 기인 싸움 끝에 찾아온 황홀한 ‘절정의 기쁨’은 프레임에 꽉 차게 잡은 초원지대와 난만한 들꽃의 바다, 보리밭 사진에서 초원지대와 하늘, 돌담과 하늘, 바다와 하늘을 양분한 사진 등 거의 모든 파노라마 사진에서 화인처럼 깊이 각인돼 있다. 낮게 깔린 돌담의 검은 실루엣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검붉은 노을, 하늘 가득 켜켜이 쌓인 운해위에 걸려 있는 마른 나무 가지들은 비장미 넘치는 쓸쓸함으로 보는 이들의 눈시울에 애상의 그림자를 길게 남긴다. 하나 둘 그리움의 시편들이 떠오른다. 말 못할 머언 그리움의 흔적을 사람들의 가슴에 남겨두고 그는 홀연히 길을 떠났다.

그는 노장 사상에 흐르고 있는 도(道)의 예술정신을 삶 속에서 그리고 작품 속에서 실천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가 즐겨 말하는,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아도 잡을 수 없는 것, 형상도 없고, 물체도 없는데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환상”은 곧 노자가 말하는 도이다. 이러한 환상이 자연 속에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했고, 노자는 ‘도법자연(道法自然)’ 즉 도는 자연을 따른다고 했으니, 자연 속에 있는 도, 자연을 따르는 도의 순리대로 살아가려고 한, 무위자연을 추구한 그의 삶의 철학과 그 속에서 잉태된 예술 정신의 빛남을 능히 짐작케 한다.

   
그와 나의 인연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품집에 실을 평문을 부탁하러 온 그에게서 나는 한 시간 여에 걸쳐 신념과 열정에 찬 그의 사진 철학과 삶의 내력을 들었다. 작업을 하러 몇 차례 제주를 오고가다 1985년에 완전히 제주에 정착해 이곳저곳 남의 허름한 집을 전전하며 들풀처럼 살아온, 오직 사진 하나에 운명을 건 광기어린 예인의 눈빛을 보았다. 작업에 방해가 된다며 신문도 보지 않고, 텔레비전도 없이, 친구들과 가족, 일가친지들과도 거리를 멀리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어떠한 모임에도 단체에도 나가지 않으며, 세상사완 담을 쌓고 철저한 반문명인으로 ‘야생의 사고’를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외곬수의 삶의 방식이 때론 많은 주위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사진 예술과 사진가에 대한 세인들의 몰이해를, 나날이 훼손되어 가는 제주의 자연 환경과 개발 정책을 소리 높여 개탄하기도 했다.

불치의 병을 진단 받고도 그는 성산포에서 가까운 삼달리의 옛 삼달 분교를 리모델링하여 사진갤러리를 만드는데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무서운 집착을 보였다. 제주 올래의 형상에서 컨셉을 얻은 듯, 운동장 전체를 돌아 미로처럼 돌담을 쌓고, 토종 들꽃과 나무를 구해다 심었다. 교실은 나무랄 데 없는 상설 전시 공간이 되었다. 갤러리를 방문할 때마다 돌담은 높아갔다. 그만 해도 좋겠다고 했지만 그는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자꾸만 꾸미고 손을 대었다. 아마 그에겐 그러한 집착이 생의 마지막을 지탱하게 해준 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이젠 거의 다 됐다고 할 정도에 이르러 숨을 놓아버렸으니.

   
도내외에서 뜻있는 이들이 모여 그의 예술 정신을 기리는 사업을 벌이기로 한단다. 반가운 일이다. 그가 남기고 간 20 만 점에 이르는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 보존, 전시함은 물론, 갤러리 두모악은 전국의 사진가와 사진학도들을 위한 소통과 교육의 장으로서, 관광객들에겐 격조 높은 문화관광의 자원으로 길이 선용할 방도를 모색해야 하겠다. 김영갑, 그로 인해 제주의 오름과 들녘에 숨겨진 원생의 아름다움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눈뜸을 가져오게 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제 무거운 육신의 굴레를 벗고 저 세상에서 부디 영혼의 안식을 누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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