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 지금은 제주해군기지 건설 갈등으로 인해 마을공동체가 깨져버린 아픔의 땅이지만, 오래전부터 물 좋고 사람 좋아 제주섬에서도 으뜸이라며 일강정(一江汀)으로 불렸다. 그런 강정이 고려때는 몽골 황제가 피난궁전을 지었던 곳이라는 주장이 역사학계에 등장했다. 300여 년 전 제주목사 송정규에 의해 처음 제기된 일명 ‘강정동 대궐터’는 각종 문헌과 발굴조사를 통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앞서 해군기지 건설 부지에서 청동기, 철기시대 유물이 다수 발견돼 강정지역의 역사적 가치가 부각된 상황에서, 몽골 황제의 대궐터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강정을 주목해야 할 새로운 이유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 강정 제주해군기지 부지와 대궐터 발굴조사 구역은 1km도 떨어져 있지 않다. 이 같은 내용은 김일우 박사가 지난 7월 23일 한국사학보에 발표한 논문 ‘제주 강정동 대궐터 유적의 역사적 성격-고려시대 몽골의 제주지배기와 관련하여’에 수록됐다. [제주의소리]는 해당 논문을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2차례 씩 나눠 총 7번에 걸쳐 연재한다. #표시된 각주 내용은 원고 하단에 별도의 설명을 달았다. [편집자] 


▶글 싣는 순서 
①머리말
②제주 지역의 '대궐터'와 그 성격
③13~14세기 제주의 서남부 지역과 조영공사 (1)
④13~14세기 제주의 서남부 지역과 조영공사 (2)
⑤강정동 '대궐터' 관련 사서기록 및 유적 (1)
⑥강정동 '대궐터' 관련 사서기록 및 유적 (2)
⑦맺음말


[제주 강정동 대궐터 유적] ⑥강정동 '대궐터' 관련 사서기록 및 유적 (2)
/ 김일우 (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해외문견록」외에도 강정동 대궐터 관련 사서기록은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으나, 대부분 유사, 혹은 시기가 앞선 기록을 의도적으로 고쳤다고 보인다. 이 가운데 시기가 가장 앞서는 한편, 다른 사서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거론할 만한 것은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의 기록을 들 수 있다. 이 경우도 원문과 번역문을 다 같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B. 왕자묘

대정현의 동쪽 45리에 있다. 궁산의 두 하천 사이에 3기묘의 댓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두 모퉁이에는 백작약이 자란다. 가래촌에는 또한 궁궐의 잔존 주초석이 있다. 아마도 탁라왕이 도읍지로 삼은 곳이 아닌가 한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는 산방을 제2도였다고 이른다._#50

이 자료는 이헌조가 헌종 7년(1841)~9년(1843) 제주목사를 지낼 때 편찬한『탐라지초본』에 실린 것이다. 이를 보자면, ‘왕자묘(王子墓)’라는 분묘유적 항목에 세주(細註) 형태로 두 곳의 유적을 같이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궁산의 두 하천 사이 소재의 3기묘, 다른 하나는 가래촌 위치 궁궐터의 잔존 주초석이다. 이 가운데 전자는 서귀포시 하원동 산 21번지 등에 자리잡은 3기의 분묘, 곧 현재 기념물 제54호 ‘하원동 탐라왕자묘’이고, 후자가 강정동 대궐터를 말한다.

이 기록은 강정동 대궐터 관련 19세기 전반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이를 보자면, 주초석이 지표상에 드러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올해의 발굴조사에서도 석축과 돌담 사이에서 다수의 주초석이 확인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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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원동 탐라왕자묘 전경. 사진제공=(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 서귀포시청 ⓒ제주의소리

특히, 이원조의 경우는 강정동 대궐터를 ‘탁라왕(乇羅王)’이 도읍지로 삼았던 곳으로 비정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강정동 대궐터에서는 발굴조사를 통해 14~15세기에 사용된 건물지와 기와편이 확인되었다. 그런 만큼, 이원조의 비정은 달리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한편 강정동 대궐터는 조선시대 때 가래촌에 들어섰던 동해방호소(東海防護所) 관아의 흔적이거나, 명나라가 공양왕 때 제주로 유배 보낸 몽골 왕실의 가족 애안첩목아 등의 주거용 옛터일 가능성을 제기하는 논의도 있다._#51 이 견해 가운데 방호소 관아의 흔적이라는 고증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동해방호소의 경우는 세종 21년(1439) 이전부터 가래촌에 설치됐다고 하나,_#52 이를 기와 시설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애안첩목아 등의 주거용 옛터라는 고증은 검토할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14세기 후반 명이 제주로 유배 보냈던 몽골 왕족 출신의 유배인은 자신의 동족 몽골족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던 곳, 곧 제주 서남부권으로 들어가 살기를 원했고, 명과 고려도 이들의 거처를 제주 서남부권 지역에 지어주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안첩목아 등의 거처가 강정동 대궐터에 지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하원동 소재의 분묘군, 즉 지금의 기념물 제54호 ‘하원동 탐라왕자묘’가 ‘왕자묘(王子墓)’라는 명칭으로 사서를 통해 확인되는 것은 1843년 경 편찬의『탐라지초본』으로부터 비롯했다고 보인다. 이는 1706년 무렵 송정규가 「해외문견록」을 저술하면서 강정동 대궐터를 세세하게 묘사하면서도 그 주변의 왕자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사실을 통해서도 방증되지 않을까 한다.

하여튼, 하원동 소재의 왕자묘는 강정동 대궐터의 주변 유적으로 양자를 묶어 이해하는 경우도 없지 않으나, 아직까지는 구체적으로 논의된 바가 없는 편이다._#53 반면, 왕자묘가 누구의 무덤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곧, 왕자묘의 피장자가 몽골 왕족 양왕(梁王)의 아들로 제주에 유배와 태종 4년(1404) 사망한 백백태자라는 견해가 있는 한편,_#54 몽골의 제주지배기부터 조선초기에 걸친 왕자(王子) 역임자로 보는 논의도 있는 것이다._#55 이들 양자의 견해를 소개하거나, 그에 대한 이해를 논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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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원동 탐라왕자묘 2호분. 사진제공=(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 서귀포시청.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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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동 '대궐터' 출토 원형주좌초석. 사진제공=(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제주의소리

우선, 왕자묘의 피장자가 백백태자였다는 경우를 보자. 이 견해는 제주 사람이 ‘방애오름’ 북쪽 분지에 위치한 속칭 ‘여가밭’ 북쪽 끝 장방형의 묘소를 ‘왕자묘(王子墓)’라 일컬어왔는데, 여기가『탐라지초본』에 ‘왕자묘(王者墓)’로 수록돼 있다고 했다. 이어 백백태자의 무덤이 ‘왕자묘’로 불리게 된 것은 잘못된 구전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곧, ‘하원동 탐라왕자묘’의 피장자가 ‘왕자(王子)’ 역임자가 아니라는 것이다._#56 그럼에도, 이 견해는 백백태자의 무덤이 오랫동안 ‘왕자묘’라는 이름으로 구전되어 왔었고, 이 구전을 통해 ‘하원동 탐라왕자묘’를 왕자 역임자의 무덤으로 간주하는 인식이 계속적으로 재생산돼 나아갔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백백태자가 원래 운남 양왕의 왕자이며, 이를 제주 사람도 알고 있는 한편, 태자라는 것보다 왕자라는 호칭이 더욱 합당・자연스런 점도 작용했다고 본다. 또한 백백태자 측에서도 양왕의 왕자 중 태자라는 사실을 제주 사람들에게 굳이 내세우지 아니했던 점도 백백태자의 무덤이 ‘왕자묘’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게 된데 영향을 끼쳤다고 추측한다.

결국, 이 견해는 사료 B에 나오는 ‘왕자묘’의 피장자가 백백태자인데,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시대 이래 제주의 토착세력 가운데 차상위층이 나아갔던 왕자 역임자의 무덤으로 보는 오인이 생겨났고, 그것이 구전으로 내려오면서 점차적으로 굳혀져 나아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중반에 와서는 사서에도 백백태자의 무덤이 ‘왕자묘’라는 항목으로도 올라가 해설이 따라 붙게 됐다고 봤다.

다음은 ‘왕자묘’의 피장자가 왕자 역임자로 보는 견해를 살펴보겠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왕자는 전자의 견해에서 언급한 왕자와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후자의 견해에서 이야기하는 왕자는 몽골의 제주지배기 이후 왕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몽골의 제주지배기 이후에도 왕자는 제주 토착세력 가운데 차상위층에 해당했다. 이들은 몽골이 제주에 설치한 관부의 속관층(屬官層)으로도 나아갔다. 이들로서는 문창우(文昌佑), 문창유(文昌裕), 문공제(文公濟), 문신보(文臣輔)가 확인된다._#57 그런데 사료 B의 ‘왕자묘’ 피장자가 왕자 역임자로 보는 논자는 앞의 4명 문씨 외에도 문충보(文忠輔), 문충보(文忠甫), 문충세(文忠世)을 거론하며, 이들이 남평문씨 남제공파(南平文氏 南濟公派)의 후손으로 조선 초기까지 왕자를 역임・계승해 나아갔다고 한다._#58 그래서 하원동 소재 분묘군의 피장자는 남평문씨 남제공파의 일원으로 왕자에 나아갔던 사람들 가운데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근거를 들고 있기는 하나, 가장 주요하고, 핵심적인 것으로는 ‘하원동 탐라왕자묘’가 수십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주 고씨 집안에서 관리해 왔었다는 점을 들었다. 곧, 고씨는 남평문씨의 외손이고, 제주의 남평문씨가 선조 34년(1601)에 일어난 소위 ‘소덕유(蘇德裕)・길운절(吉云節) 역모사건’으로 몰락함에 따라 ‘하원동 탐라왕자묘’가 외손 고씨에 의해 최근까지 관리돼 왔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원동 탐라왕자묘’가 남평문씨와 관련됐다고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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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로능동산방묘(마지막 성주 고봉례 추정묘), 사진제공=(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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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지초본 고적조 수록 왕자묘 관련 기사. 사진 제공=(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제주의소리

사실, 1975년에 이르러 개서・편찬된 족보에 이르러 비로소 확인되고 있기는 하나,_#59 고봉례(高鳳禮)의 배우자가 남평문씨 문충걸(文忠桀)의 딸이었다. 그리고 문충걸은 고려 공민왕 21년(1372) 이래 왕자를 역임했고, 고봉례는 조선 태조 4년(1395) 이래 제주의 마지막 성주에 나아갔다. 이를 근거로 삼자면, 고씨가 남평문씨의 외손이었던 적은 있다고 하겠다. 그것도 ‘하원동 탐라왕자묘’가 축조됐다고 보는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반 무렵이다. 그럼에도, 문충걸의 외손과 이어지는 고씨 가계가 600여 년 동안 남평문씨의 분묘를 관리했다 함은 사회통념적으로 봐 이해하기 곤란하지 않을까 한다. 특히, 제주 남평문씨가 ‘소덕유・길운절 역모사건’에 연루됐던 문충기(文忠基)로 말미암아 가문의 분묘를 관리조차 못할 정도로 몰락했다는 이해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본다._#60

한편 ‘왕자묘’, 곧 하원동 소재 분묘군의 3기는 고려말~조선초기 제주의 방형석곽묘 10여기 가운데 축조방식, 곧 묘제의 축조형태와 규모로 볼 때 가장 위계가 높은 것으로 보고, 이에 비추어 피장자의 신분에 접근한 견해도 있다._#61 이에 따르면, 하원동 분묘군은 몽골의 제주지배기 이래 왕자를 역임했던 남평문씨의 무덤으로 보기에는 묘역시설의 위계가 너무 높다는 점을 제시하고, 회의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또한 백백태자 일족의 무덤으로 보기에도 여러 가지 모순이 따른다고 했다. 왜냐하면, 3기에 달하는 묘의 입지선택과 축조순서 및 형태가 기존의 발굴조사 성과에 따르면, 아들(육십노(六十奴), 3호, 1391년 사망)→ 백백태자(1호, 1404년 사망)→ 처(2호, 1444년 이후 사망)의 순서로 축조됐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백백태자와 그 처의 묘가 모두 아들의 묘 아래에 자리잡았다고 보게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석실규모에 있어서도 백백태자의 묘가 가장 우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가장 작은 규모로 축조됐다고 하는, 곧 역전현상도 일어나는 등의 모순이 야기된다고 했다. 그래서 하원동 분묘군의 피장자 신분에 대한 규명이 현재의 연구성과로서는 힘들고, 제주 지역의 분묘에 대한 더 많은 자료의 축적과 연구 및 논의가 이루어진 뒤에야 가능할 것으로 봤다.

여기서 다시 강정동 대궐터로 돌아 와, 발굴조사의 성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간간히 언급했지만, 강정동 대궐터 유적의 건물지가 14~15세기와 관련되었음을 밝힌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또한 이곳의 원형주좌 초석이 법화사지에서 수습된 원형주좌 초석과 동일하기 때문에 두 곳의 건물지가 동시기에 존재했을 가능성을 제시한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로써 강정동 대궐터의 경우도 몽골의 제주지배기 때 몽골과 관련성을 지닌 시설물이 들어섰었던 유적일 수 있음을 시사했다고 본다. 반면, 강정동 대궐터는 문헌사료와 이의 논리적 추찰을 통해서 보자면, 여느 대궐터처럼 그에 걸맞은 건축물의 존재가 확인되어야 할 터인데, 발굴조사의 성과는 그렇지 않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강정동 대궐터의 규모가 송정규의 고증에 따르더라도 '사방 수백 보'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이번의 발굴조사 대상유적이 1415㎡(428여 평)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요컨대, 강정동 대궐터 유적은 사서기록 및 발굴조사와 주변 유적 간의 상호 관련성을 종합・유기적으로 미뤄 보자면, 14세기 후반 몽골이 제주 서남부 지역에 일으켰던 대규모 조영공사와 관련해 역사적 고증을 해 나아가야 할 곳임이 어느 정도 드러나지 않았을까 한다. 또한 강정동 대궐터를 하원동 소재 분묘군, 곧 ‘왕자묘’와도 묶어 이해하는 접근도 취하는 한편, 이들 분묘의 피장자에 대한 논란도 해소돼야 할 것 같다.


▲각주

#50
이원조(李元祚) 찬, 헌종 9년(1843) 경, 『탐라지초본』, 대정(大靜), 고분조(古墳條).
‘王子墓(이하 세주 형태) 在縣東四十五里 宮山兩川之間 三墓階砌尙存 兩隅有白灼藥 加來村裏 又有宮闕遺礎 疑是乇羅王所都處 俗傳山房爲第二都云’.

#51
김태능, 1967, 앞의 논문, 187쪽.

#52
제주문화유산연구원, 2015, 앞의 보고서, 16~17쪽.

#53
강정동 대궐터 유적의 발굴조사는 올해 처음 행해졌다. 이는 애초 하원동 소재 왕자묘의 피장자가 몽골 제주지배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살았던 제주 남평문씨의 조상 가운데 왕자 역임자였다고 보는 제주남평문씨종친회의 바램과 이들의 발굴조사 경비지원에 힘입어 이뤄졌다. 본 논문의 작성도 강정동 대궐터 유적과 하원동 소재 왕자묘의 상호관련성을 검토하는 것으로부터 비롯했다.

#54
김태능, 1967, 앞의 논문, 184~186쪽.

#55
고창석・김동전・강창화, 2000,『제주 하원동 분묘군』, 제주사정립사업추진협의회, 123~126쪽.

#56
여기서 말하는 왕자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제주 토착세력의 2인자가 지녀 왔었던 호칭이거니와, 고려시대 들어와서는 국가의 제주관할에도 참여했던 직위(職位)의 명칭을 말한다.

#57
김일우, 2000, 앞의 책, 289~373쪽.

#58
고창석・김동전・강창화, 2000, 앞의 책, 25・126쪽.

#59
김경주・박재현, 2012, 『제주 성읍리분묘유적』, 제주문화유산연구원, 69쪽.

#60

고창석・김동전・강창화, 2000, 앞의 책, 25~26쪽.
문충기는 선조 34년(1601)에 일어난 ‘소덕유・길운절 역모사건’의 주모자 가운데 한 명이고, 후에 중앙으로 압송돼 주모자 10명과 함께 능지처참되는 한편, 가산적몰과 연좌제 적용의 처벌도 받았다(『선조실록(宣祖實錄)』권140, 선조 34년 8월 임신). 그럼에도, 문충기의 일족 전부가 연좌제로 말미암아 처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제주의 남평 문씨가 문충기 때문에 정치・사회적 피해를 받았다고 손치더라도, 그 피해가 제주 남평문씨 몰락에 이를 정도는 아니었다고 본다. 이는 소덕유・길운절의 역모에 연루됐거나, 혹은 연좌제에 걸렸던 사람들이 사건이 일어났던 당해 연도 1601년에 상당수 사면되었던 사실이 확인되고 있음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선조실록(宣祖實錄)』권143, 선조 34년 11월 을미・무술 ;「남차록(南槎錄)」, 9월 22일, 교서조(敎書條), 15~16면). 더욱이, 조정의 중신관료들이 ‘소덕유・길운절 역모사건’을 반란으로 볼 수 없다는 의문을 제기하거나, 혹은 제주목사 성윤문의 가혹한 형벌과 탐욕에서 비롯했음을 강조한 사실도 확인된다(『선조실록(宣祖實錄)』권140・141, 선조 34년 8월 무진・9월 병진). 이를 봐도, 제주 남평문씨가 문충기의 ‘소덕유・길운절 역모사건’ 가담으로 받았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을 듯싶다.

#61
김경주・박재현, 2012, 앞의 보고서, 67~73쪽.


※ 필자 김일우 (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의 대표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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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고려시대 탐라사연구』, 신서원
2002,「고려후기 제주 법화사의 중창과 그 위상」, 『한국사연구』119 
2003,「고려후기 제주・몽골의 만남과 제주사회의 변화」,『한국사학보』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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