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형무소 순례] (1) 목포와 대전, 아직도 제주를 기억한다

▲ 16일 목포형무소 터에서 제를 올리고 있는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협의회 소속 유족들. 과거 형무소가 있던 자리 인근에는 아파트들이 솟아 있었다. ⓒ 제주의소리

4.3 당시 군법회의에 회부돼 전국 각지 형무소로 끌려갔던 제주도민의 숫자만 2530명. 일반재판 당사자 등을 포함하면 이 숫자는 더 불어난다. 이들 중 상당수가 제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남은 유족들은 생사도 알 수 없이 역사속에 사라져간 이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68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4.3이 현재진형행이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협의회가 16일부터 18일까지 2박3일 일정으로 전국 각지의 형무소 순례에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잊혀져서는 안될 역사지만 시나브로 기억속에서 멀어져가는 4.3 역사의 현장을 찾아 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여정이다.

16일 첫 목적지로 목포형무소터를 향한 전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이자 현 행불인협의회 고문인 홍성수(71)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과거 목포형무소에는 1000여명의 수형자가 있었는데 이 중엔 4.3 당시 끌려간 제주도민도 600여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소소하게 준비한 제를 올리고 참배를 한 뒤 주변을 둘러보던 홍씨는 조심스레 옛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과거 서귀포 효돈마을에서 지내던 그의 아버지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서귀포경찰서에 끌려갔고, 목포로 보내졌다. 사실 그의 아버지는 1949년 9월 15일 형기가 만료돼 풀려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바로 하루 전인 1949년 9월 14일. 목포형무소 탈옥사건이 발생한 것. 그의 가족으로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최소 400여명이 탈주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의 아버지가 감옥에 남았었는지, 빠져나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 이후 생사를 알 수 없게 됐다.

당시 목포에서 정미소를 하던 할아버지의 누이동생이 아버지를 마중나가기로 했지만, 이미 탈옥사건이 벌어져 난리법석이 난 형무소에서 면회를 허락하거나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해줄리 만무했다. 그렇게 그의 아버지는 역사의 흐름에 묻혀 스러져갔다. 그가 이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서른이 넘어서다. 그 만큼 그 당시 시대는 4.3을 입 밖에 꺼내는 일을 허락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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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일 목포형무소 터에서 묵념을 올리고 있는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협의회 소속 유족들. 맨 왼쪽에 홍성수씨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목포형무소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 제주의소리

그가 흥미로운 얘기를 하나 꺼냈다. 아버지의 넋을 달래기 위해 무당을 불러 굿을 할 때 마다 꼭 “아버지가 바다에서 헤엄을 친다”는 얘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당시 수감자들을 목포 앞 바다에 수장했다는 말이 파다했다. 그는 이것이 일종에 강한 심증이라고 믿는다.

현대사의 풍랑 한 가운데 있는 공간이지만 지금은 그 사실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평온하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한창 도시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현재 이곳은 도저히 4.3을 의미있게 기억할만한 공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홍씨는 “전국을 다녀보면 알겠지만 전국적으로 형무소 터가 보존된 곳은 거의 없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어 “심지어 어떤 부산형무소 터는 지역에서 가장 고급 아파트가 들어선 공간이 됐다”고 덧붙였다.

역사적인 공간에 어떤 징표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는 살며시 웃으며 말 없이 먼 곳을 바라봤다. 유독 그 미소가 슬퍼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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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일 대전 골령골 학살터를 찾은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협의회 소속 유족들. 양성홍씨(맨 오른쪽)이 당시 시대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제주의소리

정부가 외면하는 대전 골령골...“추모공원 조성 약속”에 한시름 놓아

행불인협의회는 곧바로 대전에 위치한 골령골 학살터를 찾았다. 한국전쟁 당시 최대 민간인 집단희생지로 알려진 대전형무소의 총살 추정현장이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군경에 의해 1800명이 총살됐고, 이중 제주도민이 3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의 외면으로 지역 시민단체와 유족단체 등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매년 발굴사업을 진행중이나, 사유지라는 특성 상 추진이 쉽지 않다.

4.3 당시 양성홍(70)씨의 아버지도 7년형을 받고 이 곳에 끌려왔다, 별다른 이유랄 것도 없이. 당시 제주시 연동에 살던 그의 아버지는 살기위해 한라산을 향했다 ‘내려오면 살려주겠다’는 ‘삐라’를 보고 해안가를 향했지만 돌아온 것은 수갑뿐이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그의 아버지는 총살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 때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양씨는 “정부가, 군경이 국민들을 학살시킨 것이면 당연히 그 잘못을 인정하고 발굴사업에도 적극 나서야 하는데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며 “이 얘기만 하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이 화가 잔뜩 나고, 눈물이 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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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골령골 학살터에 세워진 비석.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석이 패여있다. 누군가 돌로 수 차례 내리찍은 듯한 흔적이다. ⓒ 제주의소리

한 가지 다행스러움이 유족들을 찾아왔다. 제주에서 이들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김종현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이사장이 기쁜 소식과 함께 골령골 학살터 현장을 찾은 것. 그는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 상임고문과 대전민간인희생자대책회의 의장을 맡고 있다.

김 이사장은 “최근 이 일대에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이들을 위한 추모공원을 만드는 내용의 계획이 구체화되고 있다”며 “이미 청와대, 행정자치부, 대전 동구청과의 논의를 통해 이 같은 계획이 실행단계에 와 있다”고 말했다. 시민사회와 유족들이 끊임없는 두드림 끝에 문이 열린 셈이다. 2020년까지 이 일대에 추모공원이 조성되면 당시 역사를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생길 것으로 전망된다.

김 이사장은 행불인협의회에게 당시 대전으로 끌려온 제주지역 수감자들의 명단 공유를 요청했다. 이중홍 행불인협의회장은 이에 화답하며 곧바로 논의에 들어가겠다는 답을 건넸다.

어두웠던 하늘이 서서히 맑아지고 있었다. 행불인 유족들의 얼굴에도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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