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형무소 순례] (3) 가창댐 학살터에서 만난 유족들

 

KakaoTalk_20160619_093426626.jpg
▲ 18일 가창댐을 찾은 행불인협의회 유족들. 지금은 물이 가득 채워진 댐이지만 한국전쟁 당시에는 1만명이 학살당한 곳이다. ⓒ 제주의소리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협의회의 전국 4.3유적지 순례 마지막 날인 18일.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남한 최대 민간인 학살터로 꼽히는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가창골을 찾았다. 지금은 거대한 댐으로 물이 가득 들어찬 이곳은 1950년 7월 군경에 의해 민간인 1만여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1959년 준공됐고, 1986년 확장공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댐 높이는 45m, 댐마루 길이는 260m에 이른다. 1144만㎡의 규모로 현재 대구시민들의 상수원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 묻힌 희생자 중에는 4.3 당시 대구형무소로 끌려갔던 제주도민들도 다수 포함돼있다. 4.3 당시 대구형무소로 향해야 했던 제주도민은 499명으로 추산된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당시 이 곳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로 가득 찬 댐을 바라보던 김필문(71)씨는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당시 중산간 마을 제주시 영평동에 살던 김씨의 아버지는 죄도 없이 잡혀 대구형무소로 이송됐다. 단지 중산간 마을에 살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아버지 없이 살아온 세월이 한이 맺힌다. 김씨는 “아버지 없이 춥고 배고프게 지냈는데 그 고생은 말할 길이 없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저 ‘안됐구나’라고만 생각하지 그 심정을 모른다”며 “가슴이 너무 아프고 뭉클하다. 가슴 속에 뭐가 가득차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러움이 치솟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국가가 좋은 것만 내세우고 나쁜 것은 숨기려고하면 안된다. 바로 알게끔 교육이 돼야 한다”며 “인권이 소중하다는 것을 교육을 통해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것이 가창댐 학살터를 바라보는 정부의 시선은 차갑다. 이명박 정부들어 과거사위원회가 폐지됐고 그 이후로 이와 같은 유족들의 억울함을 달래거나 그 역사적 사건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다룰 조직들은 전무하다.

김씨는 말없이 댐에 가득찬 물을 바라봤다. 이 애타는 마음을 누가 달래줘야 할까.

 

KakaoTalk_20160619_093340015.jpg
▲ 18일 가창댐을 찾은 행불인협의회 유족들이 제를 올리고 있다. 지금은 물이 가득 채워진 댐이지만 한국전쟁 당시에는 1만명이 학살당한 곳이다. ⓒ 제주의소리

“그저, 평생 엎드려서만 살았다”

 

반가운 손님이 이들을 찾았다. 채영희(72) 대구 10월 항쟁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장이다. 이들은 손수 떡을 준비해왔고, 행불인협의회 유족들과 함께 제를 올렸다.

채 회장의 아버지는 1946년 미군정의 극단적인 양곡 배급 정책의 실패와 친일파 등용 등에 맞서기 위해 대구에서 일어난 민중 항쟁인 ‘10월항쟁’에 참여했다 이곳으로 끌려와 목숨을 잃었다. 대구에서도 제주와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 큰 상흔을 겪은 셈이다.

당시 이 가창댐이 생기기 전 가창골에서는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피가 넘쳐 수km 떨어진 곳까지 핏물을 이뤄 흘러갔다고 한다.

채씨는 “밥을 달라고 한 것이지, 우리 아버지들은 빨갱이가 아니었다. 죽어가면서도 사상적으로 이상한 소리를 한 게 아니었다. 그저 정권의 야욕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에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으로 내몰린 것”이라며 “이분들이 모두 살아있었다면 대구의 역사가 바뀌고,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의 가족들이 이후에 겪은 삶은 4.3유족들과도 비슷했다.

채씨는 “연좌제로 묶여 공무원도 못하고, 진급도 못했다. 그저 엎드려서만 살았다. 평생 이렇게만 살았다”고 하소연했다. 실제로 현재 당시 유족들 사이에는 유복자가 많고, 남편을 잃은 아내는 자식들과 함께 힘겨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세상이 바뀌었고, 이제 추모제도 열리지만 사실 제대로 해결된 것은 없다. 정부에서는 발굴 지원에 나서지 않고 있으며, 이곳에 위령비를 설치하는 등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하기 위한 노력도 벌이지 않고 있다. 역사적 재평가도 받지 못하고 있다. 채 회장이 한이 맺힌 이유다.

_MG_0658.JPG
▲ 가창골을 향해 '아버지'를 외치다 울음이 터져버린 유족들. 가운데 흰 상의가 채영희 대구 10월 항쟁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장이다. ⓒ 제주의소리

행불인협의회 유족들과 그들은 고향은 달랐지만 현대사의 큰 상처로 함께 연결돼있었다. 몇 년만에 만났지만 그가 남 같지 않고 반가웠던 이유다.

말을 멈춘 채 회장이 가창골을 향해 ‘아버지’를 세 번 외치자고 제안했다. 유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아버지!...아버지!”

 

그들의 외침이 댐을 가득 울렸다. 갑자기 유족들 사이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막을 수가 없었다. 수십년 천추의 한이 눈물을 타고 세상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가 차분히 말했다. “옛날일이라 이젠 어쩔 수 없다. 이제 어쩌겠냐고, 그렇게 하면 안된다. 아버지들을 위해서라도 떳떳하게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아버지들은 훌륭하신 분들이다. 멋진 분들이셨다.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으셨다. 그걸 믿고 용기를 잃지 말자”

채 회장은 곧 배웅을 하고 행불인협의회와 가창댐은 멀어져갔지만, 그의 말은 가슴 깊숙히 박혔다. 이후 일정으로 봉하마을을 찾았을 때도, 제주를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유족들은 자리에 앉을 때면 저 먼 발치를 가만히 바라봤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