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숨길을 다녀오다
불의 숨길을 다녀오다
  •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news@jejusori.net)
  • 승인 2020.10.05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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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6)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간에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를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편집자]  
사진=(사)제주올레.
출생부터 남다른 ‘불의 숨길’은 기회가 있을 때만 걸을 수 있다. 자연을 조금이라도 해칠 수 있는 사람의 발길로부터 철저히 보호돼야 하기 때문이다.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그 길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신비롭고, 황홀하고, 고요했다. 그 길을 걸을 수 있어서 정말이지 직립보행하는 인간으로서 행복했다. 정겨운 마을과 바다를 지나고 간혹 오름도 오르는 올레길과도 다르고, 내가 최근 몇 달 사랑에 빠졌던 한라산 둘레길과도 달랐다. 9월 9일부터 9월 20일까지 딱 열하루간 대중들에게 공개된 ‘불의 숨길’ 이야기다. 

불의 숨길은 출생 배경부터 남다른 길이다.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거문오름 부근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이곳 주변에서 일하는 자연유산해설사들, 선흘 덕천 김녕 행원 월정리 등 이 일대 마을 주민들과 세계유산축전 사무국이 찾고 이어 개척하고, (사)제주올레 탐사팀이 도보여행길의 노하우를 입혀 탄생한 길이다. 한마디로 부모가 여럿인 길이다. 

남다른 출생 배경만큼 길의 운명도 남다르다. 이 길은 세계자연유산축전 기간 동안만 대중들에게 공개된 뒤에 다시 모든 길 표식을 떼어내고 대부분의 구간이 출입통제된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지구이자 문화재청 보호 관리 지역이므로, 자연을 조금이라도 해칠 수 있는 사람의 발길로부터도 철저하게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칠월 칠석날에만 만나야 하는 견우와 직녀처럼, 이 길을 사랑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기다려야만 다시 걸을 수 있게 되려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만사를 다 제쳐두고, 개방 기간 동안에 여러 차례 이 길을 찾아 걸었다. 비 오는 날도, 햇살 눈 부신 날도,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날도 있었지만, 길의 아름다움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날씨에 따라 느낌이 달랐을 뿐. 

”용암이 개척하고 숲의 정령이 완성한 길, 용암길“

사진=(사)제주올레.
세계자연유산축전 기간 열리는 거문오름으로부터 월정리까지 약 21km 길이 3개 구간으로 ‘불의 숨길’은 ‘용암길’, ‘동굴길’, ‘돌과 새 생명의길’로 나뉘어 개최됐다.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이번에 처음 공개된 ‘불의 숨길’은 모두 3개의 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그중 첫 구간의 이름은 ‘용암길’. 축전 팸플릿에는 이 길을 ‘용암이 개척하고 숲의 정령이 완성한 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 이 길을 걸으면서 그 표현이 기막히게 들어맞음을 실감하고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는지 모른다. 

사진=(사)제주올레.
자연 앞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어느 탐방객의 말처럼 경이로운 제주 자연을 만나볼 수 있었다.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세계자연유산센터 부근 거문오름 산책로 입구에서 조금 내려가다 보니 ‘용암길’ 입구가 나온다. 입구에서부터 거대한 용암이 흘러내려 가면서 파놓은 거대한 계곡이 입을 떠억 벌리고 탐방객들을 맞이했다. 마스크를 쓴 채 거리를 두고 걷는 탐방객들이지만, 휘둥그레 뜬 두 눈에서 감탄과 경이로움을 서로 확인하곤 했다. 제주 한라산에서 시작된 거대한 용암의 분출이 중산간을 훑고 지나가면서 어떻게 거대한 동굴과 계곡을 만들어냈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한 탐방객이 마스크 안에서 탄성을 내지르면서 ‘아. 정말 자연 앞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야. 먼지나 다름없어’ 중얼거린다. 뭐 난 먼지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지만, 자연의 위대하고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실감하기는 매한가지다.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용암이 개척하고 숲의 정령이 완성한 용암길.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동굴이 무너지면서 생긴 붕괴도랑을 지나, 천연 에어컨이라는 바람이 나오는 풍혈을 지나, 숲의 정령들이 만들어놓은 천연 정원이 계속 이어졌다, 영화 아바타의 한 장면으로 걸어들어온 듯한 거대하고 은밀한 숲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끝나고, 갑자기 현무암 빌레가 깔린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난다. 그리곤 ‘짜잔’ 하듯 놀랍게 나타나는 물 고인 습지. 그 습지 안에 설치된 작가의 작품이 탐방객들을 맞는다. 이 코스에서 마지막으로 우리를 맞이한 건 대형동굴, 웃산전굴이다. 대체 우리는 어느 시대에 있는 걸까, 한동안 시간을 잊어버린 4.8킬로미터의 길. 세 시간 만에 종점 부스에서 들려오는 행사 관계자들의 소리에 비로소 세상으로 돌아왔다.

”동굴 길, 그 끝없는 심연 앞에서“

사진=(사)제주올레.
불의 숨길 두 번째 구간인 ‘동굴길’에서는 이름 그대로 동굴이 많이 나타난다. 북오름굴, 대림굴, 만장굴 등 각양각색의 동굴이 입을 벌리고 탐방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사진=(사)제주올레.
불의 숨길 두 번째 구간인 ‘동굴길’에서는 이름 그대로 동굴이 많이 나타난다. 북오름굴, 대림굴, 만장굴 등 각양각색의 동굴이 입을 벌리고 탐방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두 번째 구간은 동굴길. 첫 코스의 종점에서 아스팔트 도로를 건너면 곧바로 두 번째 길이 시작된다. ‘불의 숨길’ 전 구간에 걸쳐서 동굴들이 흩어져 있는데도, 이 두 번째 구간을 ‘동굴길’이라고 이름 붙인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구간에는 유난히도 동굴이 많이 나타났다. 지상에 노출된 다리 형태가 뚜렷한 용암교를 시작으로 북오름굴, 대림굴, 만장굴 3입구가 잊을 만하면 탐방객들 앞에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굴들은 모두 형태도, 주변 풍광도, 굴의 깊이와 너비도 다 달랐다. 같이 걷던 한 초등학생이 연발 탄성을 내지르는 걸 뒤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불현듯, 만장굴 3입구를 발견하는 일에 동참했던 김녕초등학교(당시에는 김녕국민학교) 어린이 동굴 답사대 30명이 떠올랐다. 

사진=(사)제주올레.
故 부종휴 선생은 1940년대 후반 제주 구좌읍 김녕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뒤 학생 30여 명으로 구성된 동굴 탐사대를 발족시키고 탐방에 나서 처음 만장굴을 발견했다.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제주 최고의 보물로 꼽히는 유명한 만장굴을 전체적으로 답사해서 세상에 알린 인물은 제주 출신 초등학교 교사 고(故) 부종휴(1926-1980) 선생이다. 그는 제주에서 나고 자란 토종 제주인이자 제주의 자연과 식생, 지질 전반에 대해 한없이 경외와 호기심을 지닌, 당대 최고의 재야 생태 지리 식물학자였다. 그는 한라산을 삼백 번도 더 넘게 오르내리면서 한라산의 식물을 330종이나 학계에 보고해서 이름을 등재시킨 한라산 식물들의 어머니였다. 그런 그가 해방 직후인 1940년대 후반에 동굴과 오름 군락이 산재한 구좌읍 김녕초등학교로 발령이 난 것은 신의 섭리, 신의 뜻, 내 식으로 풀이하자면 ‘제주 동굴의 존재를 만방에 알리려는 제주 설문대할망의 인사발령’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학교에 부임한 뒤 당시 초등학교 학생 30명으로 구성된 ‘동굴 탐사대’를 발족시키고, 그들을 데리고 주말마다 동굴 답사에 나섰다. 주민들에게 얻어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의 지질학적 지식과 호기심을 총동원해서, 나선 답사였다. 물론 지금처럼 헬멧도 탐조등도 지질 탐사기가 전혀 동원되지 않는, 과학기술의 도움 없이 ‘맨땅에 헤딩하는 식’의 답사였지만, 그래도 분야별로 네 분야로 세분된 나름 과학적인 답사였다. 그 결과 그 긴 구간이 다 초등학교 학생과 교사들에 의해 조사되었고 마침내는 ‘만장굴’이라는 부종휴 선생이 작명한 이름에 따라 세상에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 알다시피 제주 용암 동굴계가 한라산, 성산 일출봉과 더불어 유네스코가 인증한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는 데에는 그 시작점에 만장굴(최후 방점을 찍은 건 ‘불의 숨길’ 제3구간에 있는 용천굴, 당처물 동굴이지만)이 있었던 것이니, 부종휴 선생과 아이들의 애씀이 어마어마한 결실을 이룬 게 아니고 무엇이랴. 나는 3입구의 깊은 아가리를 내려다보면서 그때 그 초등학생들의 안부가 궁금했다(행여 혹시라도 이 글을 보는 분 중에 김녕초 동굴 답사대였던 분이나 그분의 자녀 친척분이 있으시면 연락해 주시길). 

사진=(사)제주올레.
부종휴 선생과 답사에 나선 아이들 덕분에 유네스코가 인증한 세계자연유산으로 제주 용암 동굴계가 등재되는 시작점인 만장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그 길 후반부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들 대신에 갑자기 짜잔하고 다정한 밭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녹색으로 펼쳐진 그 밭작물은 알고 보니 콩. ‘콩밭 매는 아낙네야’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면서 걸음직한 그 길은 동네 주민들의 사유지 콩밭 한 이랑을 베어내고 걸어갈 수 있도록 배려한 구간이었다(올레꾼들이라면 올레길에서도 가끔 이런 구간들을 만난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한 콩밭을 건너고, 또 다른 콩밭 두 군데를 건너니, 김녕마을에서 조성해놓은 옛길이 나온다. 굿당터들도 여럿이고, 방사탑도 있는, 걷기 좋은 풀 길이다. 그 길 끝에 다다르니 만장굴을 소개하는 방송 소리가 들린다. 아, 2구간 동굴길 종점인 만장굴에 드디어 이르렀다. 공원 입구에는 독특한 부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한쪽에서는 부종휴 선생이 동굴에서 걸어 나오고, 반대편 쪽에서는 아이들이 걸어 나오는 부조*다. 그들에게 고맙다고 눈인사를 건네면서 8.9 킬로미터의 동굴 길 여정을 끝마쳤다. /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부조: 조각에서, 평평한 면에 글자나 그림 따위를 도드라지게 새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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