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가게, 고치가게] (9) 제주시 이도1동 ‘충옥당표구사’ 구봉식 장인

창간 17주년을 맞은 [제주의소리]가 오랜 기간 제주 곳곳을 지키며 이어온 공간과 인물을 소개하는 연중 기획 [이어가게, 고치가게]를 2021년 시작합니다. 오래된 점포(老鋪)와 그 속에 숨은 장인(匠人)들이 소개됩니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고 미래의 나침반입니다. 제주의 기억을 이어가고 앞으로도 함께 지켜감으로써, 제주의 미래를 같이 가꾸고 조명하자는 취지입니다.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이야기는 제주 현대사를 관통하는 타임캡슐과 같습니다. 이들의 기억을 공유하는 일이 제주의 오늘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주춧돌이 됐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충옥당표구당 구봉식 장인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충옥당표구사 구봉식 장인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제주시 동문시장부터 오현단을 거쳐 삼성혈까지 이어지는 가파른 언덕길. 이 거리에서 느껴지는 예스러운 분위기는 양쪽에 자리잡은 표구사와 화랑, 필방에서 나온다. 오래된 알루미늄 섀시문 너머로 보이는 글씨와 그림, 필구와 화구는 짙은 예향(藝香)을 풍긴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미색건물 안에는 수십 개의 작품이 벽에 걸려있고, 병풍들이 벽을 기대고 있다. 백발의 장인은 한참동안 작업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손만 바삐 움직인다. 이 표구사의 이름은 ‘충옥당(忠玉堂)’. 

한평생 표구(表具)일을 천직으로 살아온 구봉식(69) 장인이 이 곳의 주인이다. 글씨와 그림의 마침표, 그는 50여년째 작품에 옷을 입히는 또 하나의 예술을 펼치는 표구 장인이다. 

충청도 산골의 소년은 가난을 벗으려 18살에 상경해 표구를 배웠고, 10년만인 20대 후반에 인연이 닿은 제주에 터를 잡아 벌써 41년째 글과 그림에 옷을 입히고 집을 지어주고 있다.   

제주시 오현길에 위치한 충옥당표구사. ⓒ제주의소리
제주시 오현길에 위치한 충옥당표구사. ⓒ제주의소리

가난 싫어 상경한 소년, 제주와 인연 맺다

6.25 직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난 소년은 농사도, 가난도 싫었다. ‘기술을 하나 배우면 설마 밥이야 못 먹겠냐’는 마음으로 상경했다. 서울에서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배우며 일을 했다. 18살, 서울살이 중 그는 ‘표구’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그림이나 글씨에 종이, 나무, 비단과 장식으로 족자, 액자, 병풍을 통해 온전한 한 작품의 마무리를 짓는 일. 흡사 작품에 옷을 입히고 집을 지어주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 기묘하고 신비로웠다. 

1970년대 인사동과 아현동의 표구사에서 일을 하던 그는 유독 제주에서 온 사람들과 자주 마주쳤다. 아끼는 작품을 소포로 보내 표구를 부탁하는 사람, 배접 기술을 가르쳐 달라는 사람 중 유독 제주도민이 많았다. 제주 출신 서예 대가 해정 박태준 선생은 그가 일하던 표구사의 단골손님이었다. 운명처럼 제주에 이끌린 그는 ‘3년만 딱 있어보자’는 생각으로 1979년 아내, 삼남매와 함께 제주로 향했다. 

제주시 오현길에 가정집으로 쓸만한 공간이 달린 자그마한 점포를 찾았다. 이듬해 1월 그의 표구사가 문을 열었다. 간판은 ‘충옥당’. 충청도 출신인 그에게 고향도 부모도 잃지 말라는 의미와 함께 부르기도 좋고 외우기도 좋은 이름이 필요하다며 해정 선생이 지었다.

그는 가난이 싫었기에, 또 다섯식구의 가장이기에 악착같이 일했다. 

그의 강점은 목공을 함께 다룰 줄 안다는 것. 작품의 틀이 될 나무를 직접 고르고 손질했기에 그의 결과물에 완성도가 높아졌다. 충옥당을 거쳐간 작품들이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게 됐다. 종종 쓴소리도 들었지만 그는 채찍질로 받아들이자고 마음먹었다. 

충옥당표구사 구봉식 장인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충옥당표구사 구봉식 장인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표구라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예술인들은 연필 끝, 붓 끝으로 세계를 보고 우주를 움직이다시피 작품을 씁니다. 그런 분들인데 얼마나 날카롭고 보는 눈이 세겠어요. 저희들은 그 작품을 가지고 안방손님을 만들어야 하는데 한 마디로 옷을 입히는 일입니다. 잘못하면 먹이 필 수도 있고, 물감이 필 수도 있습니다. 잘못하면 찢어지거나 구겨질 수도 있습니다. 표구는 어떻게 보면 작품의 얼굴인데, 안방손님이 이것을 갖다 걸었을 때 우리가 표구를 잘못 했을 적엔 사람들이 쳐다볼 때마다 욕을 먹습니다. 잘 나오면 좋은데 그렇지 않을 땐 실패죠.”

작품과 가장 어울리는 나무와 형태를 고르고, 틀을 짜고, 화선지를 물에 축여 조심스레 표접을 하는 모든 과정은 흔들림없는 몰입과 섬세한 손끝을 필요로 했다. 어느새 입소문을 탔다. 그는 단골들이 자발적으로 소문을 내주는 소위 ‘선전부장’ 역할을 해줬다며 연신 감사하다고 말했다.  

작품 복원도 충옥당의 주 과업이었다. 제주 미술계의 큰어른인 양창보 전 제주대 미술학과 교수의 작품을 복원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다. 한 번은 양 선생 집에 불어나 많은 작품이 불에 그슬리자 그를 찾았단다. 그는 몇 날 며칠 심혈을 기울여 80여점을 복원해냈다. 그가 가장 뿌듯하게 여기는 기억 중 하나다. 제주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가중요민속자료 내왓당 무신도, 제주가 낳은 세계적 서예가 소암 현중화 선생의 작품도 그의 손길로 새 생명을 얻었다.

작품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이들, 작품의 집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충옥당을 찾았다. 집집마다 여러 개의 병풍이 꼭 필요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재일교포들도 그의 표구당을 즐겨찾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가 표구거리로 불리는 이 곳의 전성기였다.

구봉식 장인의 도구들. 곳곳에 깃든 세월이 흔적은 1980년부터 이어진 충옥당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제주의소리
구봉식 장인의 도구들. 곳곳에 깃든 세월이 흔적은 1980년부터 이어진 충옥당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제주의소리

3년만 머물려던 충청도 청년, 제주가 평생 고향이 되다

표구사와 화랑, 필방이 자리한 오현길. 한 번도 이 자리를 떠난 적이 없기에 세월의 흐름이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요 동네에서 젊은 사람이라고 해봐야 56, 57세이고 거의 70, 80살”이라고 그는 말했다. 과거 ‘병풍하나 잘 하면 기술자 한 달 월급’이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젊은 사람이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사양업종이 됐다. 이는 충옥당도 마찬가지다.

“아쉬운 거라면 젊은 사람들이 배워서 활성화시키고 문화사업도 하면 좋은데 그게 어려워요. 과거 이 곳을 문화의 거리를 만들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 그게 쉽나요. 문화사업이라는 게 먹고살게끔 돼야 합니다. 표구사와 화랑 가지고만은 문화의 거리가 안됩니다. 제주 탕건과 갈옷같은 것은 물론, 전시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장사가 안되니까 활성화가 안됩니다. 1년에 작품 하나 팔리지 않으면 뭘로 먹고 살란 말인가요.”

언제까지 표구당을 운영할거냐는 물음에 그는 앞으로 길게 봐야 5년이지 않겠냐고 답했다. 그는 “은퇴할 나이가 되면 해야되지 않겠냐”면서도 “평생 걸어왔는데 더 붙들고 있다고 해서...”라고 말 끝을 흐렸다. 쓴 웃음이 그의 입가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반백살 50여년을 외길을 걸어왔지만, 대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안타까움은 내내 그의 가슴을 후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표구문화의 한 자락이 사라져가는 순간이다. 

옥천당표구사의 구봉식 장인이 본인이 직접 표구를 한 병풍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화가 도촌 신영복 화백의 작품 아래 비단을 붙여 만들었다. ⓒ제주의소리
충옥당표구사의 구봉식 장인이 본인이 직접 표구를 한 병풍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화가 도촌 신영복 화백의 작품 아래 비단을 붙여 만들었다. ⓒ제주의소리

그는 인터뷰 내내 소탈한 웃음을 지었다. 충옥당만의 강점이 뭐냐는 질문에도, 솜씨가 빼어난 것 같다는 얘기에도 연신 “그것은 작가분들이 평을 하는 것”이라며 답을 하지 않았다. 미소를 짓는 그의 뒤엔 ‘노력은 천재를 앞지른다’는 한곬 현병찬 선생의 글씨가 걸려있었다.

“자기 집을 찾아주시는 것, 그게 제일 고마운 거 아닙니까. 잘못한 건 꾸중듣고 거기에서 발전이 되는 거고 또 맘에 들어서 고마워하고 잘해주실 적에 저도 고마운 거고. 어쩌다 실수 한 번 해도 이해해주시고. 그런 것들이 다 음으로 양으로 서로 돕고 사는 행복이라고 봅니다. 누구 혼자 잘난 것이 아니고 다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의 덕은 온다고 봅니다.

그 동안 도민들이, 작가 선생님들이 많이 도와주니까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면서 살 수 있었어요. 덕분에 빈 손으로 제주도 와서 이 건물 하나 장만했습니다. 그리고 애들 시집장가 다 보내고. 그거면 된 거지 뭘 더 바라겠습니까? 하하. 그걸로 행복을 느끼고 만족을 느껴야지요.”

제주시 동문시장과 삼성혈을 잇는 오현길에 위치한 충옥당표구사. 40여년째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제주의소리
제주시 동문시장과 삼성혈을 잇는 오현길에 위치한 충옥당표구사. 40여년째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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