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가게, 고치가게] (10) 제주 한림읍 한림리 ‘신라이용실’ 임영삼 장인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오랜 기간 제주 곳곳을 지키며 이어온 공간과 인물을 소개하는 연중 기획 [이어가게, 고치가게]를 2021년부터 이어오고 있습니다. 오래된 점포(老鋪), 또는 숨은 장인(匠人)들을 소개합니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고 미래의 나침반입니다. 제주의 기억을 이어가고 앞으로도 함께 지켜감으로써, 제주의 미래를 같이 가꾸고 조명하자는 취지입니다.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이야기는 제주 현대사를 관통하는 타임캡슐과 같습니다. 이들의 기억을 공유하는 일이 제주의 오늘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주춧돌이 됐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이거 50년 넘은 빗이에요”

흰색 가운 앞주머니에 꽂혀있는 윤기 나는 흑색 빗은 그의 오랜 동료다.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 호텔 이용실에서 일했을 때, 다시 고향 한림에서 가게를 열었을 때도 함께했다. 이발소 곳곳에는 세월의 흔적을 짐작케 하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반세기도 훨씬 넘은 60여년을 이발사로 살아온 임영삼(81, 신라이용실 대표) 장인. 첫눈에 보기에도 반듯한 흰 가운 차림과 말끔한 가위질에서 장인의 품격이 읽혔다. 벌써 50년 넘게 사용해온 빗의 곧은 빗살처럼 그는 늘 반듯한 옷매무새와 이발 솜씨로 손님들에게 각인되어온 이발 장인이다. 

한때 유명 특급호텔들에서 십수년 일했던 소문난 이발사였던 그이기도 하다. 그 인연으로 지금도 제주시와 서귀포시뿐만 아니라 서울은 물론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미국, 캐나다 등 외국에서 이곳 한림읍 신라이용실까지 찾아오는 그만의 VIP 손님들이 있을 정도다.  

1942년생으로 여든이 넘은 그에게 처음 이발사의 길로 들어설 때를 물었다. 60여년 전, 그의 10대 시절 이야기로부터 시작됐다. 

신라이용실 임영상 장인. 그가 손에 들고있는 빗은 사용한 지 50년이 넘었다. ⓒ제주의소리
신라이용실 임영삼(81) 장인. 언뜻 팔순을 넘긴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오른손에 쥐고 있는 빗만 해도 사용한 지 벌써 50년이 넘었다. 누군가 그랬다. 이발은 빗이 하고 가위는 거드는 것이라고.  ⓒ제주의소리

  지독한 가난 탈출하려 선택한 길

“어릴 때 집안이 굉장히 가난했어요. 부모님이 저희 7남매를 키우느라고 굉장히 고생하셨어요. 아버지는 작은 배로 고기잡는 어부였고 어머니는 바다에 나가는 해녀이면서 밭에 농사도 지었어요. 등허리에 바구니를 지고 삼십 분을 걸어서 어머니에게 밥을 가져다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는 지금 식사할 틈이 없다고 나무 그늘에 두고 빨리 집에 돌아가서 동생들 챙기고 학교에 가라고 했습니다.

학교에 갔다오면 저녁밥 지어드리고, 아버지가 고기를 잡고 난 뒤 밭에 가면 잡은 생선들을 추려서 시장에 가서 팔아야 했어요. 날이 좋을 때는 어머니가 팔러 가시지만, 날이 나쁘거나 어머니가 몸이 아프시면 제가 바구니에 고기를 담아서 시장 입구에서 생선을 팔곤 했습니다. 시장에 갔다오면 일과가 끝난게 아니라 그 때는 수도가 없을 때니까, 다시 항아리에 물을 길어다 놨어요. 지독하게 가난한 시절이었어요.”

7남매 중 다섯째였던 그는 돈 벌러 다른 지역으로 떠난 형과 누나를 대신해 부모님 일을 돕고 동생들을 돌봤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는 그에게 지인의 이발소에서 일해볼 것을 권했다. 고등학교를 갈 형편이 안되니 기술을 배우라는 의미였다.

낮에는 성실히 일을 배우고, 밤에는 이발사 면허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공책을 가득 채워가며 공부를 하고 또 했다. 위생학, 소독학에 관한 내용으로 필기를 하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시험 날 칠판에 적힌 문제를 보는 순간 술술 답을 적었다. 그를 포함해 동창 중에 딱 2명만 시험에 합격했다.

충실과 성실은 그의 모토였다. 연탄에 불고데기를 끼우고, 물에 식히고, 걸레를 닦으며 실력을 연마했다. 몇 년 뒤 한림읍 중심가에 본인의 가게를 열게 됐다. 단골손님들이 생기면서 자리를 잡았고 인연을 만나 가정도 꾸렸다.

제주 한림읍 한림리 골목 한 켠에 위치한 장인의 가게. 그가 12년간 일했던 호텔의 이름을 땄다. ⓒ제주의소리
제주 한림읍 한림리 골목 한 켠에 위치한 장인의 가게. 상호는 그가 12년간 일했던 호텔의 이름을 땄다. ⓒ제주의소리

설이든 추석이든 명절을 앞두곤 손님들이 쏟아졌다. 예전 다들 힘들게 살던 시절엔 한달에 한번 이발도 쉽지 않았다. 그러니 평상시 못한 이발을 명절을 앞둬 하려는 사람들로 이발소에 불어 꺼지질 않았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호롱불을 켜고 새벽 3시가 넘어서까지 일할 정도였다”고 웃으며 말했다.

누구나 평상시에 자주 미용실과 이발소를 찾을 수 있는 요즘에는 사라진 풍경이다.

성실한 그에게 불행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이발소 옆 가게 사장의 채무를 떠안게 된 것. 평소 순하고 착실한 인상이었던 그 사장은 농협에 대출을 받으러 가는데 보증이 필요하다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주저하지 않고 도장을 건넸다.

3년 뒤, 옆 가게 사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찾아와 힘겹게 꺼낸 얘기는 ‘문서 세 군데에 도장을 찍었다’는 고백과 ‘돈을 갚기 힘들어 독촉이 들어온다’는 말이었다. 그 당시 금액으로 3000만원에 이르는 큰 금액이었다. 

그의 집에도 빚 독촉이 들어왔고 한밤 중에 집안으로 신발을 신은 사내들이 쳐들어오는 일까지 있었다. 남의 빚을 떠안게 됐지만 원망만 할 순 없었다. 딱히 빚을 갚을 능력이 안됐던 옆 가게 사장이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라도 어떻게든 갚아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단골들로 운영되는 이발사 수입으로는 빚 상환은 턱도 없었다. 그렇게 그는 일본행을 택한다. 일본의 이발관에서, 공사장에서, 토목회사에서 막노동을 했다. 가족이 보고 싶고 몸도 힘들었지만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듣는 아내와 자식들 목소리가 유일한 힘이 됐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더 능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밤에는 가로등 밑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일부러 일본인들과 마주치며 일본어를 익혔다. 고난스런 시기였다.

임영삼 장인의 가게 곳곳에서는 세월의 흔적을 담은 도구들을 만나볼 수 있다. ⓒ제주의소리
임영삼 장인의 가게 곳곳에서는 세월의 흔적을 담은 이용 도구들을 만나볼 수 있다. ⓒ제주의소리

  실력 입증하니 사람들이 찾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일본어를 할 수 있던 덕에 그 시기 막 제주에 문을 연 특급호텔에 근무하게 됐다. 곧이어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호텔 내 이용실에서 다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그에게 커트와 면도를 한 번 받았던 VIP 고객들은 그를 주기적으로 찾았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손님일수록 그의 단골이 됐다. 12년을 이 곳에서, 5년을 또 다른 특급호텔에서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던 비결이다.

2005년 말 그는 고향 한림에서 지금의 이발소를 열었다. 한림 골목에 위치해 있지만 여전히 단골들은 멀리서도 이 곳을 찾는다. 오랜기간 다져진 기본에 충실한 솜씨와 태도가 그 원동력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손님들의 기분에 맞게 하는 것이에요. 머리 모양이 백이면 백 다 달라요. 그 모양에 맞게 디자인을 해야해요. 제가 그렇게 맞추면서 하니까 사람들이 좋아해주시더라고요. 사람들에게 맞는 헤어스타일을 만들어주면 참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또 그 분들이 몇 년 했느냐 물어보면서 솜씨가 좋다고 해주실 때, 그런 얘기를 해주실 때 기분이 좋지요”

손님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임영삼 장인. ⓒ제주의소리
손님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임영삼 장인. ⓒ제주의소리

  이발 장인의 가위질은 계속된다

그는 대화 사이사이 ‘나를 위해 와주는 분들이 있어 감사하게 일하고 있다’고 거듭 말했다. 그 감사함을 나누러 지금도 계속 성이시돌요양원에 매달 이발봉사를 나간다. 전 천주교 제주교구장 김창렬 주교 역시 한 달에 한 번 그에게 머리를 맡기는 대표적인 단골이다.

지금 그에게 있는 아쉬움은 그의 이용기술과 이 이발소를 이어갈 적임자를 찾지 못했다는 것. 그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후배를 양성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며 안타까워 했다. 그때까지는 쉽게 가위와 빗을 놓기는 힘들 것 같다. 

“건강이 제일 문제겠죠? 아직까지는 손도 안 떨리고 시력도 괜찮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그만 쉬라고 할 때 저는 쉴 수 밖에 없죠. 제 마음대로는 안되고 하느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겠죠. 건강할 때까지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임영삼 장인은 앞으로도 제자리에 서있을 것이다. 역사는 '오래된 것'에 깃들기 마련이다. 그는 빗과 가위에 세월의 때가 겹겹이 더 쌓이고 이마에 주름 한 줄이 더 그어질 때까지 이발소를 묵묵히 지켜낼 것이다. 장인의 오래된 것들에는 아름다운 역사가 있기에 눈부신 새것이라도 그것을 대체할 순 없다. 임영삼 장인의 가위질은 그래서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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