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가게, 고치가게] (11)제주 대정읍 ‘100번 쌀집’ 초경공예 장인 김석환 어르신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오랜 기간 제주 곳곳을 지키며 이어온 공간과 인물을 소개하는 연중 기획 [이어가게, 고치가게]를 2021년부터 이어오고 있습니다. 오래된 점포(老鋪), 또는 숨은 장인(匠人)들을 소개합니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고 미래의 나침반입니다. 제주의 기억을 이어가고 앞으로도 함께 지켜감으로써, 제주의 미래를 같이 가꾸고 조명하자는 취지입니다.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이야기는 제주 현대사를 관통하는 타임캡슐과 같습니다. 이들의 기억을 공유하는 일이 제주의 오늘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주춧돌이 됐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제주 모슬포 상가거리에 자리잡은 한 쌀집. 한쪽 벽에 걸린 아기자기한 짚신과 망태기, 삼태기는 차곡차곡 진열된 곡식들과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쌀도 팔고 풀로 엮은 갖가지 공예품들도 파는 신기한 쌀집이다. 쌀집 간판이 내걸린건 벌써 60년 전이다. 

팔순을 훌쩍 넘긴 노인은 말없이 바구니 엮는작업에 열중했다. 주름살 가득한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채 몇 시간이 지나도 집중력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김석환(85) 할아버지의 공방이기도 한 ‘100번 쌀집’의 풍경이다.

가난했던 시절 신발부터 생활용품까지 제주의 일상을 채워줬던 선물같은 신서란. 이를 묵묵한 인내로 조금씩 엮어내야만 탄생하는 예술. 어르신은 신서란 초경공예 장인이다. 젊은 시절엔 우체부 아저씨였다. 

김석환 어르신이 100번쌀집 안에서 신서란으로 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석환 어르신이 100번쌀집 안에서 신서란으로 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제주의소리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상가거리에 위치한 100번쌀집. 지금도 쌀을 팔고 있다. 이 곳은 김석환 어르신의 공방이자 작업실이기도 하다. ⓒ제주의소리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상가거리에 위치한 100번쌀집. 지금도 쌀을 팔고 있다. 이 곳은 김석환 어르신의 공방이자 작업실이기도 하다. ⓒ제주의소리

어르신의 공방이자 작업실이기도 한 이 곳은 모슬포 주민들은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만큼 유명한 '100번 쌀집'이다. 어르신이 쌀집에 있을때 그의 손엔 늘 신서란 줄기가 쥐어져 있다.

제주도에서 ‘신사라’라 부르는 ‘신서란’(新西蘭)은 열대성 다년생 백합과 식물이다. 난(蘭)의 일종이 아니다. 뉴질랜드의 한자식 표기가 ‘新西蘭’인데 생긴 모양이 난초와 닮아 헷갈려 한다. 원산지 나라 이름이 그대로 식물 이름이 된 것으로 뉴질랜드 삼(New Zealand Hemp)이라고도 한다. 

섬유질이 잘 발달한 잎은 질기고 잘 썩지도 않아 밧줄이나 직물 등을 만드는 데 쓰인다. 특히 소금기에도 강해 선박용 밧줄 재료로 제격이다. 제주도 곳곳에 흔해 마을노인들이 멍석이나 망태기를 만들때 안성맞춤인 재료로 사용됐다.  

마을 올레길에서 동네 꼬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팽치치기를 할때 세차게 후려치던 팽이채도 신서란 줄기 몇개를 잘라 막대기에 질끈 묶어 휘두르면 며칠이고 팽이놀이를 즐길 수 있었다. 

어깨너머 익힌 기술, 그 뒤로 70여년

1937년생 김석환 장인은 어린 시절부터 초경공예를 접하고 익혔다. 신발과 옷을 마음껏 신기에도, 적당한 옷감을 구하기에도 어려웠던 시절이다. 

“해방 후에, 어릴때부터 그 짚으로 조리 같은 걸 할아버지들이 만드는 걸 보고 배웠지. 그때는 고무신을 구하기 굉장히 어려웠거든. 옛날 할아버지들이 만드는 걸 한 번 보면 나는 했지. 13~14살때 신발을 만들어서 어머니께 신고 다니라고 드리기도 했었어.”

초경(草莖)은 풀과 줄기를 의미한다. 벼농사가 많지 않던 제주에서는 구하기 힘든 볏짚이 아닌 신서란(新西蘭, 뉴질랜드삼)으로 엮었다. 신서란을 가늘게 자른 후 말리고, 적셔 두드리고 다시 말리며 새끼줄의 형태로 뽑아낸다. 양 손바닥을 펴서 비벼 말아야 기초재료가 완성된다. 짧으면 하루종일, 길면 며칠을 집중해야 작품 하나를 만들 수 있다.

장인의 손 끝에서 탄생한 신서란 초경공예품. 100번쌀집 한쪽 벽에 전시되어 있다. ⓒ제주의소리
장인의 손 끝에서 탄생한 신서란 초경공예품. 100번쌀집 한쪽 벽에 전시되어 있다. ⓒ제주의소리

과거 제주 해안가 주변에서는 신서란이 많이 자랐다. 뉴질랜드에서 19세기 중국을 거쳐 제주에 전달됐던 아열대성 백합과 식물 신서란은 단단하고 짠물에도 작 삭지 않아 밧줄부터 망태기부터 테왁 망사리까지 널리 쓰였다. 밭에 씨앗과 거름을 뿌릴 때도 신서란으로 엮은 바구니가 요긴했다. 척박했던 시절 신서란은 제주도민에게는 매우 유용한 존재였다.

신서란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일은 긴 시간과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하다. 줄기를 가늘게 자른 뒤 말리는 작업을 반복하고 다 마르면 물을 적신 뒤 잘 두드려줘야 하는 정성이 든다. 하나하나 엇나지 않게 꼬고, 이를 다시 교차하며 고정하는 작업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다만 장인은 유난히 꼼꼼했던 덕에 자연스레 초경공예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의미는 자본의 관점에서는 생산성이 낮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수제품은 서서히 공산품에게 밀렸다. 플라스틱에게, 더 좋은 양질의 섬유에게, 고무와 나일론에게 자리를 뺏겼다.

김석환 어르신도 가정을 책임지느라 신서란을 한동안 손에서 놓아야 했다. 낮엔 우체국 집배원으로, 퇴근 후엔 아내와 함께 쌀을 배달하며 자녀들을 열심히 키웠다.

김석환 어르신의 아내는 1962년부터 100번쌀집을 시작했다. 전화번호 끝자리가 100번으로 끝나 붙은 이름이다. 이 사진은 1974년~1975년 사이 찍힌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60년째 백번 쌀집은 부부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 사진 제공=김석환 ⓒ제주의소리
김석환 어르신의 아내는 1962년부터 100번쌀집을 시작했다. 전화번호 끝자리가 100번으로 끝나 붙은 이름이다. 이 사진은 1974년~1975년 사이 찍힌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60년째 백번 쌀집은 부부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 사진 제공=김석환 ⓒ제주의소리

그는 오늘도 신서란을 엮는다

어르신이 다시 초경공예에 전념하게 된 것은 45세 때 우체국 집배원을 퇴직하면서부터. 나이 마흔을 훌쩍 넘겨 우체국을 그만두면서 그는 쌀을 파는 틈틈히 주민들에게 기술을 전파했다.

쌀집이 주업인지 초경공예가 주업인지 헷갈릴 정도였단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배우고 싶다는 사람들이 이어졌다. 그들과 함께 새끼줄을 꼬고, 기술을 전수했다. 제주 곳곳은 물론 서울에서도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은 있었다.

그러다보니 쌀집은 작업실이면서 전시실이 됐다. 100번 쌀집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이처럼 초경공예 장인으로서의 삶을 이끌어온 것은 오로지 그의 순수한 열정이다. 특별히 돈이 되는 것도, 누가 크게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만의 초경공예에 대한 자부심은 지금까지 어르신을 묵묵히 버티게 했다. 

“한 번 마음이 붙으면 그렇게 (계속)딱 하고 싶은 거지. 하나 완성되면 ‘아 좋다’하고 저리 걸어두고, ‘아 이거 다시 해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해요. 요즘은 늙어서 심심하니 하게 돼요(웃음)”

그러나 명맥을 이어가기에 현실은 쉽지 않다. 호기심에 찾아왔다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몇 일을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잦았다. 어르신은 "대정읍에서 초경공예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모두 6명이 있었는데 모두 떠나고 딱 둘만 살아있어. 근데 사실상 지금도 작업을 하는 건 나뿐이야"라고 하소연했다. 

그가 손을 놓게 된다면 오랜 시간 제주도민의 삶을 담아온 공예 예술이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오늘도 공방에 앉아 신서란을 엮는 그의 모습이 '고요한 분투'로 보이는 이유다.

“그냥 건강만 하면 누가 배워달라고 하면 후배양성도 하고 그럴 작정인데... 죽어지지만 않으면 하지. 죽어지면 못하는 거잖아?(웃음) 손님들에게 하고 싶은 말요? 힘이 닿는대로 만들어놓을 테니까 와서 하나씩이라도 사가셨으면 좋겠어요. 그거 말고는 할 말이 없어요”

김석환 장인은 1937년생. 올해로 만 여든다섯살이다. 그는 본인이 죽기 전까지는 신서란 초경공예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제주의소리
김석환 어르신은 1937년생. 올해로 만 여든다섯살이다. 그는 본인이 죽기 전까지는 신서란 초경공예를 계속하고 싶다며 수줍게 웃으신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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