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섬 제주] ② 조정자 아닌 갈등 주체로 선 행정, 고비마다 신뢰 상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갈등 현안이 터져나오는 제주사회. 혹자는 '갈등의 섬'이라는 오명을 덧붙일 정도로 제주는 갈등에 신음하고 있다. 대형 국책사업을 비롯해 지역단위 개발사업 등 종류도 다양하고, 최근의 갈등 양상은 단순 '이권' 다툼이 아닌 '가치관'의 충돌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무엇보다 갈등의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할 제주도정의 책임 역시 막중하다. [제주의소리]는 2022년 송년을 맞아 제주사회에 발생하고 있는 갈등의 양상을 되짚어보고, 이에 대한 해법과 주요 갈등 개선사례 등을 세 차례에 걸쳐 다룬다. [편집자주]

갈등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목표로 이해, 가치, 감정 등이 대치하는 상태를 뜻한다. 공공정책을 수립하거나 추진하는 과정에서의 '공공갈등'의 전개 과정은 대개 1단계 표출기, 2단계 심화기, 3단계 교착기, 4단계 해소기 등 네 가지 단계로 분류된다. 

표출기는 정책 혹은 사업계획의 공표와 이에 대한 이해당사자가 반발하는 단계다. 이전까지의 단계를 갈등 잠재기로 본다면 표출기에 접어들면서 이해관계자는 다양한 수단으로 사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조직 구성 등 구체적인 행동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갈등 발생 자체를 억제하지 못할 사안이라면 적어도 이 갈등의 표출기에서 잠재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델이다.

표출기에서 해결되지 못한 갈등은 심화기로 접어든다. 찬반의 입장이 엇갈리고, 추진기관은 법적·행정적 절차를 밟아나가는 시기다. 그 안에서 이해당사자 간 구체적인 이해 득실, 인식의 차이가 발생하면서 갈등이 확산되는 구조를 띈다.

심화기를 넘어서서는 교착기에 접어든다. 갈등관리 노력이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될 경우 진입하게 되는 최종 단계다. 이 시기가 되면 사업의 장기화는 물론, 해당 사업이 사회적 문제로까지 인식된다. 행정소송 등의 법적 분쟁으로 비화되는 경우도 발생하곤 한다.

이 교착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뒤따라야 할 해소기에 악영향을 미친다. 갈등은 언젠가 종료되기 마련이지만, 궁극적인 갈등 해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주민들의 격한 반대 속에서도 밀어붙인 제주(강정) 해군기지는 완공됐지만, 누구도 갈등이 종결됐다고 하지 않는다.

그만큼 행정의 갈등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행정은 사업에 대한 찬반을 떠나 갈등관리의 적극적인 중재자 내지는 조정자로서의 책무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제주의 사례를 되짚어보면 갈등이 표출기에서 해결되지 못한채 심화기로 확산된 데는 제주도의 과오가 상당했다. 중재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전에 스스로 갈등의 당사자 위치에 서기도 했다. 찬-반 양측의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진 제2공항 사례가 대표적이다.

2015년 11월 제주 제2공항 입지(성산) 발표는 매우 갑작스러웠고,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 시기 지역사회 누구도 정신적·시간적 여유나 형편을 돌아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실제 갈등의 표출기였던 사업 초기에만 해도 제2공항 간담회 자리에서 마을을 대표하는 이들의 요구는 '선진지 견학', '보상 담보' 정도였다.

이 시기 제주도는 앞다퉈 '만세'를 부르기에 바빴다. 제2공항 유치를 일대의 치적으로 내세우며 이미 사업의 주체자로 섰다. 곤란한 상황이 되면 "제2공항의 사업자는 국토교통부"라며 발뺌하는 현 시점과는 분명한 온도차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제2공항을 반대하는 이들은 제주도와 협의 테이블에 앉지 않았다. 제주도와의 협의를 거친들 "어차피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의식이 기저에 깔려있었던 탓이다. 중립적인 세미나 자리에서는 차분하게 의견을 경청하던 주민들도 행정기관이 가면 물병을 던지곤 했다.

행정이 스스로 신뢰를 저버린 것도 갈등해결을 더욱 요원하게 만들었다.

2018년 제주도는 해묵은 외국인 투자개방형 병원(영리병원) 논쟁을 끝내기 위해 '숙의민주주의 주민참여 조례'를 바탕으로 한 공론화 과정에 돌입한다. 가치 충돌의 지점을 공유하고, 도민 다수의 의견을 수합한다는 취지였다. 

숱한 논의를 거쳐 도민사회가 광범위하게 참여한 공론조사위원회는 '영리병원 불허'를 권고했다. 그러나, "도민의견을 존중하겠다"던 당시 원희룡 도정은 "위원회의 결정은 권고에 불과하다"며 영리병원 불허 결정을 정반대로 뒤집었다. 영리병원 논란은 아직도 법정 공방이 진행되는 등 장기전으로 치닫고 있다.

제2공항 갈등의 획기적 전환점이 될 수 있었던 공론조사 역시 제주도가 손바닥 뒤집듯 신뢰를 저버린 사례다. 제주도와 제주도의회 간의 협의 속에서 진행된 제2공항 공론조사 결과 도민사회의 반대 의견이 우세하다는 결과지를 받아들었지만, 제주도는 다양한 핑계를 늘어놓으며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행정'은 갈등관리에 있어 두고두고 잠재적 위협요인으로 작용하게 됐다.

찬반에 민감한 사안일수록 '비밀주의'에 빠지는 행정의 관행 역시 되짚어 볼 대목이다. 절차적 민주성, 정당성, 투명성 등이 확보되지 못한 사업은 추후에라도 탈이 나기 마련이었다. 정보의 접근이 제한적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현대사회에서 정보의 투명성과 주민 수용성은 무엇보다 우선시 되고 있다.

행정이 접근하지 못한 문제를 민간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도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제주도는 공공갈등을 원만하고 효율적으로 조정하기 위해 '갈등조정협의회'와 '사회협약위원회' 등의 기구를 운영하고 있다. 해당 협의회는 이해당사자를 비롯해 의회, 전문가 그룹 등이 참여해 갈등 사안을 논의하는 구조로 이뤄졌다.

그러나 이 기구 역시 어디까지나 '자문' 수준에 그쳐 왔다. 행정력을 담보하지 못한 논의는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애초에 해당 기구들은 찬반 갈등이 격렬한 의제 자체를 다루지 않았다. 사실상 유명무실했던 제도의 개편 필요성이 대두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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