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괸당] (1) 발달장애인 맘 편하게 거닐고, 부모는 편하게 쉴 수 있는 세상

지금 제주에서는 주민 주도의 일상 속 사회혁신이 진행 중이다. 꽉 막혀있던 코로나 팬데믹 시대, 제주시 원도심에서는 소통과 협력, 연결과 확산이 되면서 ‘새로운 괸당’이 탄생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시소통협력센터와 함께 지역사회에 큰 울림을 준 협력의 사례를 세 차례에 나눠 조명한다. / 편집자

발달장애가족들, 문화기획단으로 뭉치다

발달장애가족이 맘 편하게 갈 수 있는 곳만 모았습니다

[기사 수정=19일 21시 15분]

“저희는 아무 곳이나 잘 못 가요. 발달장애가족들은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주는 곳, 갔을 때 눈치가 안 보이는 곳을 반복적으로 가요. 그러다보니 가는 곳이 제한적이잖아요? 그러면 내가 가는 곳, 다른 가족이 가는 곳의 리스트를 모아서 같이 지도로 만들면 서로에게 갈 곳이 늘어나는 거잖아요? 제주에 여행 오는 발달장애가족들에게도 유용한 정보가 되겠다고 생각했어요”(김덕화 행복하게 협동조합 대표)

발달장애가족들이 모여 마음 편하게 갈 수 있는 제주지역 가게 정보를 지도에 담았다. 그래서 이름이 ‘맘 편한 가게 지도’다. 2022년 발달장애 가족이 이웃들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나누면서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주민들이 일상 속 문제를 발견하는 프로젝트인 제주시소통협력센터의 제주생활탐구를 통해 아이디어가 현실화됐다.

지도 제작 과정은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이기도 했다.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이 힘들었던 기억, 어떤 이유를 거쳐 특정 공간을 자주 가게 된 사연을 나눴다. 쉽지 않은 시간도 있었다. ‘지금까지 잘 갔는데 혹시 소개했다가 많은 사람이 가서 나도 못 가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은 경험에 나온 현실적인 문제였다. 어려움을 조금씩 넘고 마음을 보태다 보니 카페와 베이커리, 마트, 병원, 미용실, 학원, 숙소, 편의시설, 문화생활 등 총 10개 분야 73개의 가게 정보를 담아냈다.

행복하게 협동조합이 만든 제주 맘편한 가게 지도. ⓒ제주의소리
행복하게 협동조합이 만든 제주 맘편한 가게 지도. ⓒ제주의소리

편안한 공간에 목말랐던 발달장애가족들은 폭발적인 호응을 보냈다. 특히 “발달장애인들이 이렇게 공공장소에 가는 게 불편한 줄 몰랐다”는 얘기들을 들을 때 이 지도가 모두에게 큰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앞서 이들은 2021년 제주생활탐구로 제주아이 특별한아이에서 수행한 제주 중고등학교 특수학교의 교육환경 분석에 참여했는데 이것이 좋은 경험이 됐다. 당시 프로젝트 참가자들은 연구를 수행하며 학교를 직접 찾아가고, 인터뷰를 하고, 교사와 학부모들을 만났다. 그 결과 통계적으로 과밀한 곳이 많았고, 교육활동에 필요한 다른 공간들을 교실로 만들면서 아이들의 교육여건이 악화된 현실을 확인했다.

자발적으로 시작한 탐구는 점점 커졌다. 보고서를 통해 문제의식과 연구결과를 세상에 공개했고, 제주도의회에서 토론회를 열고 3시간 동안 뜨거운 논의를 이어갔다. 6.1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부모들은 ‘이제 정책을 제안해보자’는 의지까지 모으게 됐다. 교육감 후보들에게 특수학교 공간 부족 해결과 제주도 내 특수교육학과 신설을 제안하기로 하고 보도자료를 만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많은 언론들이 이 내용을 보도했고, 마침내 두 명의 제주도교육감 후보 모두 이들이 제안한 정책을 공약으로 채택했다. 연결과 협력의 힘은 강했다.

작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제주 장애인 부모들이 모여 정책제안 기자회견을 열었다. 두 교육감 후보 모두 이들의 정책 제안을 공약으로 받아들였다. ⓒ제주의소리
작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제주 장애인 부모들이 모여 정책제안 기자회견을 열었다. 두 교육감 후보 모두 이들의 정책 제안을 공약으로 받아들였다. ⓒ제주의소리

5명이 모여서 시작한 협동조합은 점점 커져 지역사회의 건강한 변화를 만드는 구심점이 되고 있다. 

“저희 아이만 보이고 힘든 것만 느껴졌는데, 여유가 생기면서 어린 아이를 키우는 어머님들께 알려주고 싶은 거예요. 물론 힘들죠. 하지만 기쁨이 더 많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고, 혼자서는 힘든데 같이 있으면 덜 힘들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어요. 저의 장점은 혼자 있는 사람을 잘 못 봐요. 그래서 (함께하자고)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는 거예요. ‘아 저 분도 그 때의 나처럼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요. 그렇게 한 명 씩 한 명씩 당기다보니 어느 순간 주변에 사람이 굉장히 많아지더라고요”(행복하게 협동조합 박정미 부대표)

이들은 자발적인 움직임을 뒷받침한 플랫폼의 역할을 강조했다.

“제주시소통협력센터라는 곳은 생각만 했던 것을 현실화시킬 수 있도록, 행동으로 이끌어내는 역할을 해주는 기관 같아요. 잘 안됐던 부분도 제가 포기하지 않고 협력을 통해서 성장해줄 계기를 마련해준 곳이 아닌가 싶어요.”(박정미)

“모든 과정에서 ‘이것은 탐구이고 실험이기 때문에 정해진 답을 갖지 않아도 괜찮다’고 해주시고, 뭔가 다른 결론으로 가더라도 그게 틀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가지면 된다고 얘기해주는 게 참 신선했어요. 저희의 생각을 더 확장하게 해주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의 마인드가 진심이고, 모든 과정에서 응원을 해주는 동시에 끝까지 잘 되게끔 관리를 해주는 과정을 통해 많이 배우고 더 많은 연대와 협력을 할 수 있게 됐어요”(김덕화)

행복하게 협동조합은 발달장애인을 위한 문화기획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제주의소리
행복하게 협동조합은 발달장애인을 위한 문화기획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제주의소리

발달장애 문화기획단을 자처하는 이들은 앞으로도 할 일이 많다. 발달장애가족들이 행복하게 일상을 살 수 있는 문화 활동들을 계속 만들어갈 계획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평범한 일상이다.

“시각장애인들에게 눈을 뜨게 하는 훈련을 시키지 않고, 지체장애인에게 서서 걸으라는 훈련을 하지 않죠. 시각장애인이어도 불편하지 않은 여건들을 만들고, 지체장애인이 잘 다닐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되거든요. 발달장애인도 마찬가지예요. 그간 우리 사회, 우리 교육은 발달장애 아이들의 사회성을 비장애 아이들의 어떤 태도와 유사하게 맞추려는데 집중돼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은 지금 맞지 않는 것 같고요, 우리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게 가장 좋아요. 뭘 대단한 걸 해주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그냥 우리 아이들이 그대로 살 수 있게 바라만 주면 좋겠습니다”(김덕화)

발달장애인 부모들에게는 ‘쉼’이 필요했다

발달장애아동 부모는 지금 쉬고 싶다

영송학교 황현철 교사는 ‘제주생활탐구라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지인의 소개로 삶의 문제를 발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장애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들이 어떤 부분에서 힘들고, 무엇이 필요할지 직접 160명을 설문조사하고 다섯 가정에 대해 심층인터뷰를 진행했다. 20년 경력의 특수교사였지만 결과를 보고는 머리를 무언가로 강하게 맞은 듯 했다.

“자녀와 떨어져서 본인이 가지는 시간이 없다고 답한 분이 대부분이었어요. 잠을 잘 못 주무시는 분도 많은데 수면의 질이 아주 우려될 수준으로 굉장히 나쁜 상태였어요. 또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도 가족들이 사회의 눈치없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응답이 많았어요. 이 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쉼의 시간이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롯이 집에서 쉬고 싶다 이런 시간이요.”

황현철 교사(왼쪽)는 제주생활탐구 프로젝트로 발달장애인 부모들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냈다. 다름아닌 쉼의 시간이었다. ⓒ제주의소리
황현철 교사(왼쪽)는 제주생활탐구 프로젝트로 발달장애인 부모들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냈다. 다름아닌 쉼의 시간이었다. ⓒ제주의소리

이 과정은 그에게 또 다른 물음표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물음표는 새로운 동력이 됐다. 동료교사들과 함께 봉사단체 이음을 조직한 이유다.

“제가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은 등교부터 하교 시간까지거든요, 그러면 아이들이 하교하고 난 이후에는 나는 나만 잘 살면 되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녁이나, 주말에 부모님들께 쉼의 시간을 주자, 그렇게 ‘이음’이 시작됐어요. 영화관람을 가면 3시간, 목욕탕을 가면 4시간, 오름을 가면 반나절 아이들과 함께 제가 시간을 보내면 부모님들은 그 동안 하고 싶은 걸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저 혼자 하다 보니까 한 달에 한 명 두 명만 만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가까이 있는 선생님들께 ‘내가 이런 게 고민이고 이런 활동을 하고 있다’고 얘기를 했고, 함께하는 선생님들이 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지금은 50명이 넘는 교사들이 모이게 됐죠.”

연결과 확장은 계속되고 있다. 작년에 그가 펴낸 에세이집 ‘poco a poco’[포코 아 포코]-‘조금씩 그리고 점점’에는 그가 20년 넘게 근무하면서 만났던 아이들, 부모들, 동료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이 책을 읽은 특수교사들은 아이들을 더 이해하게 되고, 그걸 읽은 부모님들은 특수교사들을 이해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특수교육의 현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그에게 발달장애가족들을 위해 시급한 것을 묻자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 얘기를 꺼냈다. ‘온전히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국가가 함께해달라’는 절박함은 교육자로서 그가 느낀 가장 중대한 문제다. 이를 위해서는 장애자녀를 둔 부모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24시간 돌봄센터’ 구축이 필요하다. 그와 동료들이 메우고 있는 틈을, 안정된 시스템으로 구현하기 위한 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 이 같은 변화가 가능할 지 고민하며, 글을 쓰고, 박사과정을 밟고, 다른 사람들과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삶으로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그는 더 많은 교집합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지난 몇 년 간의 연결의 경험에서 얻은 용기가 큰 자산이다.  

봉사단체 이음에 참여중인 교사들. ⓒ제주의소리
봉사단체 이음에 참여중인 교사들. ⓒ제주의소리

“저는 출근하면 교사들과 함께 살고, 퇴근하면 가정에 돌아갑니다. 이렇게만 살았다고 하면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 영역들, 사람들을 제주시소통협력센터가 연결해주고, 공감해주며 해결하기 위한 지원에 적극 나서고,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깨우침을 받는다고 할까요?

또 신기했던 경험은 어떤 문제가 나에게 해결하기 어려운 큰 문제였는데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보니까 ‘그것은 어떤 곳이 잘할 것 같은데요’ 하면서 다른 기관을 연결해주는 거에요. 또 반대로 저희에게 부모님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문의를 하면 저는 제가 하는 일이니까 ‘이럴 때는 이런 방법이 좋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나중에 유용했다는 피드백으로 돌아올 때 ‘이게 연결망의 힘이구나’ 하고 느끼게 됐어요.”


“지역의 문제와 가능성을 발견하고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협력한다”는 모토로 세워진 사회혁신 플랫폼 제주시소통협력센터는 공동체 혁신활동을 뒷받침하고 있다.

제주생활탐구는 주민들이 일상 속 문제를 발견하고 조사, 분석을 통해 진짜 제주의 문제인지 확인하는 ‘문제 재정의’ 활동이다. 동네책방의 새로운 콘텐츠와 자생 방안 모색, 세대를 이어주는 제주 방언 보전 프로젝트, 우도의 쓰레기 자원화, 가정폭력 피해자 돌봄 프로젝트 등 다양한 아젠다가 발견됐다.

제주생활실험은 제주에 살며 갖게 된 질문이나 겪고 있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해보는 프로젝트다. 긴급 돌봄이 필요한 상황에서 아이를 돌봐주는 프로젝트, 제주 농축수산물에 대한 소비자 접근성을 높이는 프로젝트, 일손 부족 친환경 농가를 위한 청년 농업인 대상 체험 프로그램 등 다양한 실험이 진행됐다.

또 제주생활공론을 통해 다양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 숙의의 과정을 경험하고 직접 캠페인을 실행하고 있다.

제주시소통협력센터는 이 과정에서 공통교육, 모니터링 등을 통해 질문과 관련한 리서치, 관련 전문가와 이해관계자와의 교류 등의 과정을 뒷받침했다. 정답이 아닌 결과 데이터를 얻는 과정으로 실험을 진행하도록 도왔고, 도출된 데이터와 시행착오 과정을 아카이빙했다.

* 새로운 괸당 기획 취재는 제주시소통협력센터의 취재지원과 협조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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