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다. 동아시아 해상의 요충지로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다. 이러한 천혜의 입지는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 제주를 지켜온 관방시설(방어시설)은 고려시대부터 설치돼온 환해장성(環海長城)과 조선시대의 읍성(邑城)・진성(鎭城)・봉수(烽燧)・연대(煙臺) 등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역사학자인 김일우 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는 이러한 제주의 관방시설에 주목한 논문 《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와 분포양상》을 최근 발표했다. 김 박사는 연대, 봉수 같은 관방시설에는 군사적 가치를 넘어 제주사람의 자생적 의지가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제주의소리>가 제주 관방시설에 주목한 김 박사의 글을 매주 2회(화·목), 총 6차례 연재한다. 본문에 '#' 표시된 각주 내용은 원고 하단에 별도의 설명을 달았다. [편집자]

▶글 싣는 순서 
①머리말
②제주 지역 첫 확인의 관방시설
③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 경위와 유형 : 읍성
④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 경위와 유형 : 읍성 이외
⑤제주 관방시설의 분포지형과 그 의미
⑥맺음말 

[조선시대 제주 방어유적의 의미] ⑤제주 관방시설의 분포지형과 그 의미
/ 김일우 (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5. 제주 관방시설의 분포지형과 그 의미

제주의 관방시설은 조선시대 들어와 그 수효도 상당수에 달했고, 제주도내에 걸쳐 산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된 데는 왜구의 잦은 침탈이 주요인이었지만,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제국주의 열강의 이양선 출몰도 영향을 끼쳤다. 제주의 관방시설은 지속적으로 설치・수축・이전과 아울러, 증치됐던 것이다. 

조선시대 제주의 관방시설을 유형별로 보자면, 읍성・진성・봉수・연대와 아울러,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었던 환해장성으로 나뉜다. 이들 가운데 환해장성은 전부가 해안가, 연대는 거개가 해안과 200m 내외의 거리에 들어서 있었다. 확인 가능의 36개소 연대 가운데 말등포연대가 해안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 거리가 550m 정도에 달한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거리라 하겠다. 환해장성과 연대가 설치된 곳은 전부 해안가에 마을이 이뤄져 있었거니와, 포구도 이들이 설치되지 않은 곳의 마을에 비해 꽤 규모가 큰 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요해처에 해당하곤 했다.

봉수의 경우도 22개소가 해발 200m 이하 해안지대의 오름에 설치됐고, 200m 이상의 중산간지대에 자리잡은 만조・호산・자배봉수의 3개소도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오름의 정상부에 위치한다. 또한 해안지대의 마을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이들 연대와 환해장성 및 봉수는 제주 해안에 접근하는 외부세력의 양상과 출몰지역에 따라 신축・보수・증치됐던 것이다. 그런 만큼, 제주의 연대・봉수가 설치된 것은 해안 일대 외부세력의 진입 상황 등과 관련한 동정과 동향을 살피고, 이를 알리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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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등포연대. 제공=김일우. ⓒ제주의소리

한편, 제주 지역의 연대와 봉수의 분포상을 보자면, 동・서로 걸친 이들의 배치 간격이 너무 빽빽하다는 감이 든다. 또한 연대와 봉수에는 각각 烽軍(봉군)과 煙軍(연군)이 배치됐다. 그럼에도 제주의 연대와 봉수가 역사적으로 군사적 기능을 행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편이다. 이에 연대・봉수의 설치와 운영은 군사적 기능 외의 역할에도 활용되지 않았을까 한다.
조선 정부는 말・감귤・전복 등과 같은 제주의 특산품을 원활하게 거두기 위한 방편의 일환으로, 조선전기 이래 목초지대의 개간을 금하는 한편, 인조 7년(1629)부터 순조 23년(1823)까지 194년 간 제주 사람이 한반도의 육지부를 오고감을 금지하는 ‘출륙금지령’도 내린 적이 있었다._#52 제주 지역은 주민통제, 혹은 주민긴박의 정도가 여느 지역보다 높았던 곳이라 하겠다. 그래서 연대와 봉수가 제주 지역에 빽빽하게 들어서고, 이들 마다 군사도 배치해 운영됐던 점은 제주 주민들에게 계엄적 분위기를 자아냄과 아울러, 그에 따른 통제의 효과를 기하려는 의도도 곁들여져 있었을 듯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 진성의 경우를 보자면, 9개 진성 가운데 수산진성과 차귀진성을 제외하고, 나머지 7개 진성은 전부 해안가와 접하거나, 가까이에 자리잡았다. 이로써 제주 진성은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외적을 대비하기 위해 설치됐음을 엿볼 수 있다. 곧, 제주 진성의 1차적 임무는 군사적 기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제주 진성은 부수적, 혹은 부가적 기능도 부여됐다고 하겠다. 이는 각 진성의 입지적 여건이나, 혹은 개별적 특성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수산진성과 차귀진성은 바닷가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산으로 막혀 바다를 볼 수 없는 곳이라, 여러 차례 철폐가 논의됐음에도 계속 진성으로 존속해 나아갔다. 이렇게 된 데는 수산진성과 차귀진성이 군사적 기능 이외에도 존속해야 할 이유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 이유는 수산진성과 차귀진성이 각각 속한 정의현과 대정현의 행정적 기능을 보좌하던 거점도시나 위성도시로서의 역할을 기대・수행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는 정의현 관내 수산진성의 위치와 대정현성 관내 차귀진성의 위치를 감안하면, 충분히 상정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 제주의 진성은 화북진성을 제외하고는 전부 각 관할 읍성으로부터 일정 거리 떨어져 있었고, 또한 진성 간에도 일정한 간격을 둬 균형적으로 설치됐다고 보인다. 여기에서도 제주의 진성은 각 읍치의 행정적 기능을 보좌하던 거점도시로서의 역할을 기대・수행했음을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화북진성도 성곽과 성내 시설의 형상으로 볼 때 행정의 편의를 도모하는데도 초점을 맞춰 축조됐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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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천진성 발굴조사. 제공=김일우.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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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산진성과 주변 경관(항공촬영). 제공=김일우. ⓒ제주의소리

거듭, 제주 진성의 설치지역을 보자면, 제주도내에서 포구의 기능이 가장 양호하고, 또한 주요 요해처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는 외부 나들이와 아울러, 외부와의 교역도 가장 활발한 곳이다. 이는 화북진성과 조천진성 및 명월진성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로써 진성이 설치된 지역은 제주 도처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곳이었음도 드러난다. 게다가 제주 진성은 성곽을 갖추었다. 이런 점에서도 제주 진성은 각 읍성의 행정적 기능을 보좌함과 아울러, 도심지적 역할도 기대・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제주 지역 읍성의 경우는 제주성만 해안가와 접하고, 나머지 정의현성과 대정현성은 해안가와 비교적 멀리 떨어진 내륙에 자리잡고 있다. 애초 제주의 3곳 읍성 가운데 제주성만 전통적으로 대규모의 거점마을이 이뤄져 있었던 곳임과 아울러, 기존 성곽이 존재했던 해안가 지역에 들어섰다._#53 이로써 제주목의 읍성은 애초부터 행정적 기능은 물론이고, 군정적 기능도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나머지 정의현성과 대정현성은 고려시대 때 15개 군현 가운데 5개 군현을 통・폐합한 뒤, 큰 규모의 마을이 없었다고 보이는 곳에 들어섰다. 곧, 정의현성은 고려시대 때 제주 동남부쪽의 토산현・호아현・홍로현을 통・폐합하고, 애초에는 성산읍 고성리, 이어 표선면 성읍리 지역에 축조됐던 것이다. 대정현성의 경우는 고려시대 때 제주 서남부쪽의 예래・차귀현을 통・폐합하고, 대정읍 관내 인성・안성・보성리 지역 일대에 수축됐다. 정의현성과 대정현성은 새로이 성곽부지와 주거공간을 조성한 뒤, 축성작업이 행해졌다고 보인다. 

그런 만큼, 정의현성과 대정현성은 행정적 관할의 용이성을 도모하는데 초점을 맞춰 부지선정이 이뤄졌을 것이다. 곧, 정의현성은 제주 동남부 지역의 행정적 관할, 대정현성은 제주 서남부 지역의 행정적 관할을 수행하는데 적절한 곳을 택해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성은 각각 정의현과 대정현의 읍성이고, 그에 따라 각각 관할구역내 군정적 기능의 중심축 역할도 맡게 됐다. 더욱이, 이들 두 곳의 성곽 시설도 군사적 기능을 겸비하게끔 조성됐다.

제주성과 정의현성 및 대정현성은 제주도의 3개 읍성으로 이들 소재지의 지형적 여건과는 관계없이, 제주 지역을 북부・동남부・서남부로 삼분한 뒤, 여기서 각각 행정적 관할은 물론이고, 군사적 기능도 수행했던 관방시설로서의 위상도 지녔던 것이다. 더욱이, 각 읍성의 책임자는 제주 지역 군정의 수반층을 이루었고, 그 중에서도 제주목 읍성의 제주목사가 최고 수반이었다. 그래서 제주 관방시설의 통신망이 동・서로 깔리는 가운데 최종적으로는 제주목의 읍성, 곧 제주성에 잇닿게끔 조성됐던 것이다.

요컨대 조선시대 제주의 관방시설은 거개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분포했음과 아울러, 제주도를 동・서로 두르면서 곳곳에 포진하듯이, 설치돼 있는 형상을 지녔다. 이렇게 된 데는 제주의 마을이 전통적으로 동・서방향으로 해안가에 우선적으로 들어섰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규모가 큰 마을은 동・서방향의 해안지대에 자리잡았던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_#54 게다가, 제주도 지역의 행정단위가 조선초기에 들어와 북쪽의 제주목을 중심으로 동남쪽의 정의현과 서남쪽의 대정현으로 구획된 뒤, 삼읍의 운영체제가 본격화돼 나아감으로써 관방시설도 더욱 더 동・서방향으로 배치・운영됐다고 하겠다. 이런 가운데 제주의 관방시설은 군사적 역할 외에도 부수・부가적 기능도 기대・수행하고 있었다. 이는 연대・봉수의 설치와 운영이 계엄적 분위기를 자아냄으로서 주민 통제의 효과를 기하려는 의도도 곁들여졌을 듯 싶다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진성의 경우도 성곽시설로서 각 읍성의 행정적 기능을 보좌함과 아울러, 도심지적 기능도 기대・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곳에 들어섰음이 드러난다. 한편, 제주성과 정의현성 및 대정현성은 그 소재지의 지형적 여건과는 관계없이, 군사적 기능을 수행했던 관방시설로서의 위상도 지녔다. 게다가, 제주목의 읍성, 곧 제주성은 제주 관방시설의 통신망이 지향하는 최종 종착지와 같은 존재감도 드러나는 곳이라 하겠다.

▲각주
#52
김동전, 2006, 「사회경제구조와 도민의 생활」, 《제주도지 2》, 제주특별자치도, 378~383쪽. 

#53
김일우, 2011, 「조선시대 이전 탐라국 중심 마을의 형성과 변천-제주목관아지 일대를 중심으로-」, 《한국사진지리학회지》 21-3, 177~183쪽.

#54
제주 지역은 전통적으로 해안지대가 마을 형성의 입지적 여건이 가장 양호하며, 그런 만큼 어느 지역보다 우선적으로 마을이 들어섰다. 여기에는 제주 사람의 생업활통이 전통적으로 반농반이었던 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김일우, 2004, 「고려시대 탐라 주민들의 거주지역과 해상활동」, 《한국사학보》 18, 9~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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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김일우 (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의 대표 논저

2000, 《고려시대 탐라사연구》, 신서원
2002, 〈고려후기 제주 법화사의 중창과 그 위상〉, 《한국사연구》 119 .
2003, 〈고려후기 제주・몽골의 만남과 제주사회의 화〉,《한국사학보》 15.
2007, 〈고려시대와 조선초기 제주도 지역의 행정단위 변천〉, 《한국중세사연구》 23. 
2015, 〈제주 항몽유적의 역사성과 문화콘텐츠화 방안〉, 《몽골학》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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