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특집] (1)가족관계 정정 우여곡절
'혼인-출생신고 특례' 보완입법 과제

서슬 퍼런 공권력에도 진실을 감출 수는 없었다. 제주4·3의 참상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수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2003년 故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공권력에 의한 무력탄압에 공개 사과했다. 이후 4·3은 화해와 상생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발걸음에 역사 왜곡과 노골적인 폄훼가 다시 등장했다. 공동체를 흔들려는 시도에도 4·3을 기억하고 아픔을 치유하려는 지역사회의 노력은 굳건하다. 제75주년 4·3추념식을 맞아 4·3에 대한 책무와 과제를 되짚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편집자 주]  


4·3의 광풍 속에서 아버지의 사촌형 자녀로 입적된 오연순 할머니가 가사소송으로 가족의 뿌리를 찾았다.
4·3의 광풍 속에서 아버지의 사촌형 자녀로 입적된 오연순 할머니가 가사소송으로 가족의 뿌리를 찾았다.

오연순(75) 할머니는 1948년생이다. 세상의 빛을 본지 며칠 만에 아버지 故 오원보 씨는 싸늘한 주검으로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빨갱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고문에 시달리다 감옥에서 젊은 생을 마감했다. 당시 나이는 22세였다. 공방살이를 하던 어머니는 5년 뒤 새로운 짝을 만났다.

오 할머니는 외조부모 댁에 들어갔지만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호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의 사촌 형이 입적 소식을 알려왔다. 그렇게 삼촌은 아버지가 됐다.

여든을 앞둔 오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뿌리를 찾는 일이었다. 죽기 전에 친아버지의 호적에 이름을 올려 뒤틀린 가족관계를 바로 잡는 것이 이번 생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방법은 소송뿐이었다. 절차는 험난했다. 고인이 된 부모의 자녀임을 입증하는 것은 오롯이 오 할머니의 몫이었다. 70년 전 죽은 이와 DNA 검사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오 할머니는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가사소송에서 승소했지만 쉽지 않은 길이었다. 4·3의 광풍 속에서 공권력은 이처럼 수많은 가족을 파헤치고 남남으로 만들었다.

유족들은 4·3을 겪으면서 적어도 1000명 이상의 호적이 뒤틀린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한국사에서 유례없는 호적 정적을 위한 법령 개정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대법원은 민법상 친족과 상속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 지역사회와 정치권의 설득 끝에 대법원이 가족관계 등록사무 처리규칙 개정 의사를 밝히면서 흐름이 바꾸었다.

2022년 6월30일 규칙을 개정하면서 가족관계등록부의 작성 대상과 신청권자 범위가 유족들로 넓어졌다. 기존에는 대상자를 희생자로 제한하는 제도적 한계가 있었다.

대법원이 움직이자 정부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을 개정해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범위를 ‘희생자 및 유족 등’으로 확대했다.

시행령 개정안이 이달 초 국무회의를 통과하면서 호적에 존재하지 않는 희생자의 실질적인 자녀들도 70년 만에 법적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다만 혼인과 친생자 출생신고 등 또 다른 가족관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2021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전부 개정 과정에서 빠진 내용들이다.

당초 전부 개정안에는 사실혼 관계에 기초해 희생자와 혼인신고를 한 경우 민법 제815조에도 불구하고 혼인신고의 효력을 인정하는 예외 규정이 담겨 있었다.

민법상 고인과의 혼인은 성립되지 않아 특례 규정은 둔 것이다. 4·3 당시 제주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숨지거나 행방불명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법체계가 명확하지 않던 시절 사망과 혼인신고를 늦게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만약 사망시점을 혼인신고 이전인 4·3 당시로 되돌리면 사망 후 혼인은 무효가 되는 경우도 생겨난다.

고인이 되거나 행방불명된 부모의 자녀로 출생신고가 가능하도록 하는 친생자 출생신고 특례  조항도 전부 개정안에는 빠졌다.

현행 민법 제855조에 따라 출생신고는 부모가 하는 것이 원칙이다. 사망한 부모를 상대로 자녀가 출생신고를 할 수 없다. 이를 거스르면 상속이 어그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 개정안에는 4·3희생자의 사망이나 행방불명 이후부터 진행되는 친자의 출생신고는 민법 제855조에도 불구하고 가능하도록 특례를 담았지만 끝내 수용되지 않았다.

가족관계 특례는 명예회복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다. 지난 정부에서 국가보상과 가족관계 정정의 길이 열렸지만 특례 도입을 위한 4·3특별법 보완 입법은 여전히 숙제로 남았다. 

김창범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은 “4‧3특별법 전부 개정과정에서 누락된 특례 조항을 반영해야 한다”며 “반드시 보완입법이 이뤄지도록 정치권이 적극 나서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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