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호적 정정 대상-신청권자 확대 골자 대법원 규칙 개정 이후 첫 사례

75년만에 제주4.3때 행방불명된 아버지의 딸로 인정받은 할머니의 사례가 확인됐다. [제주의소리]가 지속적으로 보도한 ‘뒤틀린 제주4.3 가족관계 정정’ 대법원 규칙 개정 이후 첫 사례로 파악된다. 

최근 제주지방법원은 정모(75) 할머니가 제기한 인지청구 가사소송에서 정 할머니를 행방불명된 망인(정 할머니의 아버지) 친생자로 인정했다. 4.3으로 얽히고 설킨 가족관계를 바로 잡게 되면서 정 할머니는 75년만에 친 아버지의 딸로 인정받게 됐다. 

한림읍 명월리에 살던 정모씨는 4.3 당시 아내와 갓난 딸을 둔 채 군경에 체포돼 행방불명됐다. 

정씨는 육지 형무소에서 생활하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정씨는 아내 진모씨와 혼인신고조차 하지 못했고, 정씨의 사촌형은 갓난 아이를 자신의 자녀로 출생신고했다. 

남겨진 아내 진씨는 행불된 남편 정씨와 1977년에 혼인신고하고, 이듬해인 1978년 남편 정씨가 사망했다고 신고했다. 

70여년의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된 정씨의 갓난 딸은 자신을 아버지 정씨의 친딸로 인정해달라고 가사소송을 제기했다.

문제는 정 할머니 아버지 정씨가 행방불명됐고, 어머니 진씨도 이미 사망했다는 점. 정 할머니는 어머니의 묘를 발굴해 수차례 DNA 검사를 실시했지만, 채취한 시료의 문제로 결과가 도출되지 않자 외사촌과 DNA 검사를 실시해 같은 모계(母系)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버지 정씨는 행방불명돼 DNA 검사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 정 할머니가 여성이라서 호적상 아버지(행불된 정씨의 사촌형) 쪽과 DNA 검사를 실시해도 과학적으로 동일 부계(父系) 여부를 판별할 수 없는 상황이다.  

DNA 검사를 통해 어머니 진씨의 친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점과 아버지 정씨와 어머니 진씨가 함께 찍은 사진을 정 할머니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점, 수십년째 제사를 지내는 점 등을 토대로 뒤틀린 가족 관계를 바로 잡아달라고 호소했고, 결국 법원이 인정했다. 

행불된 정씨와 정 할머니간의 DNA 검사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제출된 자료만으로 진씨(정 할머니의 어머니)와 혈연관계가 인정돼 정 할머니가 정씨와 진씨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판단이다. 

아버지 정씨가 제주4.3희생자임에도 4.3유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정 할머니는 호적 정정이 이뤄지면서 70여년 만에 4.3유족으로 인정받게 됐다. 

정 할머니의 이번 가사소송은 [제주의소리]가 꾸준히 보도해온 ‘뒤틀린 제주4.3 가족관계 정정’에 따른 대법원 규칙 개정 이후 첫 사례로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민법에 따라 호적 정정을 하려면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와 ‘인지청구의 소’ 등 두 개의 소송을 진행해야 한다.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 소송으로 호적상 부모가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받은 뒤 대한민국 검사를 상대로 인지청구 소송을 제기해 실제 친부모를 찾아야 한다.  

DNA 검사로도 호적정정이 가능하긴 하지만, 행방불명 피해자가 많은 제주4.3 유족들 입장에서는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다. 시신을 못찾아 DNA 검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번 정 할머니의 판례가 중요한 이유다.  

민법에 따라 인지청구 소송은 ‘사망을 안 날로부터 2년 내에 검사를 상대로 제기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다만, 4.3특별법 전면 개정에 따라 ‘민법에도 불구하고 법 시행일 이후 2년 이내에 검사를 상대로 인지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조항이 생겼다. 

법 시행일이 2022년 4월12일이라서 2024년 4월까지 2년간 특례로 4.3 피해자들이 호적정정을 위한 인지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됐다. 

인지청구 특례에도 대법원규칙(4‧3특별법에 의한 가족관계 등록사무처리규칙) 제2조에 따른 호적정정 대상자가 ‘희생자’로 한정돼 4.3 유족들의 호적정정 길을 막았다. 

호적정정이 필요한 4.3 피해자 대부분이 ‘유족’인데도 대법원 규칙이 장애물이 된 상황으로, [제주의소리]의 지속적인 보도 이후 대법원은 규칙을 개정해 ‘유족으로 결정된 사람’과 ‘그 밖에 위원회의 결정으로 가족관계등록부 작성 등의 대상이 된 사람’으로 정정 대상자와 신청권자를 확대했다. 개정된 규칙은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대법원 규칙 개정에 따라 4.3특별법 시행령도 순차적으로 개정돼 제주4.3으로 뒤틀린 호적정정을 위한 길이 열렸다. 

정부와 제주도는 오는 7월부터 제주4.3때 뒤틀린 가족관계 정정 신청 접수를 받기 위해 내부 지침을 마련중이다. 다만, 뒤틀린 가족관계를 정정하는 특례 조항을 추가하는 4.3특별법 보완 입법이 후속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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