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간첩조작사건] 6일 피해자 김양진 어르신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당시 재판기록에 남아 있는 ‘증인’ 불러 참고인 조사도 이뤄져

1973년부터 1988년까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김양진 어르신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모습. 공안당국은 일본에 살다 온 김 어르신에게 모진 고문을 가해 간첩이라는 허위자백을 받아냈다. ⓒ제주의소리
1973년부터 1988년까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김양진 어르신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모습. 공안당국은 일본에 살다 온 김 어르신에게 모진 고문을 가해 간첩이라는 허위자백을 받아냈다. ⓒ제주의소리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3년,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자 김양진(92) 어르신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다. 

온갖 꼬투리를 잡기 위해 달려든 공안당국에게 끌려가 불법 구금당한 뒤 모진 고문을 받고 허위자백해 징역형을 선고받은 김 어르신의 과거사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김광동, 이하 진화위)는 6일 오후 2시 제주시 오도롱복지회관에서 간첩조작사건[관련기사 = 판사실 재판에 간첩미수 ‘사형’ 구형..1주일 잠 안 재우고 “했지? 예” 상황 끝]에 휘말린 김 어르신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김 어르신은 재심 청구를 위해 지난해 진화위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했으며, 올해 6월 21일 제57차 위원회를 통해 조사개시 결정을 받았다. 

이날 진화위는 당시 판결문을 토대로 참고인을 불러 개별 조사를 진행했다. 판결문에는 당시 서울형사지방법원 검사가 제주지방법원에 내려와 김 어르신의 친척과 이웃 주민을 상대로 증인신문을 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판결문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김 어르신이 끌려갈 당시 마을에 있었던 총 5명으로 이날 조사에는 김원서, 김광선, 오승환 등 주민들이 오도롱복지회관을 찾아와 당시 상황을 진술했다. 

이들은 50년 전이라 기억이 잘 안 난다면서도 김 어르신이 당시 특수작물을 심던 농사꾼으로 간첩 활동을 하며 동네 사람들을 포섭하지 않았다는 등 직접 보고 들은 사실 그대로를 말했다. 

참고인 조사에 이어 진화위 관계자는 김 어르신 본인을 대상으로도 조사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는 김 어르신의 아들과 김종민 제주4.3사건중앙위원회 위원이 동석해 조사를 도왔다.

김 어르신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개시 결정이 있기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인 김종민 제주4.3사건중앙위원회 위원. 김 위원은 어르신이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제주의소리
김 어르신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개시 결정이 있기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인 김종민 제주4.3사건중앙위원회 위원. 김 위원은 어르신이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제주의소리

진화위가 조사개시 결정을 내리고 실제 사건조사에 나서기까지는 김종민 제주4.3사건중앙위원회 위원이 연구책임을 맡아 작성한 ‘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의 역할이 컸다. 

이 보고서는 강남규 제주민주화운동사료연구소 이사장, 황석규 제주다문화교육복지연구원장, 한상희 서귀포여자중학교 교감이 공동연구자로, 고승남 제주환경운동연합 감사가 연구 보조로 참여해 제작됐다.

연구원들은 ‘제주도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등의 인권증진 및 지원에 관한 조례’에 따라 실태조사에 나섰고 기존 조사에 더해 새로운 피해자들을 발굴한 뒤 억울한 누명을 벗길 수 있도록 지원을 병행했다. 

억울함을 풀기 위해 진화위 조사를 통한 ‘진실규명 결정’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신청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자 피해자와 유가족이 판결문을 입수하도록 돕고 진실규명 개시 결정을 받을 수 있도록 피해 사실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당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과 자료를 모은 덕분에 진화위는 수사과정에서 고문과 가혹 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 조사개시를 결정했다. 김종민 위원은 조사개시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은 ‘조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어르신은 공안당국의 계획에 따라 간첩이 됐다. 판결문에 따르면 공안당국은 일본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김씨의 매형을 조총련으로 조작하고 그로부터 공작금을 받았다며 반국가단체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를 덮어씌웠다. 

5살인 1934년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30여 년 뒤인 1964년에 귀국한 한국말도 잘 못 하는 김씨가 사람들을 포섭했다는 짜맞추기식 조서도 포함됐다.

말로 다 못 할 모진 고문을 통해 허위자백을 받아 낸 공안당국이 검찰로 사건을 송치하면 검찰은 의심 없이 기소하고 법원은 그대로 판결을 내렸다. 간첩이라는 증거는 ‘트란지스터 라디오’와 ‘리시버’ 각 1대뿐이었다. 

그런데도 검찰은 1심에서 무려 ‘사형’을 구형했고, 법원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항소심에서 15년형으로 감형됐지만, 제대로 된 증거 없이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만으로 진행된 재판은 이미 정당성을 잃은 위법한 것이었다. 

당시 형사소송법을 따를 때 ‘증거재판주의’에 입각한 재판이 이뤄졌어야 했다. 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고문이나 폭행, 신체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등 부당한 방법으로 진술한 것으로 의심될 때는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한다는 조항도 있다. 

불법적으로 구금돼 고문을 받고 허위로 자백했기 때문에 이는 이미 증거로 활용할 수 없었으며, 일본에서 가져온 흔해 빠진 트란지스터 라디오와 리시버도 증거라고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재판은 진행됐고, 징역형이 선고됐다.

이날 조사에는 김 어르신의 아들 김경범(53) 씨가 함께했다. 김 씨는 16살 때인 중학교 2학년부터 아버지에 대해 기억하고 있다. 3살 때 아버지가 억울하게 잡혀갔기 때문이었다. 

누가 아버지 어디 갔냐고 물으면 어머니께서는 고추 따러 갔다는 식으로 말을 돌렸다고 했다.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힘든 삶을 살아온 것이다.

김 어르신의 아내인 김설형 어르신도 당시 상황을 물으니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 아들, 딸을 먹여 살렸다. 아버지 없는 게 불쌍해서 한 번도 야단치지 못했다”며 “얼마나 힘들게 키웠는지 별일을 다 겪었다. 탑동까지 걸어가서 일하고 야간작업도 하고 그랬다”며 눈물이 고인 채로 말했다.

한편, 진화위는 조사개시를 결정한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자 故 김두홍 씨의 가족 등을 상대로 한 조사도 진행할 계획이다. 

김 어르신이 접수한 진실규명신청서 접수증명원. ⓒ제주의소리
김 어르신이 접수한 진실규명신청서 접수증명원.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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