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간첩조작사건] (10) 좁은 범위 피해자 정의 및 지원 대상 한계

힘으로 권력을 움켜쥔 군사독재정권은 정치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민간인을 간첩으로 몰아넣고 반공 분위기를 조성, 여론의 관심을 돌렸다. 무고한 피해자들은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고, 제대로 된 변호조차 받지 못한 채 유죄판결을 받았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사건만 20건, 피해자만 53명에 달한다. [제주의소리]는 조사보고서에 나타난 제주출신 간첩 조작사건 피해자의 인터뷰 녹취록을 바탕으로 억울한 그들의 사연을 매주 한 차례, 10회에 걸쳐 소개한다. / 편집자 글

대한민국 간첩의 3분의 1이 전체 인구 1%에 불과했던 제주도에서 잡혔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운 터무니없는 숫자였다.

그러나 아무도 의심하지 못했다. 군사독재정권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든 피해자의 입에서 죄를 실토하게끔 만들어냈다. 구실이라도 갖춘 조악한 증거 따위도 필요하지 않았다.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아내면 그만이었다. 

삼권 분립 체제가 무너져있었기에 국가 권력을 견제할 방법은 없었다. 재판부 역시 검경이 써 올린 조서를 토대로 판결을 내릴 뿐이었다.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변호도 받지 못한 채 무기징역 같은 중형을 선고받았다. 

일본에서 친척을 만나고 왔는데 그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소속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기징역이 내려지던 암울한 시대였다. 그러나 당시 시대 상황이 그랬다는 이유만으로는 정당성을 갖출 수 없다. 무리한 수사라는 걸 알고 있었을 누군가가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시 이도1동 옛 제주경찰 대공분실 모습.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강희철 씨는 지난 2006년 5월 15일 비공개로 진행된 재심청구 법원 현장검증 당시 고문, 조사를 받은 대공분실 2층 조사실과 지하실 상황을 소상하게 증언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허울뿐인 공명심과 열정, 끝내 탄생한 ‘괴물’

피해자 이장형과 강희철 석방 운동에 앞장선 표선성당 남승택 신부는 인터뷰에서 “당시는 모든 게 경쟁이고 공명심이다. 남이 죽든 말든 자기 출세만 바라보던 시대였다. 그런 환경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그런 괴물들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본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설마 하며 간첩으로 조작됐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판결문을 보고 조작이라는 확신을 하게 됐다”며 “나라가 안보를 앞세우며 통치하던 시대니까 그것에 대한 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그 받침에 놀아난 사람들이 이런 괴물들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독재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하더라도 입맛에 맞게 없는 간첩이라도 만들어 바치는 일은 입신양명의 길이었다. 이들은 사건을 키우기 위해 서로 연관이 없는 다른 지역 피해자들까지 엮었다. 

1984년 10월 13일 자행된 ‘6개망(網) 간첩단’ 사건은 제주 서경윤을 포함해 서로 연관이 없는 6명을 간첩으로 만들어 한데 묶은 대표적 간첩조작 사건이다.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진 이 사건 피해자 서경윤은 2013년 11월 28일 재심에서 ‘조작’임이 밝혀져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보다 앞서 박정희가 대통령이었던 1967년 10월 28일, 독재정권은 전남과 제주지역에 은밀히 대남공작자금을 조달하는 등 활동하는 ‘고정간첩’을 일망타진했다고 발표했다. 

이 시기는 같은 해 6월 8일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저지른 부정을 규탄하는 대규모 ‘6.8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있었던 때로 우연이라기엔 의도가 다분해 보이는 행동이었다. 공안당국은 사건을 키우기 위해 전혀 연관성 없는 전남지역 피해자들까지 엮었다.

당시 재판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됐는지는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에 응한 피해자들의 인터뷰에서 잘 나타난다. 15년형을 선고받은 김양진 씨는 당시 법정이 아니라 판사실에서 구형을 듣고 선고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1984년 10월 13일 동아일보(사진 왼쪽)와 14일 조선일보에 보도된 '6개망 간첩단 사건' 보도 내용. 공안당국은 사건을 키우기 위해 전혀 연관성 없는 다른 지역 피해자들을 엮었다. 사진=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1984년 10월 13일 동아일보(사진 왼쪽)와 14일 조선일보에 보도된 '6개망 간첩단 사건' 보도 내용. 공안당국은 사건을 키우기 위해 전혀 연관성 없는 다른 지역 피해자들을 엮었다. 사진=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끔찍한 고문에 후유증은 현재진행형 “아직도 꿈에 나타나”

피해자 김양진은 일주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당했으며, 김두홍은 아들 이름도 잊어버릴 정도로 심한 고문을 받고 나온 뒤 매일 악몽을 꾸고 입에 대지 않던 술을 들이켰다. 걸핏하면 누가 나를 잡으러 온다며 숨는 일도 잦았다.

피해자 김경유의 셋째 아들 김병두는 아버지가 교도소에 가 있는 동안 동네 사람들 일부는 ‘간첩의 집’이라며 집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거나 입구에서 고성을 지르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양의남은 닥치는 대로 두들겨 맞아 온몸이 피로 물들어 입고 있던 옷과 상처가 달라붙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무릎 관절이 손상돼 인공 관절을 심었고, 어깨 인대 대부분이 끊어져 팔을 제대로 들지도 못한다. 

양씨는 “수십 대 수준이 아니라 수백 대를 맞았다. 어쩔 땐 까무러쳐서 깨어나지 못하면 물을 퍼부어 깨웠다”며 “대여섯 명이 교대로 때릴 정도로 호된 고문을 받았다. 당시 한라기업사를 다녀오면 반병신 된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내가 됐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피해자 양영배는 물레방아를 돌리듯 계속해서 숨을 쉴 수 없는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그는 당시 고문실 이곳저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고 했다. 

피해자 강병선은 성기에 전기를 흘려보내거나 숨을 못 쉬게 하는 형벌인 ‘도모지’를 연상케 하는 고문까지 당했다. 강씨는 지금도 잡혀가는 꿈을 꾸며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꿈속에선 늘 ‘아! 또 죽게 생겼네!’라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공안당국은 가족을 데려와 똑같은 고문을 가하겠다며 정신적으로 괴롭히기도 했다. 피해자 이장형은 그렇게 허위자백을 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간첩조작사건 3건에 대한 내용이 벽면에 소개돼 있었다. 하지만 상설전시관 리모델링 사업을 거치며 이 전시패널은 통째로 사라졌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박근혜가 대통령이었고, 전시패널에 소개된 3건의 간첩조작사건은 그의 아버지인 박정희 때 벌어진 일이었다. 이에 KBS제주방송총국이 사라진 패널을 중심으로 간첩조작사건에 대해 집중 보도했고, 사회적 반향에 따라 제주도의회는 간첩조작사건 관련 전국 최초의 조례를 제정했다. 사진=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 갈무리.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간첩조작사건 3건에 대한 내용이 벽면에 소개돼 있었다. 하지만 상설전시관 리모델링 사업을 거치며 이 전시패널은 통째로 사라졌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박근혜가 대통령이었고, 전시패널에 소개된 3건의 간첩조작사건은 그의 아버지인 박정희 때 벌어진 일이었다. 이에 KBS제주방송총국이 사라진 패널을 중심으로 간첩조작사건에 대해 집중 보도했고, 사회적 반향에 따라 제주도의회는 간첩조작사건 관련 전국 최초의 조례를 제정했다. 사진=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 갈무리.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재심조차 청구하지 못한 피해자들, 아쉬움 많은 지원 조례

제주특별자치도와 (사)제주민주화운동사료연구소는 ‘제주도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등의 인권증진 및 지원에 관한 조례’에 따라 실태조사에 나섰고 기존 조사에 더해 새로운 피해자들을 발굴했다. 

김종민 제주4.3사건중앙위원회 위원을 필두로 강남규 제주민주화운동사료연구소 이사장, 황석규 제주다문화교육복지연구원장, 한상희 서귀포여자중학교 교감, 고승남 제주환경운동연합 감사가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를 만들었다. 

조사단은 약 7개월간의 짧은 조사기간과 조례의 한계를 지적했다. 피해자를 찾아내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더불어 조례로 밝힌 정의에 따르면 의도치 않게 피해자들을 소외시킨다는 문제가 따른다.

조례 제2조(정의)는 ‘간첩조작사건’을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이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으로 규정한다. 즉 재심을 청구하지 못했거나 실형을 선고받지 않고 고문만 받은 채 풀려난 사람들은 지원 대상에서 배제된다.

당시 서경윤과 같은 동네 출신인 양씨를 포함해 김주섭, 김치병, 김기선 등이 사건에 연루돼 보안사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정작 서경윤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우리는 피해만 입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조사단은 피해 조사나 지원 대상자를 ‘제주도에 주민등록을 두고 거주하는 사람’으로 제한한 점을 한계로 들었다. 간첩이나 그 가족이라는 멸시에서 벗어나려고 제주도를 떠난 사람들은 피해자가 아니게 된 셈이다. 

이에 조사단은 조사 결과를 토대로 △지속적인 실태조사를 통해 피해자들의 실상을 드러내고 사회에 알려 교훈을 남길 것 △피해자 및 유가족 트라우마 치유 대책 마련 △피해자들의 무죄 판결을 위한 재심 지원 등 정책을 제언했다. 

군사독재정권이 자행한 수많은 국가폭력이 세상에 드러나 진실규명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상대적으로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들의 관심과 지원은 빈약하다. 스스로 없는 죄를 자백해야만 했던 그들을 위한 세심한 정책적, 법적 지원이 절실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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