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간첩조작사건] 진화위, 故김두홍 사건 ‘불법구금-가혹행위’ 명백히 인정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끌려가 고문당하고 정신까지 피폐해져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없었다. 뼛속 깊이 새겨진 억울함의 한(恨)은 풀지 못한 채 이승에 남겨둬야만 했다. 

내 한 몸 바쳐 조국을 지키노라 다짐하고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으로 뛰어들었지만, 고향에 돌아온 뒤 국가는 나를 ‘간첩’으로 만들었다. 극악무도한 군사독재정권의 먹잇감이 된 탓이었다.

이처럼 지옥과 같은 삶을 살다가 끝내 세상을 떠난 故 김두홍 씨의 억울한 사연을 풀어낼 길이 열렸다. 과거사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조사결과 진실규명 결정 ‘재심 권고’가 내려지면서다.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자 故 김두홍 씨 사건이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결정으로 '재심'을 권고받았다. 고인은 한국전쟁에 뛰어들어 조국을 지켜낸 영웅이었다. 그러나 공안당국은 이런 사실을 아랑곳하지 않고 모진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낸 뒤 간첩을 만들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자 故 김두홍 씨 사건이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결정으로 '재심'을 권고받았다. 고인은 한국전쟁에 뛰어들어 조국을 지켜낸 영웅이었다. 그러나 공안당국은 이런 사실을 아랑곳하지 않고 모진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낸 뒤 간첩을 만들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진화위는 지난 20일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불법구금 등 인권침해 사건인 故 김두홍 씨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통지하면서 국가에 대해 재심을 권고했다. 

진화위는 조사를 통해 고인이 영장 없이 1982년 7월 20일부터 사후 구속영장이 발부된 8월 5일까지 17일간 불법 구금돼 조사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또 수사과정에서 범죄사실을 받아내기 위해 진술을 강요하며 잠을 재우지 않는 등 가혹 행위가 벌어졌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에 진화위는 국가에 대해 수사과정에서 발생한 고문·가혹 행위에 대해 사과하고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고인과 가족의 피해와 명예 회복을 위해 형사소송법에 따라 재심 등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진화위는 이번 조사에서 검찰 수사기록과 법원 판결문 및 공판기록, 그리고 ‘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를 참고했다. 이처럼 진화위 조사에는 김종민 제주4.3사건중앙위원회 위원이 연구책임을 맡은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의 역할이 컸다. 

이 보고서는 강남규 제주민주화운동사료연구소 이사장, 황석규 제주다문화교육복지연구원장, 한상희 서귀포여자중학교 교감이 공동연구자로, 고승남 제주환경운동연합 감사가 연구 보조로 참여해 제작됐다.

연구원들은 진화위 ‘진실규명 결정’을 받기 위해 피해자와 유가족이 판결문을 입수하도록 돕고 진실규명 개시 결정을 받을 수 있도록 피해 사실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과 자료를 모은 덕분에 진화위는 수사과정에서 고문과 가혹 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 조사개시를 결정했다. 고인 역시 조사보고서와 언론의 관심 덕분에 진실을 규명할 기회를 갖게 됐다.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자 故 김두홍 씨의 아내 고정일 어르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7월 7일 어르신을 상대로 국가보안법 위반 조작 의혹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자 故 김두홍 씨의 아내 고정일 어르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7월 7일 어르신을 상대로 국가보안법 위반 조작 의혹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의소리]는 제주 간첩 조작사건 피해자의 인터뷰 녹취록을 바탕으로 억울한 그들의 사연을 열 차례에 걸쳐 기획 보도하고 후속을 이어가는 등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 

고인의 사연 역시 보도[관련기사 = 일본 여행 중 친척 만났다고 ‘간첩?’…평생 억울함 풀지 못한 사연]를 통해 상세히 다뤘다. 내용은 간첩조작 사건의 진실을 밝혀낸 ‘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를 토대로 했다. 

뒤이어 진화위 조사개시 보도[관련기사 = 한국전쟁 참전영웅이 간첩? “우리 영감 저세상에서 보고 이실거여”] 관련 현장 취재를 통해 한국전쟁 참전 용사라는 사실과 유족들의 사연을 다뤘다.

고인은 큰집의 제사와 벌초를 모두 대신한 고마움으로 초청받은 일본에 관광차 다녀온 이후 억울하게 북한을 찬양하고 남한을 비하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써 간첩으로 몰려 처벌을 받았다. 수사 당시 불법 연행과 고문, 가혹 행위도 당했다.

수사기록에 따르면 공안당국은 1982년 7월 20일 무작정 고인을 잡아간 뒤 8월 5일에서야 구속영장을 발부, 집행했다. 영장도 없이 불법 구금한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수사관들이 신분을 밝히거나 영장도 제시하지 않고 끌고 간 것이다. 

고인이 가혹 행위를 당한 사실은 당시 재판에서 나타났다. 첫 재판에서 고인은 간첩 행위를 부인하며 “경찰 조사에서 범죄사실을 시인한 것은 무서워서”라거나 “4일간 잠을 재우지 않고 바른말을 하지 않으면 고문하겠다는 말을 들어 겁이 났다”고 증언했다. 

또 항소심에서는 처음으로 경찰 조사 당시 고문을 받았다며 검찰에서도 고문할까 겁나 거짓으로 자백했다고 말했다. 이 모든 사실에 대해 당시 수사관들은 진화위 조사에서 부정하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 것으로 파악됐다.

고인은 풀려난 뒤 누가 자신을 잡으러 온다며 보릿대에 숨어들고 조상님이 무슨 소용이냐며 제사상을 뒤집어엎었다. 또 술을 마시고 집 마루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수류탄 파편이 정수리 부근에 박힐 정도로 목숨을 다 바쳐 조국을 지켜낸 ‘국가유공자’였지만, 아이러니하게 ‘간첩’이 됐다. 친척의 초청으로 일본에 다녀왔다는 공안당국이 좋아하는 먹잇감에 포착된 것이 이유다. 

고통은 고인에게서 끝나지 않고 대를 이어 전해졌다. 큰아들인 김병현 씨는 사건 이후 공기업에 취직하려 해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꾸 낙방하는 등 연좌제 피해를 겪었다고 했다. 

특히 고인의 셋째 아들은 해군 장교가 되기 위해 해군사관학교 시험을 봤는데 맨 마지막 순서인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말은 신체검사 때문이라지만 연좌제로 인해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큰아들 김병현 씨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김종민 선생님이 많이 도와줘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돼 너무 좋다”며 “아버님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다. 제사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기쁜 소식을 고할 수 있어 진심으로 감사하다. 몰라서 지나칠 뻔했는데 주위에서 많이 도와주셔 고맙다”고 소감을 말했다. 

지난 7월 이뤄진 조사 당시 아버지의 억울함과 지금까지 겪어온 피해에 대해 이야기하던 큰아들 김병현 씨는 대화 도중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난 7월 이뤄진 조사 당시 아버지의 억울함과 지금까지 겪어온 피해에 대해 이야기하던 큰아들 김병현 씨는 대화 도중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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