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간첩조작사건] 진화위 ‘재심 권고’ 내려진 故 김두홍 간첩조작사건
검경-법원, 진실 외면한 속전속결 ‘유죄’에 진화위 “책무 다하지 못했다” 쓴소리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사진 출처=네이버 영화.<br>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무력으로 국권을 찬탈한 것도 모자라 권력 유지를 위해 무고한 국민을 억울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군사독재 정권의 추악한 과거사 진실이 뒤늦게 규명되고 있다. 

최근 제주 간첩 조작사건 피해자인 故 김두홍 씨에 대한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불법구금 등 인권침해사건’은 정부 과거사정리위원회 진실규명 조사를 거쳐 ‘재심 권고’를 받았다. 

이에 유족은 지난 5일 고인에게 내려진 잘못된 판결을 뒤집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제주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법적 절차를 통해 국가 잘못을 밝혀내고 고인의 한을 달래겠다는 마음에서다. 

[제주의소리]가 고인의 사건뿐만 아니라 전체 ‘제주 간첩 조작사건’을 꾸준히 보도하고 있는 가운데 이번 사건을 조사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진실규명 결정서’를 입수, 내용을 자세히 들여봤다.

故 김두홍 씨는 과거 가족들이 모두 일본으로 이주한 큰어머니 조상 제사와 벌초를 도맡아 도왔고, 그 보답으로 초청을 받아 1980년 일본 오사카로 여행을 다녀왔다. 하지만 초청받아 다녀온 일본 여행 때문에 그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경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1982년 7월 20일 제주경찰서 대공과는 고인을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 자택에서 붙잡아 끌고 갔다. 일본에 있을 때 조총련계 친척을 만나 북한 찬양에 동조, 회합하고 금품을 수수했다는 등 반공법 위반 혐의다. 귀국한 뒤 마을에서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독재라고 비판하고 북한을 찬양했다는 혐의까지 더 얹었다.

영장도 없이 끌고 간 경찰은 8월 5일에서야 발부된 구속영장을 집행했다. 즉, 최초로 연행한 7월 20일부터 구속영장 발부 및 유치장 인치 날인 8월 5일까지 17일간 영장 없이 불법으로 구금한 채 조사를 진행한 것이다. 

불법 구금에 고문을 비롯한 가혹 행위까지 더해지면서 이미 불법이었지만, 경찰은 고인을 같은 해 8월 12일 기소 의견으로 제주지방검찰청에 송치했다. 검찰은 8월 31일 금품수수의 경우 ‘혐의없음’으로 불기소 처리하고 반공법 위반 혐의는 재판에 넘겼다. 

이에 제주지방법원은 같은 해 11월 30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으며, 1983년 2월 18일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 형량이 부당하다며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판결했다. 고인과 검사 모두 상고하지 않으면서 형은 확정됐다. 속전속결 ‘유죄’다.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자 故 김두홍 씨의 아내 고정일 어르신. 남편인 김씨는 일본에 살고 있는 큰집의 제사와 벌초를 대신한 고마움으로 초청받은 일본을 여행차 다녀왔다가 간첩이 됐다. 질투심을 품은 사람이 ‘피해자가 일본에서 조총련을 만났다’며 공안당국에 밀고했고 김씨는 1982년 공안당국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끝에 허위로 자백하고 재판에 회부됐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자 故 김두홍 씨의 아내 고정일 어르신. 남편인 김씨는 일본에 살고 있는 큰집의 제사와 벌초를 대신한 고마움으로 초청받은 일본을 여행차 다녀왔다가 간첩이 됐다. 질투심을 품은 사람이 ‘피해자가 일본에서 조총련을 만났다’며 공안당국에 밀고했고 김씨는 1982년 공안당국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끝에 허위로 자백하고 재판에 회부됐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당시 고인은 친척이 조총련에 가입한 사실을 일본에 가서 알게 됐고, 귀국한 뒤로도 정부를 비방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다만, 검경 조사에서 범죄사실을 시인하기도 했는데 이후 재판 과정에서 고인은 “4일간 잠을 재우지 않고 바른말을 하지 않으면 고문하겠다고 말해 겁이 나서 그렇게 진술했다”고 밝혔다.

항소심에서는 “공소 사실을 자백한 것은 경찰 조사 당시 고문을 받았기 때문”이라며 “검찰에서도 고문을 가할까 겁이 나서 전부 (허위로)자백했다. 지금 공판에서 한 진술이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고인이 북한을 찬양했다는 발언과 관련해 참고인으로 조사받은 마을 주민은 진화위 조사에서 “김두홍이 ‘이북이 살기 좋다’는 말을 했다는 내용의 진술서에 도장은 찍었지만, 그것은 경찰이 너무 무서워서 시키는 대로 한 것일 뿐 실제로 들은 적은 없다”고 사실을 털어놨다.

불법 구금과 관련해 당시 고인에 대한 진술조서 및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수사관 A씨는 진화위 조사에서 “내사 중 위법사항이 발견되면 용의자를 임의동행해 조사한 뒤 돌려보냈다가 추후 다시 출석요구한다. 김두홍을 불법 구금한 사실은 없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큰아들인 김병현 씨는 “오래전이라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1982년 여름이 되기 전 갑자기 잡혀갔다”며 “잡혀간 뒤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교도소에 있다가 풀려난 뒤에야 처음 만났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가 풀려난 뒤 말씀하시길 경찰서에서 잠깐 조사를 받은 뒤 다른 곳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고 하셨다. 구체적인 장소는 모르겠고 경찰서가 아니라 비밀 취조실 같았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고인의 배우자인 고정일 어르신도 남편이 집행유예로 풀려나기 전까지 석방된 적 없고 집에 찾아온 수사관들이 신분을 밝히거나 영장을 제시한 적 없다고 했다. 또 끌고 가는 이유도 듣지 못했다고 진화위에 말했다.

진화위 결정통지서. ⓒ제주의소리
진화위 결정통지서. ⓒ제주의소리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들은 불법이 아니라거나 기억나지 않는다고 부인했다. 범죄인지 보고 및 수사결과 보고를 작성한 수사관 B씨는 김두홍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취지의 진술서를 서면으로 제출했다. 

고인을 직접 검거하고 본인 명의 의견서를 쓴 수사관 C씨는 “통상적으로 이름을 쓴 것일 뿐이며, 수사에 직접 관여한 사실이 없다”며 “김두홍 사건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통상 국가보안법 피의자가 오면 검찰 지휘가 올 때까지 사무실에서 조사를 받으며 대기한다”고 말했다.

수사관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도 “잠을 못 자도록 했을 수는 있으나 때리지는 않는다”고 말하거나 “당시 심야 조사를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잠을 안 재운 사실이 없다”고 말하는 등 엇갈린 진술을 했다.

“감히 정권을 비판하고 북한을 찬양하는 등 엄중한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며 불법적으로 잡아들여 위협적으로 수사한 끝에 징역형까지 이끌어 놓고는 정작 고인이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 불법 구금과 고문, 가혹 행위 등이 얼마나 자주 벌어지고 있었는지, 국가 권력이 국민을 어떻게 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인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강압적인 분위기 속 고문까지 받아가며 허위자백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든 독재정권은 고인이 누군지 기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쓰고 버린 걸레짝보다 못한 취급으로 국민을 대한 형국이다.

조사를 마친 진화위는 고인이 불법 감금된 상태에서 고문 등 가혹 행위로 인해 허위자백을 강요받았고 이는 형법상 폭행, 가혹행위, 강요, 직권남용, 불법체포·감금과 형사소송법 등에 따라 재심 사유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진화위는 “검찰은 김두홍에 대한 불법구금 정황이 있었음에도 수사지휘 기관으로 의무를 다하지 못한 채 기소, 국민 인권을 보호할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며 “법원은 인권보장의 최후 보루기관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은 고인이 수사기관으로부터 불법연행 및 불법구금, 진술 강요와 가혹행위 등을 당하고 처벌받아 인격권, 신체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침해된 중대한 인권침해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고인이 이승에 남겨둔 채 떠난 억울함의 한(恨)을 풀기 위한 재심이 청구됐다. 앞으로 진행될 재판이 어떻게 진행될지, 국가가 과거사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지, 이를 통해 고인이 저승에서나마 포근한 ‘봄’을 맞이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자 故 김두홍 씨는 한국전쟁에 뛰어들어 조국을 지켜낸 영웅이었다. 그러나 공안당국은 이런 사실을 아랑곳하지 않고 모진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낸 뒤 간첩을 만들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자 故 김두홍 씨는 한국전쟁에 뛰어들어 조국을 지켜낸 영웅이었다. 그러나 공안당국은 이런 사실을 아랑곳하지 않고 모진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낸 뒤 간첩을 만들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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