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간첩조작사건] (9) 피해자 석방 운동 앞장선 표선성당 남승택 신부

힘으로 권력을 움켜쥔 군사독재정권은 정치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민간인을 간첩으로 몰아넣고 반공 분위기를 조성, 여론의 관심을 돌렸다. 무고한 피해자들은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고, 제대로 된 변호조차 받지 못한 채 유죄판결을 받았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사건만 20건, 피해자만 53명에 달한다. [제주의소리]는 조사보고서에 나타난 제주출신 간첩 조작사건 피해자의 인터뷰 녹취록을 바탕으로 억울한 그들의 사연을 매주 한 차례 소개한다. / 편집자 글

“피해자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해병대 장교 출신인데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왜 허위자백했냐고. 그러자 그는 계속 버티다가 ‘딸과 아내를 잡아다가 당신에게 했던 고문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자백서를 썼다고 했다.”(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 남승택 신부 인터뷰 중)

우연히 대구교도소에서 사목을 담당하는 동료 신부로부터 간첩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제주 출신 수형인 이장형이 억울해한다는 편지를 받고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가 울면서 억울하다고 했지만, 처음엔 이유가 있겠거니 했다. 그러나 사실을 파헤칠수록 ‘거짓’이 가득한 국가 권력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작’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독재 권력은 입맛대로 국민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제주 표선성당 남승택(68) 신부는 전국단위 조직인 ‘천주교 인권위원회’를 만들어 대표로 활동하는 등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이장형과 강희철 석방 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결정적으로 석방 운동은 제주간첩조작 사건을 사회에 알리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피해자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는 등 역할을 했다. 이 무죄 판결은 제주간첩조작 사건 재심 사건 중 첫 무죄 선고라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제주 표선성당 남승택 신부는 전국단위 조직인 ‘천주교 인권위원회’를 만들어 대표로 활동하는 등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이장형과 강희철 석방 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석방 운동은 제주간첩조작 사건을 사회에 알리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피해자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는 등 역할을 했다. 사진=김종민.<br>
제주 표선성당 남승택 신부는 전국단위 조직인 ‘천주교 인권위원회’를 만들어 대표로 활동하는 등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이장형과 강희철 석방 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석방 운동은 제주간첩조작 사건을 사회에 알리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피해자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는 등 역할을 했다. 사진=김종민.

# 이장형 북한 데리고 갔다는 당사자 만나보니 “그런 사람 모른다”

남 신부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장형의 사연을 듣고 판결문을 입수, 확인한 뒤 ‘억울함이 사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증거는 ‘만년필’ 딱 하나였고, 자백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사실확인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남 신부는 최병모 변호사와 함께 직접 일본으로 향했다. 판결문에 이장형을 데리고 북한에 갔다 왔다는 재일동포 A씨의 이름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 신부는 일본에 직접 가지 말라는 말을 듣고 일본에 가서는 행적을 감시하는 기관으로부터 ‘잘 도착했느냐’는 사찰마저 받았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만나게 된 A씨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이장형을 데리고 북한에 다녀올 정도면 모를 리 없을 텐데 A씨는 ‘이장형 씨가 누구냐’고 되물은 것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A씨는 판결문 내용을 살펴보더니 ‘판결문대로라면 내가 간첩 주범이라는 말이냐’라고 반문하기까지 했다.

북한에 다녀와 간첩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판결문이었지만 시작부터 사실관계가 달랐다. 이장형을 데리고 북한에 갔다는 A씨는 그저 조총련 학교에 다닌 사람이었다. 검사가 조총련 학교에 다닌 아무나 골라 공소장에 이름을 집어넣어 이장형과 엮은 것이다. 

# 가족 볼모로 한 협박에 무너져 ‘허위자백’

이장형은 붙잡혀 온 순간부터 모진 고문을 받고 허위자백을 했기 때문에 이 같은 내용을 당연히 확인할 길이 없었다. 또 재판 과정에서 알아차린다고 해도 속수무책이었다. 간첩 증거가 ‘만년필’ 하나밖에 없었어도 무기징역이 선고되는 악랄한 권력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피해자 이장형은 일거리를 찾아 일본으로 밀항해 살다가 돌아온 뒤 1984년 치안본부 대공수사관들에게 연행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장장 57일간 불법 구금되며 고문을 받았다. 

고문기술자에게 고문을 받은 끝에 이장형은 일본에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에 포섭돼 북한에 다녀왔고 간첩행위를 했다는 거짓 사실을 허위 자백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물과 전기를 활용한 고문을 시작으로 매운 고춧가루를 코에 넣고 잠을 재우지 않는 등 모진 고문이 가해졌지만 오랜 기간 이장형은 버텼다. 그러나 그를 무너뜨린 건 다름아닌 ‘가족’이었다. 

왜 허위자백을 했냐는 남 신부의 질문에 이장형은 “신부님은 안 당해 봤으니 모르실 거다. 그들은 ‘당신 딸과 아내를 잡아다가 당신에게 했던 고문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차마 그걸 감당할 수 없어 자백서를 썼다”고 말했다.

제주조작간첩사건 피해자 강희철(사진 왼쪽) 씨와 이장형 씨. 두 사람은 재심을 통해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장형 씨의 경우 재심 선고 이전 안타깝게 숨을 거뒀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조작간첩사건 피해자 강희철(사진 왼쪽) 씨와 이장형 씨. 두 사람은 재심을 통해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장형 씨의 경우 재심 선고 이전 안타깝게 숨을 거뒀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 억울함 풀기 위해 조직한 ‘천주교 인권위원회’ 무죄 이끌다

남 신부는 일본에 가서 재일동포 관련 간첩 사건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간첩조작사건을 조사한다는 사실이 교포사회에 알려지자 억울한 사람들이 잇달아 찾아온 것이다. 

이장형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간첩으로 조작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1994년 ‘천주교 인권위원회’라는 전국 조직을 만들었다. 당시 제주에는 최 변호사가 인권위를 도왔으며, 부산지역은 문재인 변호사가, 서울은 김형태 변호사가 사건을 맡았다. 

남 신부는 집행위원장을 맡아 이장형 석방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뒤로는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는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억울한 사연 소개와 함께 이장형을 가석방 명단에 올릴 수 있게 대통령께 말해달라 부탁했고, 우연인지 이야기가 전달 된 것인지 실제 가석방은 이뤄졌다. 

또 이장형 석방 운동 중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연 ‘일일찻집’에서 비슷한 내용으로 무기징역을 살고 있는 강희철의 사연을 알게 된 남 신부는 강희철 석방 운동도 함께 하게 됐다. 

강희철 역시 불법 구금돼 고문을 받고 허위자백을 한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다. 그는 1986년 4월 제주경찰국 대공분실로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 공안당국은 불법구금해 허위자백을 받아 낸 뒤 영장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만들어냈다. 

두 피해자의 사연을 알리기 위해 남 신부는 부단히 노력했고 그렇게 두 피해자는 2008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장형은 재판 결과를 확인하지 못한 채 고인이 됐다. 억울함을 풀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렇지만 제주출신 간첩조작사건 재심 중 첫 무죄를 받아 낸 이 판결은 항후 피해자들이 재심을 청구하는 자극제가 됐다. 

남 신부는 “처음에는 설마 하며 간첩으로 조작됐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판결문을 보고 조작이라는 확신을 하게 됐다”며 “남이 죽든 말든 간첩을 잡으면 진급하고 포상금을 받던 시절이니 그런 환경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괴물’들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지방법원에 재심 청구서를 제출하는 강희철 씨(사진 가운데)와 천주교인권위 김재영 변호사&nbsp;ⓒ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지방법원에 재심 청구서를 제출하는 강희철 씨(사진 가운데)와 천주교인권위 김재영 변호사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서울중앙지법 형사접수과에 재심청구서를 직접 제출하고 있는 이장형 씨.&nbsp;이씨는 2005년 8월24일 천주교인권위원회와 함께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청구'를 접수했다. ⓒ오마이뉴스 김덕진<br>
서울중앙지법 형사접수과에 재심청구서를 직접 제출하고 있는 이장형 씨. 이씨는 2005년 8월24일 천주교인권위원회와 함께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청구'를 접수했다. ⓒ오마이뉴스 김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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