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간첩조작사건] (8) 이복형 꾀임에 북한행, 2020년 재심 ‘무죄’ 선고
힘으로 권력을 움켜쥔 군사독재정권은 정치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민간인을 간첩으로 몰아넣고 반공 분위기를 조성, 여론의 관심을 돌렸다. 무고한 피해자들은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고, 제대로 된 변호조차 받지 못한 채 유죄판결을 받았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사건만 20건, 피해자만 53명에 달한다. [제주의소리]는 조사보고서에 나타난 제주출신 간첩 조작사건 피해자의 인터뷰 녹취록을 바탕으로 억울한 그들의 사연을 매주 한 차례 소개한다. / 편집자 글 |
일본으로 넘어가 돈을 벌어와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찰나 이복형이 찾아와 일본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땐 몰랐다. 꾐에 넘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북한에 가게 될 줄은.
오경대(84) 씨는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한 제주 간첩 조작사건 피해자다. 그에게 씌워진 ‘빨갱이’, ‘간첩’이라는 낙인은 무려 53년이 지난 뒤에야 지워졌다.
지난 2020년 진행된 재심에서 재판부가 1967년 오씨에게 씌워진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 뒤늦게 낙인은 지워졌지만, 살갗 깊이 파고든 흉터는 사라지지 않았다.
# 이복형 꾐에 넘어간 북한, 피 토하는 기지로 ‘탈출’
일본에 간다는 배를 타고 보니 어느덧 북한에 도착했고, 피를 토해내는 기지로 가까스로 제주도에 돌아왔다. 모든 것은 6.25전쟁 당시 행방불명된 이복형이 집에 돌아오면서 시작됐다.
1966년 6월, 이복형 오경지는 배를 타고 서귀포시 예래동 바닷가를 통해 집으로 돌아왔다. 이복형은 일본에 살며 양복감을 밀무역한다며 양복감 일부와 3만원을 어머니께 드렸고, 물건을 팔러 목포로 가던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동생(오경대)을 일본에 데리고 가 구경시켜 주겠다”고 제안했고, 오씨는 일본으로 밀항해 돈을 벌어 올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에 그길로 이복형을 선뜻 따라나섰다.
목포에 도착해 일을 처리한 뒤 일본으로 갈 줄 알았던 오씨는 아무런 의심 없이 배를 탔다. 이복형이 당시 거금인 3만원을 어머니께 드렸기에 더더욱 의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배가 도착한 곳은 목포도, 일본도 아닌 다름 아닌 ‘북한’ 땅이었다.
이복형의 꾐에 넘어가 강제로 북한에 도착한 이상 혼자 도망쳐 나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씨는 큰 병에 걸린 것처럼 기지를 발휘, 북한 당국을 속여 사흘 만에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오씨가 썼던 방법은 ‘폐디스토마’였다. 민물 가재나 게를 숙주로 삼는 기생충 폐디스토마는 사람에게 들어와 폐 병변을 일으킨다. 폐디스토마에 감염될 경우 피가 섞인 가래가 나온다. 오씨는 바로 이 점을 이용했다.
당시 마을 주변에서 잡히는 민물 게를 먹고 폐디스토마에 걸린 사람이 많았고, 오씨는 식당에서 밥을 먹던 중 일부러 헛구역질을 해 피가 섞인 가래를 토해냈다. 그길로 오씨는 제주도에 돌아올 수 있었다.
# 가까스로 돌아온 제주, 중앙정보부 ‘고문’ 끝 허위자백
오씨가 집으로 돌아온 직후인 1967년 3월 23일,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중정요원들은 오씨를 붙잡은 뒤 알뜨르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고 경기도 오산 비행장에 내린 뒤 중앙정보부로 끌고 갔다.
중정에 끌려간 오씨는 각목으로 무차별 구타를 당하면서 “어떤 기밀을 탐지하려 했으며 어떤 임무를 부여받았느냐”고 추궁받았다. 피를 토하는 기지를 발휘해 겨우 탈출한 사실을 말했지만 무시됐고,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구치소에 감금됐다.
1심에서 15년형을 선고받은 뒤 항소심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변호사가 “큰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니 절반은 감경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항소심 판결 하루 전 청와대 기습을 시도한 북한 ‘김신조 일당’의 1.21사태가 발생하면서 남북간 분위기가 급랭하며 그대로 형이 확정됐다.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오씨는 대전과 대구교도소에서 복역한 뒤 1981년 8월 15일 가석방됐다. 석방된 이후로도 20년 넘게 사찰을 받았다. 대통령이 제주도에 온다고 할 때면 형사들이 집을 왔다갔고, 아내도 직장에서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 영혼 없이 산 세월 “재심 전까지 나는 죽어있었다”
오씨는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기 전까지 수십 년 동안 영혼 없이 살아왔다고 했다.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고 아내와도 이혼했으며, 교도소에서 나온 뒤로는 친척들에게도 외면받았다. 어쩌다 동네 사람들과 마찰이 일 때면 늘 ‘빨갱이’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오씨는 고문 끝에 허위자백해 수형 생활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버지가 월북자로 둔갑하는 억울함까지 겪었다. 보수세력이 펴낸 ‘제주4.3진실 도민보고서’에 아버지가 ‘좌익활동을 하다 월북해 아들을 간첩으로 보낸 인물’로 기술됐던 것이었다.
아버지 오종흠은 제주4.3 당시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피해자다. 국무총리 소속 제주4.3위원회는 오종흠을 4.3희생자로 결정했으며, 진실화해위원회는 고인을 제주예비검속사건 희생자로 판단하는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오종흠은 서귀포시 예례동 뿐만 아니라 중문면 전체를 아우르는 유지였다. 일제강점기부터 마을에 소학교 교사를 짓기 위해 노력하던 중 해방되자 기성회장을 맡아 교사 건축을 완성시킨 사실이 예래동지에 나타난다.
고문 후유증과 연좌제, 보호관찰 피해를 겪은 오씨는 자신의 억울한 피해를 뒤로 두고서라도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킨 사실이 바로잡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는 오씨. 억울함이 풀리지 않은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들은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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