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간첩조작사건] (2) 간첩 미수 혐의로 ‘15년형 선고’ 김양진 씨

힘으로 권력을 움켜쥔 군사독재정권은 정치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민간인을 간첩으로 몰아넣고 반공 분위기를 조성, 여론의 관심을 돌렸다. 무고한 피해자들은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고, 제대로 된 변호조차 받지 못한 채 유죄판결을 받았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사건만 20건, 피해자만 53명에 달한다. [제주의소리]는 조사보고서에 나타난 제주출신 간첩 조작사건 피해자의 인터뷰 녹취록을 바탕으로 억울한 그들의 사연을 매주 한 차례 소개한다. / 편집자 글

“제일 고통스러운 건 육체적인 고통보다 잠을 못 자게 하는 겁니다. 취조관 2명이 서로 교대해 가며 취조를 하는데, 하루 이틀까지는 몰라도 잠을 못 잔 채 일주일가량 지속되니까 나중에는 날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했지?”라고 물으면 “예!”하고. “했지?, 예!” 그걸로 끝났어요. 그들은 내게 “그래도 너는 잘 봐준 거다. 재판에 가면 알게 될 거야”라고 말했습니다.”(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 김양진 씨 인터뷰 중)

1931년생 김양진 씨(실제 1930년생)는 간첩 미수 혐의로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허위자백, 1심 무기징역-항소심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일본에 있던 양누나로부터 받은 생활비와 일본에서 가지고 온 라디오는 각각 공작금과 간첩 증거로 활용됐다. 사진=김종민. ⓒ제주의소리
1931년생 김양진 씨(실제 1930년생)는 간첩 미수 혐의로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허위자백, 1심 무기징역-항소심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일본에 있던 양누나로부터 받은 생활비와 일본에서 가지고 온 라디오는 각각 공작금과 간첩 증거로 활용됐다. 사진=김종민. ⓒ제주의소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에 있는 형님을 미끼로 간첩 활동을 하라고 협박하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 공작원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향 제주에 왔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제주에 가면 더 이상 저들도 어떻게 못 하겠지’라는 생각으로 돌아온 제주였지만, 먼저 제주도에 온 사람이 간첩혐의로 체포되자 연달아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결국, 자신이 뭐라고 이야기하는 줄도 모른 채 어느새 간첩이 돼 있었다.

공안당국이 김씨를 간첩으로 만든 증거는 그야말로 조악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공안당국은 일본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김씨의 매형을 조총련으로 조작하고 그로부터 공작금을 받았다며 반국가단체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를 덮어씌웠다. 한국말도 잘 못하는 김씨가 사람들을 포섭했다는 짜맞추기식 조서도 포함됐다.

심지어 그 돈은 일본에 사는 양누나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동생에게 전해준 것이었다. 보내달라 한 적도 없는 순수한 생활비 명목이었다. 더군다나 매형은 조총련의 반대 격이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인단체로 인정받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소속이었다. 

또 공안당국은 김씨가 가지고 있던 트랜지스터, 일본에서 가져온 흔해 빠진 라디오 1대를 간첩 증거로 제시했다. 김씨 진술 외에 증거는 이뿐이었다. 사실의 인정은 반드시 증거에 의해야 한다는 원칙인 ‘증거재판주의’가 이미 사라진 재판에 임하게 된 것이다. 

더 기막힌 사실은 판결문 스스로 ‘간첩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미수에 그쳤다’고 표현한 점이다. 사실도 아니거니와 설령 사실이더라도 미수에 그친 김씨에게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고, 판사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결론적으로 형량은 항소심에서 ‘15년형’으로 확정됐다.

당시 김씨의 변호를 맡았던 국선변호인은 형식적으로만 임했다.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 묻지도 않고 재판이 법정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판사실에서 이뤄져도 반응하지 않았다. 

김씨는 당시 법정이 아니라 판사실에서 검사의 구형을 들었고 판사의 선고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법과 규정을 모두 어긴, 있을 수 없는 재판을 받았던 것이다. 이후 항소심 과정에서 항소이유서 역시 김씨 본인이 감방에서 직접 썼다고 한다.

# 의지할 곳 없어 조련 관심…하지만 공산주의 환멸 느껴 비리 성토 앞장

김씨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 아버지가 있는 일본 히로시마로 넘어가 어렵게 살다가 병환으로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잔인한 운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원자폭탄이 떨어져 어머니와 동생을 모두 잃은 것. 

살아남은 건 자신과 형, 누나, 매형, 조카뿐이었다. 누나와 매형, 조카는 원폭에서 살아남아 오사카로 떠났고 형은 배를 타러 나갔다가 해방 이후 돌아왔다. 갈 곳이 없어진 김씨는 친척이 있던 오사카로 넘어가 함께 살게 됐다. 

그러던 중 김씨는 6.25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듣게 됐고, 이내 민족의식이 싹텄다. 당시 재일동포계는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과 소극적인 민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집에 놀러온 사람의 집회에 같이 가보자는 이야기에 오사카의 한 수영장에 나간 김씨는 수천 명이 모여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보고 “나도 한국사람, 조선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렇게 김씨는 조련계 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조련 산하 청년동맹 오사카 동성구 문화부장을 맡으며 활동을 시작했지만, 김씨는 사상교육을 위한 ‘김일성 선집’을 비롯한 공산주의 서적을 읽으며 의심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운동과 정책, 체제를 비판하는 ‘스탈린 비판’을 읽은 뒤로는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꼈다.

한번 싹튼 의심은 쉽게 가시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조총련계 원장이 운영하는 병원의 비리에 항의하다가 조직과 인연을 끊게 됐다. 이후 1년 가까이 파친코에 빠져 시간을 보내다가 누군가를 만나게 됐다. 김씨를 찾아온 ‘누군가’는 김씨를 간첩으로 만든 공작원이었다.

# 북한에 있는 형을 미끼로 협박, 서로의 안전 위해 ‘제주행’

당시 조련 산하 조직인 민애청 오사카 동성구 위원장을 맡았던 강철순은 김씨에게 공작원을 보냈다. 조련계 활동을 한 적 있는 김씨에게 접근해보라는 이야기와 함께다. 

조직을 떠난 자신을 회유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간파한 김씨는 에둘러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공작원은 “네 형님이 이북에 있지 않느냐”라며 돕지 않으면 북한에 있는 형님이 무사하지 못할 수 있다는 식으로 협박하기 시작했다. 김씨의 형님은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이 북한에 송환될 때 넘어갔다.

공작원으로부터 “한국에 가서 민족을 위한 일을 할 때까지 기다려라”는 말을 듣게 된 김씨는 재차 거절했지만, 협박에 못 이겨 생각을 바꿨다. 제주로 돌아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북한에 가서 교육을 받으라는 권유도 끝끝내 거절했다.

공작활동을 위해 암호를 작성하거나 해독할 때 쓰는 난수표 교육을 받을 때도 모르는 척 일관했다. 심지어 테스트를 통과하지도 못했다. 아무 활동도 할 수 없는 수준일 때 공작원은 추상적인 ‘결정적 시기를 위해 배워라’는 말과 함께 김씨를 제주로 보냈다.

그렇게 김씨는 공작활동과 별개로 예전부터 약속된 아버지 사촌의 양자로 1964년쯤 제주에 왔다. 입도 2년 뒤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한 김씨는 농사를 지으며 살던 1973년, 간첩혐의로 체포돼 1988년 올림픽이 열린 해 석방됐다. 

# 억울한 간첩 누명 “늘 재심 생각하지만 방법 몰라”

김씨가 공작원으로부터 협박과 회유를 받게 된 것은 강철순의 추천 때문이었다. 당시 강철순은 공작원으로부터 사람을 추천해달라는 말을 듣고 김씨를 추천했다.

하지만 문제는 제주에서 시작됐다. 김씨는 제주에서 우연히 만난 강철순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다. 하지만 강철순은 공안당국에 잡혀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제주에 들어온 김씨의 이름을 댔다.

김씨는 제주에서 붙잡힌 뒤 서울로 끌려가 경찰 대공분실로 추정되는 민간 회사 간판이 걸린 곳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허위자백했다. 그렇게 약 13년이란 긴 세월 동안 수형 생활을 했고, 모범수가 돼 2년여 일찍 석방됐다. 

김씨는 “출소하고 나서 재심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했지만, 돈도 들고 방법도 잘 몰라 시도를 못했다”며 “어느 변호사가 돈을 주면 재심을 해주겠다 해서 돈을 줬지만 엉뚱한 말만 계속해 결국 돈을 돌려받고는 포기했다”고 말했다.

김씨의 억울함은 대를 이어 전해졌다. 자녀들은 간첩혐의로 수형 생활을 한 아버지의 기록 때문에 국가공무원이 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김씨는 아직 누명을 벗지 못해 ‘간첩’의 꼬리표를 그대로 달고 있다. 용기를 내고 진실을 말한 김씨의 억울함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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