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간첩조작사건] (6) ‘물애기’ 딸 두고 끌려가 ‘전기-물레방아 물고문’ 당해 허위자백

힘으로 권력을 움켜쥔 군사독재정권은 정치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민간인을 간첩으로 몰아넣고 반공 분위기를 조성, 여론의 관심을 돌렸다. 무고한 피해자들은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고, 제대로 된 변호조차 받지 못한 채 유죄판결을 받았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사건만 20건, 피해자만 53명에 달한다. [제주의소리]는 조사보고서에 나타난 제주출신 간첩 조작사건 피해자의 인터뷰 녹취록을 바탕으로 억울한 그들의 사연을 매주 한 차례 소개한다. / 편집자 글

일본에 사는 조총련 소속 친척을 만나거나 그 집안 제사를 지낸 적도 있었지만, 질문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단지 “평양에서 수류탄 제조법을 배워오지 않았느냐”는 추궁만 받았다. 

조작간첩을 만들기 위해 흔히 사용한 빌미인 일본 조총련 소속 친척과의 접촉도 아니었다. 공안당국은 수류탄 제조법을 외우도록 한 뒤 허위자백만을 요구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수류탄 제조법을 배웠냐는 질문에 “예”, 평양에 갔었느냐는 추궁에 “예”라는 ‘조작된 진실’을 만들기 위한 정해진 답변 뿐이었다.

제주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양영배(72, 실제나이 73) 씨는 1986년 어느 날, 갓 돌이 지난 딸을 두고 사라봉 부근 한라기업사로 끌려갔다. 한라기업사는 민간 기업 형태를 띤 보안사령부의 제주지부로 민주주의를 짓밟은 전두환 정권 시절 악명을 떨친 군 조직이었다.

‘한라기업사에 다녀오면 반병신이 된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실제 다녀온 사람들은 혹독한 고문에 시달려 평생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양영배 씨는 1986년경 이유도 모른 채 한라기업사(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 취조를 당했다. 보안사에서는 피해자에게 뜬금없이 “북한에 다녀오지 않았느냐? 평양에서 수류탄 제조법을 배우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며 고문했다. 사진=김종민. ⓒ제주의소리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양영배 씨는 1986년경 이유도 모른 채 한라기업사(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 취조를 당했다. 보안사에서는 피해자에게 뜬금없이 “북한에 다녀오지 않았느냐? 평양에서 수류탄 제조법을 배우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며 고문했다. 사진=김종민. ⓒ제주의소리

# 본 적도 없는 수류탄 “기억 못 해? 정신 차려야겠다”며 고문

양씨는 한라기업사로 끌려가 다짜고짜 북한 평양 어딘가에서 누구를 만나 소개받고 폭탄을 제조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냐, 폭탄 제조법을 말해보라는 등 추궁을 받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질문을 해대던 공안당국은 폭탄 제조법을 알려준 뒤 어떻게 하는 건지 말해보라고 했다. 외우지 못하니 “어저께 말해줬잖아”라며 고문을 가했다.

볼펜으로 손가락을 쪼이고 온몸을 폭행하던 고문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다. 양씨 표현으로 ‘제라한 고문 부대’가 온 뒤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끔찍한 고문이 시작됐다. 

눈을 가린 채 계단을 따라 끌려간 곳에서 양씨는 양팔이 천장에 묶였고 다리는 물통 속에 담겼다. 몸통은 움직일 수 없도록 포박됐다. 똑바로 서 있을 때는 다리가 물통에 잠기고, 뒤집혔을 때는 머리가 물통에 빠지는 ‘물레방아’형 구조였다.

“네가 기억을 못 한다고 하면 되겠나. 정신 좀 차려야겠다”라는 말과 함께 양씨는 물레방아를 돌리듯 계속해서 숨을 쉴 수 없는 물고문을 당했다. 그래도 거짓 자백을 하지 않자 공안당국은 전선을 끌어 와 양씨 손에 물리더니 물레방아를 돌리면서 전기를 흘려보냈다. 

# 제라한 고문 전 허위자백, 그러나 고문은 계속됐다

양씨는 ‘제라한 고문’을 받기 전에 평양에 다녀와 수류탄을 제조했다는 등 허위자백을 했다. 그럼에도 보안사는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이어갔다. 마치 나가서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협박하듯 풀려나기 전 무참히 고문을 가했다. 

양씨는 고문 받았을 때 몸이 어땠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막 고통스럽다가 고문이 끝나면 멍해진다. 아무 생각도 안 난다. 심지어 가족도 생각나지 않는다”며 “오죽하면 풀려나는 날 집으로 가지 않고 산으로 가려 했다. 모든 게 귀찮았고 그만 살고 싶었다”고 증언했다.

또 고문을 받을 때 이곳저곳에서 쇳소리와 쿵쿵거리는 소리가 많이 났다고 했다. 취조실 벽을 나무로 만들었는지 사람이 벽으로 던져질 때면 ‘쿵쿵’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소리가 들리라고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 같다”고 했다. 

양씨는 “고문받으며 지르는 비명을 계속 듣고 있다 보면 완전 사람이 미친다. 그 와중에 나만 죽는 게 아니라 벗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위로가 됐다”며 “소리를 들어보면 나 말고도 최소한 3~4명은 더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 일본 조총련 친척 만난 사실은 묻지도 않아

공안당국은 보통 간첩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를 많이 악용했다. 당시 제주에서는 4.3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 목숨을 부지하거나 돈을 벌고 있었던 도민들이 많았다. 이때 재일동포 사회는 북한계 ‘조총련’과 남한계 ‘민단’으로 나뉘었다. 

계열이 나뉘었다 해도 ‘한민족’이라는 사실은 나뉘지 않았다. 다른 계열 단체에 소속됐던 사람들은 서로가 함께 밥을 먹고 제사를 지내는 등 큰 충돌이나 갈등이 없었다고 진술한다. 이념을 떠나 단지 삶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제주 사람들에게는 일본에 살고 있는 친척이 조총련인지, 민단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가족, 친척일 뿐이었다. 그러나 독재정권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며 밥을 먹는 단순한, 당연한 일들까지 간첩 활동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양씨의 사연은 조금 달랐다. 일본에 사는 조총련계 5촌을 만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에 대한 추궁은 전혀 받지 않았던 것이다. 공안당국은 초지일관 평양 방문 사실과 수류탄 제조법 학습 등 혐의를 부르는 대로 쓰고 외우라고 했다.

그렇게 한숨도 못 잔 상태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 허위로 자백했고, 겨우 풀려났다. 친척이 경찰서장이었고 친구가 중앙정보부에 다니고 있었지만, 전혀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그들 역시 ‘손을 쓸 수가 없다’고만 했다.

고문받을 때 천장에서 뱀이 기어 다니는 환각을 겪었고, 풀려나서는 사람을 제대로 보고 말하지 못했다. TV에 고문 관련 내용이 나오면 전원을 꺼버리기 일쑤였다. 또 고문 사실을 말해도 주변에선 ‘요즘 세상에 무슨 전기고문이냐’라며 믿지 않았다. 

양씨는 “간첩을 제대로 만들면 (보안사 직원들이)진급하고 모든 걸 다 하지 않나. 나처럼 고문하다가 쓰레기처럼 버리는 건 그들에게 이익도 없지만, 손해도 없는 일”이라며 “앞으로는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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