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대 개교 70주년]③ 60년대 말부터 종합대 승격 위한 도민여론 본격화...'아라캠퍼스' 준비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4.3과 6.25 한국전쟁의 참혹한 환경에서도 인재양성에 진심을 다한 도민 열망으로 탄생한 국립제주대학교가 2022년 개교 70주년을 맞았다. 고희(古稀)의 나이를 맞은 제주대의 역사는 교육사이든 지역사이든 사회적으로 조명하고 평가해야 할 유의미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제주의소리]는 진리와 정의, 창조라는 창학이념 아래 숱한 지식인과 인재들을 배출하며 제주 현대사의 한 축을 맡아 지역과 호흡해온 국립 제주대학교 70년 영욕의 역사를 집중 조명해본다. [편집자 주]
제주대학교 통합캠퍼스 공사 모습(1977). 당시 제주시 아라동 허허벌판 위에 건설 중인 사범대학과 대학 부지내 곧게 개설한 도로가 눈에 띈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대학교 통합캠퍼스 공사 모습(1977). 당시 제주시 아라동 허허벌판 위에 건설 중인 사범대학과 대학 부지내 곧게 개설한 도로가 눈에 띈다. 사진=제주대학교.

한국전쟁 포화와 제주4.3으로 빚어진 시련 속에서도 제주도민의 고등교육에 대한 열망은 제주대학이 초급 대학으로 출발한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1962년 제주대가 국립대학으로 승격되는 결실을 이루기도 했다.

더 나은 교육을 위한 도민들의 갈망은 국립대학 승격에 만족하지 않았고 1960년대 말부터 ‘종합대학 승격’이라는 새로운 목표로  향해 더욱 뜨거워졌다. 

종합대학 승격으로의 열망이 본격화된 것은 제주대가 국립대학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시도에 비해 대학 성장과 발전이 더딘 데다, 아직 단과대학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도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연간 1000여 명의 학생은 종합대학 진학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나가야만 했고 막대한 교육비 부담이 따르게 됐다. 더군다나 단과대학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원활한 산학협력을 이루지 못해 지역사회 발전에도 힘을 보탤 수 없다는 구조적 한계가 있었다. 

이에 대학 내부는 물론 도민사회에서는 대학에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종합대학교로 승격돼야 한다는 의견이 도민사회에 뜨겁게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968년 당시 학장이었던 김계용 학장을 비롯한 교수들은 권오병 문교부 장관에게 종합대학 승격을 건의했지만, 시기상조라는 답변만 들은 채 꿈을 접어야 했다. 덩달아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나뉜 캠퍼스의 통합이라는 선결 과제도 풀어야 했다.

국립 제주대학은 1964년 이농학부를 서귀포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두 개의 캠퍼스를 운영하게 됐다. 제주시 부지를 구하기 어렵다는 점과 서귀포가 농업 분야 실습 적지라는 점, 서귀읍(현 서귀포시)민의 헌신적인 지원이 뒷받침된 점 때문에 서귀포로 이전했으나 막상 분리 운영되니 단점으로 대두됐던 것이다. 

캠퍼스가 분리되면서 각 캠퍼스에 갖춰야 하는 시설이 두 배로 필요해졌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력과 예산이 추가로 투입돼 효율이 떨어진다는 문제에 당면했다. 덩달아 교양과목 강의와 통학 등 학사운영의 비효율성도 늘어났다. 

더불어 서귀포캠퍼스의 농학부와 수산학부는 지리적 여건 탓인지 정원 미달 현상이 나타났고, 용담캠퍼스나 서귀포캠퍼스 모두 종합대학 캠퍼스로 확장시키기엔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이같은 캠퍼스 분리에 따른 여러 문제가 나타난 제주대는 종합대학 승격에 앞서 캠퍼스를 통합해야 한다는 여론이 떠올랐다. 이대로 간다면 영세한 단과대학 수준을 탈피하지 못한다는 위기의식도 이런 여론 형성에 한몫했다.

이설통합 아라캠퍼스 이설 예정지 기념촬영(1974년). 대학 관계자들의 기념사진에 화살표 모양과 '제주대학 이설 예정지'라고 쓴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사진=제주대학교.
이설통합 아라캠퍼스 이설 예정지 기념촬영(1974년). 대학 관계자들의 기념사진에 화살표 모양과 '제주대학 이설 예정지'라고 쓴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사진=제주대학교.
통합 아라캠퍼스 이설부지에서 원만한 캠퍼스 이전을 기원하는 고사(1974)를 지내는 모습. 사진=제주대학교.
통합 아라캠퍼스 이설부지에서 원만한 캠퍼스 이전을 기원하는 고사(1974)를 지내는 모습. 사진=제주대학교.

캠퍼스 이설 통합은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제주를 찾았을 당시 김계용 학장이 캠퍼스 통합을 건의하면서 구체화 되기 시작했다. 당시 문교부는 대통령의 지시로 제주대학발전위원회를 구성, 제주대학 이전 계획 개요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1973년 10월 대통령 재가를 받아 통합 이설계획이 추진됐고, 기존 재산을 매각해 예산을 충당한다는 방침에 따라 제주대는 목장 매각과 강의실 증축 공사 중단 등의 조치로 부지 매입을 위한 자금 확보에 나섰다. 

당시 제주대는 1년 2개월 만인 1975년 9월, 총 1억 398만 9000원을 투입해 30만 7197평에 이르는 제주시 아라동 부지 매입을 완료했다. 아라동으로의 캠퍼스 이설 통합을 위한 역사적인 대공사가 사실상 시작된 것이다.

1978년 제주에 다시 내려온 박정희 대통령은 제주대 이설 공사현장을 찾은 뒤 △본부 및 교육에 필요한 기본시설을 1979년까지 완공, 1980년 초 이전할 것 △교수 후생을 위한 교수아파트 1동을 우선 건립할 것 △용수 문제해결을 위한 지하수를 개발할 것 △대학 진입로를 제주도지사가 책임지고 4차선으로 포장할 것 등을 지시했다. 

이 같은 지시를 받은 변시민 당시 학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그 자리에서 종합대학교 승격을 공식 건의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종합대학교 승격은 통합 이설 사업이 끝난 뒤 검토할 사항’이라고 선을 그었다.  

1978년 6월, 이설통합을 위한 아라동 제주대 건설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제주대학교.
1978년 6월, 이설통합을 위한 아라동 제주대 건설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제주대학교.
1960년대 말 용담캠퍼스 전경(현 제주사대부고). 법학부(중앙)와 강당(오른쪽)이 보인다. 사진=제주대학교.
1960년대 말 용담캠퍼스 전경(현 제주사대부고). 법학부(중앙)와 강당(오른쪽)이 보인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대는 당시 박 대통령 지시에 따라 본관과 교양학부, 지역계발학부, 체육관, 도서관 등 본격적인 건물 공사에 착수, 1979년 8월에는 교수아파트 1동이 우선 준공돼 30세대가 입주하고 그해 12월에는 서귀포캠퍼스 농학부와 수산학부가 분리 15년 만에 아라동 캠퍼스로 이전했다.

용담캠퍼스에 있던 지역개발학부와 교육학부는 조금 늦은 1980년 2월, 초급대학 시절부터 사용해 온 용담캠퍼스를 25년 만에 떠나 아라동 통합캠퍼스로 옮겼다. 체육교육과는 체육관과 종합운동장이 완공된 1981년 이전했다. 

다른 대학에서 찾아보기 힘든 제주대 아라캠퍼스의 특징은 현재 본관 북쪽에 있는 야외음악당 잔디광장, 돌하르방 등 제주 역사·민속자료 등을 전시한 야외박물관 등을 조성한 점이다. 학생 휴식공간뿐만 아니라 봄철 왕벚꽃이나 겨울 설경을 보러 오는 도민들의 휴식 산책 공간으로도 활용되는 등 설계 당시부터 도민과 함께 하려는 노력이 깃들었다. 

수년에 걸친 캠퍼스 통합 이설 사업이 점차 마무리 되면서 국립 제주대는 용담캠퍼스·서귀포캠퍼스 이원 체제를 접고 '아라캠퍼스 시대'라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했고, 곧바로 종합대학교 승격을 향한 목표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초급으로 시작한 제주대학을 국립으로 승격 이관했고, 다시 국립 종합대학으로 완성하려는 도민의 열망은 그렇게 아라캠퍼스에서 영글기 시작했다. 

# 4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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