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대 개교 70주년]⑦ 지역사회 함께한 제주대…학령인구 감소 등 위기 타파 ‘청사진’ 중요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4.3과 6.25 한국전쟁의 참혹한 환경에서도 인재양성에 진심을 다한 도민 열망으로 탄생한 국립제주대학교가 2022년 개교 70주년을 맞았다. 고희(古稀)의 나이를 맞은 제주대의 역사는 교육사이든 지역사이든 사회적으로 조명하고 평가해야 할 유의미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제주의소리]는 진리와 정의, 창조라는 창학이념 아래 숱한 지식인과 인재들을 배출하며 제주 현대사의 한 축을 맡아 지역과 호흡해온 국립 제주대학교 70년 영욕의 역사를 집중 조명해본다. [편집자 주]

뼈아픈 이데올로기의 대립 아래 빚어진 4.3과 6.25 한국전쟁의 공포와 시련 속에서도 도민 교육열을 바탕으로 인재를 양성해 온 국립제주대학교가 어느덧 개교 70주년이라는 역사를 맞았다. 

전쟁 포화 속에도 도민들은 교육열로 제주대학을 꽃피워냈고, 영욕의 세월을 보낸 제주대는 지역사회 인재를 배출하는 지역거점국립대학교로 거듭났다. 

진리와 정의, 창조라는 창학이념 아래 숱한 지식인과 인재들을 배출하며 지역과 호흡해 온 제주대의 역사는 제주 현대사의 한 축을 담당한다. 

역사의 한 축을 맡아 제주 발전에 힘을 보태왔지만 학령인구 감소 등 이유로 생존에 위협을 받는 지방대학의 위기론이 일고 있는 현실에서 자유로울 순 없는 상황이다. 

시대적 흐름을 거스를 수 없고 언제 위기가 닥칠지 모르기에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그려 백년대계를 세우는 등 흔들리지 않는 대학을 만들기 위한 준비에 더 집중해야 하는 까닭이다.

창학이념을 바탕으로 지역 인재 양성과 지역 발전을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온 제주대가 앞으로의 새로운 100년을 향한 대전환을 어떻게 보여줄지 관심이 모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올해 개교 70주년을 맞은 국립 제주대학교의 첫 출범은 한국전쟁과 4.3의 포화 속에 제주도민의 뜨거운 교육열로 이뤄졌다. 1952년 도민 열망으로 탄생한 제주초급대학 개교 기념식.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올해 개교 70주년을 맞은 국립 제주대학교의 첫 출범은 한국전쟁과 4.3의 포화 속에 제주도민의 뜨거운 교육열로 이뤄졌다. 1952년 도민 열망으로 탄생한 제주초급대학 개교 기념식.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54년 제주초급대학 동관. 제주 현무암을 단정하게 깎아 쌓은 건물 외벽이 단출하면서도 정겨운 모습이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54년 제주초급대학 동관. 제주 현무암을 단정하게 깎아 쌓은 건물 외벽이 단출하면서도 정겨운 모습이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대는 1951년 11월 5일 도민 교육열로 탄생한 제주대학원을 바탕으로 1952년 제주초급대학 설립을 통해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당시 설립 인가신청서에는 일제강점기부터 교육열이 높았던 제주도민들의 상황을 언급한 뒤 육지부에 비해 높은 비율로 중등학교가 설립됐으나 고등교육 기회가 없다는 호소가 담겼다. 

그만큼 제주의 부모님들은 자식 교육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으며, 지식인들과 지방 유지들 역시 제주도의 발전을 위한 큰 그림을 꾸준히 그려온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더불어 4.3으로 지역이 피폐해지는 등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도 지역사회가 한 몸이 돼 고등교육기관인 제주대를 만들어냈다. 

용담캠퍼스를 지어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한 1960년대에는 도립제주대학에서 국립제주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성장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으며, 한국 건축계 거장인 故 김중업 선생은 용담캠퍼스 본관을 지어 제주 건축사에 발자취를 남기기도 했다. 

한국 현대건축사의 큰 축을 이루었던 김중업이 설계한 구 제주대학교 본관 건물은 ‘르 꼬르뷔제’의 근대건축 5원칙을 적절하게 혼합시킨 건축 교과서와도 같은 건축물로 평가된다.

국립 제주대학교의 상징이었던 이 건물은 1964년 착공해 1969년에야 준공됐다. 연건평 1900㎡, 4층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불과 30년도 지나지 않은 1995년 10월에 허망하게도 철거됐다. 

지금의 구조 실력으로는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건축물이었지만, 바다에 떠 있는 커다란 크루즈선을 연상케 했던 제주대 구 본관은 비용과 용도 문제로 되살아나지 못한 채 1995년 불과 30년도 사용하지 않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제11대 제주대 총장으로 부임한 김일환 총장 역시 제주대 구 본관 건물의 상징성과 중요성을 고려해 해당 건물을 아라캠퍼스에 복원, 제주대를 상징하는 건물로 세우겠다고 공약하기도 했다. 

바다에 떠있는 대형 선박의 외형이나 미래도시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디자인의 건축물인 제주대학교 구 본관(용담캠퍼스) 건물. 우리나라 현대건축의 거장 故 김중업 선생의 역작으로 꼽히는 이 건물은 연건평 1900㎡, 4층 건물로 지어졌는데 제주대가 국립대학으로 승격된 첫 해에 이뤄진 가장 중요한 핵심 사업이었다. 구 본관 정면(윗 사진)과 후면(가운데 사진) 모습이다. 정면 후면 측면의 경사로는 기하학적인 곡선으로 표현되면서 바다가 가지는 생명력과 제주도의 역동적 이미지와 부합돼 현대 건축사의 한 획을 긋는 작품으로 평가 받았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바다에 떠있는 대형 선박의 외형이나 미래도시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디자인의 건축물인 제주대학교 구 본관(용담캠퍼스) 건물. 우리나라 현대건축의 거장 故 김중업 선생의 역작으로 꼽히는 이 건물은 연건평 1900㎡, 4층 건물로 지어졌는데 제주대가 국립대학으로 승격된 첫 해에 이뤄진 가장 중요한 핵심 사업이었다. 구 본관 정면(윗 사진)과 후면(가운데 사진) 모습이다. 정면 후면 측면의 경사로는 기하학적인 곡선으로 표현되면서 바다가 가지는 생명력과 제주도의 역동적 이미지와 부합돼 현대 건축사의 한 획을 긋는 작품으로 평가 받았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대학교 통합캠퍼스 공사 모습(1977). 당시 제주시 아라동 허허벌판 위에 건설 중인 사범대학과 대학 부지내 곧게 개설한 도로가 눈에 띈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대학교 통합캠퍼스 공사 모습(1977). 당시 제주시 아라동 허허벌판 위에 건설 중인 사범대학과 대학 부지내 곧게 개설한 도로가 눈에 띈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001년 11월 1일 제주시 삼도동 제주대학교 병원 개원 당시 모습.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001년 11월 1일 제주시 삼도동 제주대학교 병원 개원 당시 모습.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국립대학 승격과 상징적인 건축물 철거 등 우여곡절을 겪어온 제주대는 아직도 더 나은 교육 환경을 목말라 하는 도민들의 갈망으로 서귀포-용담 캠퍼스 통합 문제를 딛고 1980년대 종합대학교로 승격된다. 

초급제주대학부터 시작된 고등교육 열망은 도립제주대학으로 그 바탕을 다졌으며, 국립제주대학으로의 승격으로 불이 붙어 지금의 모습인 종합 국립제주대학교로 거듭나게 됐다. 

수차례의 좌절에도 포기하지 않은 도민사회는 고된 ‘칠전팔기’ 끝에 1981년 드디어 숙원을 이루게 된다. 국립대학 승격 20년 만에 역사적인 종합대학교 승격을 달성한 것.

이어 지역적 특수성에 따라 열악했던 공공 의료 인프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예과를 신설, 제주지역 의료 인재를 배출하고 제주대학교병원을 설립하면서 공공 보건 의료사의 한 획을 그었다.

또 제주대는 교육대학의 합류로 초등부터 대학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중심축으로써 대학규모의 경제성과 고등교육의 경쟁력을 확보하게 됐다. 

통합 과정에서의 깊은 갈등으로 생채기를 남겼으나, 전국 최초로 초등과 중등교사를 동시에 양성하는 체제를 갖춘 유일한 종합대학 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60년 제주고등 교육사 대전환의 시기를 열게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7년 6월 21일 제주시 중앙로에서 호헌철폐 가두시위를 벌이는 제주대 학생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87년 6월 21일 제주시 중앙로에서 호헌철폐 가두시위를 벌이는 제주대 학생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87년 6월 21일 중앙로 시위대와 제주대 입구 시위대는 남문로터리에서 합류했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87년 6월 21일 중앙로 시위대와 제주대 입구 시위대는 남문로터리에서 합류했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고 양용찬 열사 추모대회.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고 양용찬 열사 추모대회.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대 학생들 역시 진리의 상아탑 아래에서 한국사회 민주화운동과 맥락을 같이하며 한반도 최남단의 자존을 지켜나가기도 했다. 또 제주 개발사에 경종을 울린 故 양용찬 열사와 같은 동문들은 제주대의 명예를 드높이기도 했다. 

1960년대 제주대 학생들은 4.19혁명으로 희생된 이들을 위한 시위와 4.3의 진실을 찾고자 한 진상규명 운동을 시작했으며, 군사 독재 정권 시절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강한 열기를 뿜어냈다. 

한국 민주화 운동사 가장 중요한 항쟁으로 평가받는 1987년 6월항쟁 당시에도 제주시 남문로터리와 중앙로 등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민주화를 갈망하는 뜨거운 목소리를 냈다. 제주의 자존을 세운 학생들은 경찰의 탄압을 굴하지 않고 시위를 펼쳤다. 

또 도민 주체 개발에 역행한 제주도개발특별법 제정을 막기 위해 양용찬 열사는 자신의 몸에 불을 당기며 반대를 울부짖기도 했다. 삶의 터전으로의 제주, 생활의 보금자리로의 제주를 지키고 싶다던 그의 숭고한 뜻은 지금까지도 제주사회에 큰 울림이 되고 있다. 

이처럼 70년 제주 현대사의 우여곡절을 함께 해 온 제주대는 이제 앞으로의 100년을 넘어선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학령인구의 감소와 취업난 등 다양한 변화와 위기에 처한 제주대가 지난 70년의 걸음을 되돌아보고 어떻게 미래를 준비할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제주대의 발전이 제주도의 발전이라는 말처럼 지역사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제주대가 변화하는 시대정신과 교육 환경 속에서 앞으로 어떤 역사를 써 내릴지, 어떤 도전을 이어가게 될지 주목된다. 

# 마지막 편(8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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