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재심, 역사의 기록] (44)“군경과 무장대 모두에 목숨 잃을 뻔”…누적 310명 명예회복
제주4.3 당시 군경에 의해 가족을 잃은 고령의 생존자들이 과거 4.3 토벌 과정에서 무장대에게 끊임없이 위협 받았던 자신들의 기구한 삶을 털어놓자 일순간 법정 안은 여기저기서 쏟아진 탄식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러나 탄식은 이내 곧 70여년의 한을 녹여내는 의미있는 판결이 내려지며 기쁨으로 바뀌었다.
6일 제주지방법원 형사4-2부는 ‘제주4.3사건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제12차 직권재심 청구인 30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명예회복된 16명은 1948년 1차 군법회의에 회부돼 내란 혐의로, 나머지 14명은 1949년 2차 군법회의에 회부돼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억울하게 옥살이한 4.3 피해자들이다.
합동수행단 변진환 검사는 “70여년 전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했다.
이어 변호인은 “되돌릴 수 없는 슬픔과 희생이지만, 희생자들의 명예가 이승과 저승에서 모두 회복되길 바란다”며 변호했다.
청구인 30명이 추가로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직권재심 누적 명예회복 4.3 피해자는 310명을 돌파했다.
특히 이날 법정에선 4.3 당시 자신들이 목도한 현장을 증언한 1940년생 동갑내기 할아버지 2명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법정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1949년 2차 군법회의 피해자 고(故) 김기선의 아들인 김정규(82) 어르신은 현재 서귀포시 서홍동에 살고 있지만, 고향은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다.
수망리에서도 가장 윗동네에 살던 김씨는 1947년 7살의 나이에 그 참혹한 4.3을 겪어야 했다.
가을을 맞아 보리 파종 농삿일로 밭에서 조부모·부모와 함께 일하던 와중에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도망가라는 할아버지의 다급한 말에 김씨는 동네 하천 바위 밑에 숨었다.
저벅저벅 걷는 소리와 함께 건장한 남성들의 인기척이 김씨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남성들은 군인이었고, 다행히 김씨를 발견하지 못한 군인들은 “없네, 이XX들”이라며 돌아갔다.
군인들이 사라진 뒤 집으로 돌아간 김씨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가족들과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던 초가집은 이미 불에 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한채 무너져 있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겨우 다른 집을 구해 할아버지와 살던 김씨 가족에게 또 다른 사람들이 찾아왔다. 5~6명의 사람들은 김씨 가족들을 향해 “쌀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쌀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던 사람들은 무장대였다. 무장대는 쌀이 없다며 저항하는 김씨의 할아버지를 마구 폭행했다.
군인들에게도 시달리고 무장대에게도 시달리는 등 곳곳에서 위협을 당한 김씨의 조부모·부모와 남매들은 거주지를 떠나 동네 바위틈에서 살았는데, 당시 군경은 남원읍 일대에서 “산에서 내려오라”고 선전했다.
한 겨울에 먹을 것이 없자 김씨의 가족은 해안가로 내려갔고, 당시 남원지서에서 하루를 보낸 뒤 서귀포로 이동했다. 그러나 서귀포 부둣가에서 김씨의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채 군경에 의해 희생됐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4.3 광풍에 휩쓸리면서 김씨의 남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굶어 죽었다. 김씨의 조부모는 4.3을 겪은 뒤 모두 병환으로 생사를 달리했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여동생마저 10여년전 세상을 떠났다.
기구한 삶을 털어놓으면서 눈물을 참지 못한 김씨는 “어떻게 사람들이 그럴 수가 있느냐. 사람이 할 일이냐. 할 말이 정말 많지만,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다”며 켜켜이 쌓았던 울분을 토했다.
김씨에 이어 증언에 나선 1948년 1차 군법회의 피해자 고(故) 고병호의 동생 고병주(82) 어르신도 4.3 유족이자 직접 겪은 피해자다.
서귀포 남원읍 태흥리에서 삼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 고씨는 1948년 여덟살의 나이로 4.3에 휩쓸렸다. 고씨는 남원중학원에 다니다 군경에 희생된 고병호와 10살 터울의 형제다.
고씨는 “학교를 마친 형님이 집에서 쉬고 있는데, 사람들이 찾아와 형님을 데려갔다. 그것이 마지막 작별”이라고 기억했다.
고씨는 “소식이 끊긴 형님은 남원지서에 있다가 서귀포를 거쳐 제주시에 갔다고 들었다. 1년 정도 소식이 없던 형님은 인천형무소에 있다면서 가족들의 안부를 물으며 속옷과 책 등을 보내달라고 1차례 엽서를 보내왔지만, 그 이후로 형님에 대한 소식이 끊겼다”고 말했다.
이어 “형님 소식이 끊긴 뒤에는 무장대에게도 시달렸다. 무장대를 피해 주민들끼리 성을 쌓아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보초를 서면서 생활했다. 무장대가 마을 주민들의 목숨을 빼앗고 나무에 매단 모습도 많이 봤다. 밤마다 보초를 섰던 아버지는 다행히 화를 면하셨다”고 울분을 토했다.
고씨는 “형님 소식이 끊기자 아버지는 1950년에 형님의 생일 날짜로 사망신고했다. 부모님이 10여년 전 생사를 달리하면서 제가 형님의 제사까지 모시고 있다”고 말했다.
1940년생 동갑내기 82세 고령의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방청객과 유족 등의 탄식 소리가 법정 안을 가득 채웠다.
재판부는 “곧 추석인데, 무죄 판결로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지길 바란다. 이제까지 보낸 70여번의 추석보다는 조금이라도 덜 서러운 명절이 되길 바란다”며 청구인 30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희생자와 유족 모두에 '덜 서러운 명절'이 아니라 '가장 기쁜' 한가위 명절로 기록될, 제12차 직권재심 청구인 30명 전원에 대한 무죄 선고가 내려진 순간이다.
다음은 직권재심 명예회복 명단.
1차 직권재심(2022년 3월29일) 2차 직권재심(2022년 3월29일) 3차 직권재심(2022년 4월19일) 4차 직권재심(2022년 5월3일) 5차 직권재심(2022년 5월17일) 6차 직권재심(2022년 5월31일) 7차 직권재심(2022년 6월14일) 8차 직권재심(2022년 7월5일) 9차 직권재심(2022년 7월12일) 10차 직권재심(2022년 8월9일) 11차 직권재심(2022년 8월30일) 12차 직권재심(2022년 9월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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