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바다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루쉰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원래 길이란 없었다. 사람이 처음 다니기 시작하면서 점차 많은 이들이 그 뒤를 밟아 길이 생겼다고 말한 바 있다. 육지의 길은 능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바닷길을 내는 것은 그리 녹록지 않다. 너른 바다를 그저 항해하면 되지 무슨 길이냐고 할지 모르나 무지의 소치일 따름이다. 옛날 바닷길을 지나는 선박은 서너 가지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정상적인 것은 상선과 어선, 그리고 객선인데, 이외에 비정상적인 것이 있으니 노는 부러지고 닻도 끊어져 하염없이 흘러가는
자연주의와 규범주의여러 해 동안 철학자들은 질병의 본질에 대해 논쟁을 벌여왔다. 어떤 철학자들은 질병이란 본질적으로 생물학적 구조나 기능의 이상일 뿐이며, 어떤 가치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폐렴이라는 질병은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이 폐에 침범하여 염증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기침과 가래, 발열 그리고 흉부 엑스선이나 혈액 검사에서 보이는 이상 소견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일 뿐이다. 이런 이상 소견은 우리가 통계적인 분석을 통해 미리 설정해 놓은 정상 범위에서 이탈한 것을 말한다. 보통 ‘자연주의’라고
이 책의 제목인 “디지털 훈민정음”은 책에 담긴 15개의 에피소드 가운데 제일 마지막에 담긴 동명의 에피소드이다. ‘근후’ 어린이가 할머니와 한글공부를 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림을 보고 글자를 맞추는 것에서 리모콘 사용법을 알려드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어서 패턴 그리기와 글자 연습을 할 수 있는 디지털 훈민정음 앱을 다운 받아 함께 학습을 시작한다. 주말의 가족 모임에서 근후는 장기자랑 대회에서 래퍼처럼 디지털 훈민정음 노래를 한다. “애들아 애들아, 디지털 훈민정음 ... 할머니에게 알려주라.” 단순하면서도 깊은 노래다. 이
봐, 공상하면 할수록 길이 많아지고 무수한 길 하나하나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아? 뭐든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뭐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큼은 언제나 있다.상상하는 내가 존재하는 한, 항상 똑같은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나는 변화하고 있다. 물의 흐름처럼.— 「디어 프루던스」 중에서1.인공지능이 확장하고 있는 영역은 일상의 모든 분야에 해당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우리가 휴대하고 있는 스마트폰은 손전화기로서 통신기의 역할을 훌쩍 넘어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처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컴퓨터의 역할을 수행하고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생애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사건이 있다. 그 중 하나는 현상응모 작품으로 자신의 사상을 구체화했다는 것이다. 현상공모한(1번은 당선되고 1번은 떨어진) 논문을 ‘학문 및 예술에 관한 논고’와 ‘인간 불평등 기원론’으로 출간했다.1749년(당시 루소의 나이는 37세였다) 디종 아카데미는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도덕적 순화에 기여했는가?’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공모했는데, 루소는 “본래 선하게 태어난 인간은 사회와 문명에 의해 타락하였다”라는 놀라운 주장을 펼치며 당선된
야마모토 센지“야마모토 센지(山本宣治, 애칭 야마센, 1889~1929년)는 아시아태평양 전쟁 이전 천황이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군대의 지휘권까지 모두 권한을 쥐고 일본을 지배하던 시대에 전쟁반대와 주권재민을 주장하며 서민과 함께 싸웠습니다. 그 때문에 야마센은 1929년 3월 5일 우익의 테러로 살해됩니다. 올해(2009년)는 살해 당시 교토-우지 시(宇治市) 출신 노동당 국회의원이었던 야마센의 탄생 120주년, 서거 8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32쪽)《야마센 홀로 지키다》 제1부 「야마센 홀로 보루堡壘를 지키다」의 제1
이 책은 다양한 주제의 입문서로 큰 명성을 얻고 있는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의 Very Short Introductions(VSI) 시리즈 중 하나로 출간된 서양의학사 입문서이다. 국내에서도 여러 의과대학에서 의학의 역사를 가르치는 교과서로 활용되고 있을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책을 쓴 윌리엄 바이넘(William F. Bynum)은 예일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의학사를 전공한 원로 역사가로서, 특히 서양 근대 의학사에 조예가 깊은 분이다. 이 책이 교과서로 널리 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딱딱하고 지
횃불에서 촛불로! 한국은 동학혁명에서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혁명의 나라이다. 1860년 동학창도, 1894년 동학농민혁명, 1919년 삼일운동, 1948년 4.3항쟁, 1960년 4.19의거, 1980년 광주항쟁, 1987년 유월항쟁, 2016년 촛불혁명. 지난 129년 동안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엄청난 역사적 사건들을 겪으면서 우리보다 앞서 이 땅에 살었던 사람들은 봉건왕조의 폭정에 맞서 집강소의 민주주의 실험을 했으며, 외체의 침탈에 맞서 제국주의 일본과 전쟁을 벌였다. 끝내 조선왕조·대한제국이 멸망하자 3.1운동을 벌
“승지 동무, 산천단은 옛날부터 한라산 산신제를 올리던 곳이야. 뭐, 이거 이상한 이야긴가? 저 하늘을 뒤덮은 500~600년 수령의 여덟 그루 흑송 거목이 산천단의 수호신이고, 한라산 산신제의 제단이 있던 곳, 이방근 선생님은 자기 몸을 바쳐 희생물이 되신 거라고. 그래서 산천단에서 죽은 거지. 정세용을 죽인 것 때문이 아니야. 어이, 승지 동무, 정세용을 죽였기 때문에 산천단에 갔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곳은 신성한 장소라고. 정세용 때문에 거기까지 가겠어? 그런 쩨쩨한 짓은 하지 않아. 흥, 나는 그렇게 생각 안
뒤르켐(Emile Durkheim, 1858-1917)은 1893년 소르본대학에 제출한 그의 박사논문인 ‘사회분업론’에서 ‘사회연대’를 분업의 관점에서 다뤘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국부론’(國富論, 1776)에서 ‘분업의 경제적 효과’를 다뤘다면, 뒤르켐은 ‘사회분업론’에서 ‘분업의 도덕적 효과’에 주목했다. 뒤르켐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축약하면, 분업은 ‘사회의 유기적 연대’를 가능하게 하여 사회를 통합시킨다는 것이다. ‘사회질서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뒤르켐은 ‘분업의 새로운 기능’으로 답했다
고백하건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휠체어에 색칠을 하고 장식을 덧입혀서 예술품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장애’하면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나 상상의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필자처럼 장애에 대해 무지하거나 생각의 폭이 좁은 사람에게는 안성맞춤인 책이다.청각 장애인이자 SF소설가인 김초엽과 지체 장애인이자 변호사인 김원영의 협업으로 탄생한 는 장애와 과학기술의 다양한 관계 맺음에 대해 성찰하는 책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책의 주인공은 빨치산 출신의 아버지이고, 화자는 주인공의 딸이다. 전지적 시점은 물론 아니고, 1인칭 시점인데, 마치 전지적 시점처럼 아버지와 그 주변 인물의 형상과 내면을 잘 그려내고 있다.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단편 활동사진과 같은 여러 개의 에피소드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간간히 사이사이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아버지를, “전직 빨치산”, “국방군의 포위 직전 아지트를 빠져나와 곡성군당을 살렸다는 전설 속의 혁명가”, “뼛속까지 사회주의자로서 체면과 긍지를 잃지 않은” 인물, 그러나 “사회주의자답게 의식만 앞선 농부”, “반봉건시
“이 들판은 날아와 더불어 / 불이 되자 하네 불이 /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 들불이 되자 하네 (중략) 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 /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김경주 작곡의 노래 는 김남주의 시 에서 나왔다. ‘만인을 위해 싸울 때 나는 자유’라는 시인의 외침도 안치환의 노래 에 절절하게 녹아들었다. 그의 노래 는 운율을 맞추기 어려운 김남주 시를 록 버전으로 풀어낸 수작이다. 변계원 작곡의 은 민족주의 성향의 김남주 시인의 노래 가운데
1.팬데믹 시대에 팽배해진 ‘거리두기 민주주의’의 일상의 리듬에 착실히(?) 적응해가는 동안 “아직도 변혁이나 혁명이 절박한 국가들이 있다는 사실 앞에” “세계시민이 아니라 자국민 중에서도 부도덕하고 부정의한 무리를 위해 전쟁하는 권력”(시인의 말)에 대해 탄식하고 비통하는 분노의 시적 정동을 벼리는 시인이 있다. 하종오 시인의 시집 《“전쟁 중이니 강간은 나중에 얘기하자?”》는 ‘거리두기 민주주의’에 나포된 채 자국민의 생명과 건강과 안전에만 도통 관심을 쏟는 데 대한 세계시민으로서 정치윤리적 성찰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우리의 삶은 생노병사(生老病死)로 요약된다. 아플 때 우리는 병원에 간다. 아플 때만일까? 이제 우리는 병원에서 태어나고, 병원에서 노화를 막거나 감추는 수술을 받기도 하고, 병원에서 장례를 치룬다. 처음 직장을 얻어 사회로 나아가게 될 때도 건강 검진을 받는다. 아플 때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중요한 순간들이 병원에서 벌어진다. 메디컬 드라마가 인기를 얻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역동적인 삶의 드라마가 그곳, 병원에서 매일매일 상연되고 있기 때문이다.병원 밖으로 눈을 돌려 보자. TV나 신문에서 권하는 그대로 건강을 위해 영양제를
미술사만큼 어렵고 고급진 학문도 드물다. 역사 영역은 스토리텔링 기반의 무궁무진한 콘텐츠를 포함하고 있다. 미술사 또한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내용들이 많다. 많은 것들을 알아야하는 미술사 공부는 그래서 난해한 관문들을 통과해야 하며, 그만큼 앎의 깊이와 넓이가 남다른 학문 분야이다 보니 ‘고급진’ 학문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하나의 작품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당대의 정신 문화사를 꿰뚫어볼 줄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당대의 기술력에 대한 이해도 필수적이다. 해당 작품이 탄생한 배경 지식으로 당대의 철학과 정치와 경제, 사회 등 제반 영역
‘명상록’의 저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후기 스토아 철학자이자, 로마 오현제(Five Good Emperors)의 한 명이었다. 오현제는 네르바(재위 96∼98), 트라야누스(재위 98∼117),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 5명의 현명한 황제를 말한다. 5현제 시대에는 황제의 자식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않고 유능한 인물을 양아들로 입양해 황제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런데 아우렐리우스는 이 규칙을 깨고 친아들인 콤모두스(재위 180-192)를
21세기를 준비하는 모임의 「세계 인형극 축제」1980년대 어느 날 오사카에 공연을 하러 간 적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심우성 선생님을 따라 ‘만석중놀이’라는 그림자극을 공연하기 위함이었다. 명색은 무대감독이었으나 실제로 무대를 감독할 일이 별로 없었다. 검은 옷을 입고 일사분란하게 무대 장치를 마련해준 극장 직원들 덕분이었다. 해외여행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대상국이 일본인지라 왠지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돌아와 거의 한 달 넘게 헤맸다. 일종의 문화충격인 셈인데, 우선 동경대 도서관 서고에서 본 한국 자
1.2023년 새해가 솟아올랐다. 지구별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기가 있는 곳에서 새해맞이의 신열(身熱)을 앓는다. 지난해 곡절 많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새해에는 지난해보다 새털만큼이라도 좋으니 좀 더 행복한 기운 아래 건강히 자신의 꿈이 이뤄졌으면 하는 기원을 앙가슴에 품는다. 새해의 성스럽고 청량한 기운에 최대한 자신을 겸허히 낮추면서 말이다. 아무리 첨단의 기술사회와 경제지상주의가 인간의 일상을 지배한다고 하지만, 새해맞이 우주 삼라만상의 리듬 속 인간의 길흉화복은 인공지능마저 도통 범접할 수 없는 비의적(秘儀的)
근대예술은 일제강점기에 새로운 제도로 자리를 잡았다.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가 대표적인 제도다. 3.1만세운동 이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 전환을 시작한 이래, 미술공모전을 통하여 통치수단으로서의 문화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미술가들이 작품을 발표하고 평가받으며 비평과 관람을 통하여 예술공론장을 형성한 가장 유력한 제도가 바로 이 선전이었다. 일본인들을 포함하여 다수의 조선 예술가들이 선전을 통하여 활동했다.이 책에 등장하는 김복진도 선전에 여러차레 출품하고 비평에도 참가했다. 제국의 변방 식민지였다고는 하나 당대의 예술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