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 화해를 넘어 상생으로(3)]표선면 가시리 주민들의 '은인'

▲ 토벌대를 피해 임시거처를 만들어 생활하던 주민들
남제주군 표선면 가시리에서는 마치 명절처럼 한날한시에 제사를 지내는 집안이 많다. 음력 10월 14일(양력 11월 14일)도 그런 날 중 하나이다.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막 벌이기 시작한 1948년 11월 15일 새벽, 가시리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다짜고짜 총격을 가했다.

총소리에 놀라 새벽잠에서 깨어난 주민들이 이리저리 도망쳤지만, 날이 밝았을 때 가시리에는 시신 30여 구가 마을 곳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발빠른 젊은이들이 급히 피신한 가운데 희생자들은 주로 어린이들과 60대에서 80대 노인들이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이 채록해 정리한 ‘4.3은 말한다’는 이날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희생자 30여명의 성별과 나이는 당시의 처참함을 대변해 준다. 젊은이들이 급히 피신한 가운데 집에 남았던 노인과 어린이들이 희생된 것이다. 60대에서 80대에 이르는 노인만 살펴봐도 김수계(여) 김인하(여) 김정숙(여) 김호직 안만규 오경생(여) 오윤부(여) 오희백(여) 정재병 정종언 등이 희생됐다.
이날 안흥규 씨(작고)는 급히 몸을 피해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토벌대가 물러간 후 집으로 돌아온 안씨는 온가족이 몰살된 처참한 상황을 목격해야 했다. 고신춘(여, 42) 강매춘(여, 37) 안재원(20) 안영순(여, 19) 안재순(여, 15), 그리고 호적에 이름도 안올린 어린이 안일진 안옥희 안옥순 등 안씨의 가족 8명은 안씨의 누이 안규반과 그녀의 자식들인 강재호(12) 강순이(여, 7) 성명불상(4) 등과 함께 인근 숲에 숨었다가 12명이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었다.
60대 노부부인 안만규·김인하는 손녀(3)와 손자(1)를 데리고 급히 냇가로 피신했다. 굴을 찾아 몸을 숨겼지만 아기 울음소리가 새 나가고 말았다. 토벌대는 굴 속으로 수류탄을 던졌고 이들 가족은 운명을 같이했다.“

아비규환의 지옥같은 상황이 벌어진지 며칠이 지난 1948년 11월 22일, 토벌대는 ‘양민은 해변마을인 표선리로 소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무차별 학살극을 경험했던 터라 일부 주민들은 겁에 질려 선뜻 내려가지 못한 채 들녘으로 도망쳤지만, 달리 뾰족한 방도가 없던 대부분의 주민들은 표선리로 소개를 했고 이들은 표선국민학교에 집단수용됐다.

그러나 토벌대는 자신들의 명령에 순응해 소개한 사람들을 집단학살하기 시작했다. 소개민들이 표선국민학교에 수용된지 한 달 째 되던 날인 1948년 12월 22일은 가장 큰 희생이 벌어졌다.

토벌대는 소개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킨 후 가족 전부가 소개온 집안과 그렇지 않은 집안을 나눴다. 토벌대는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소위 ‘도피자 가족’이라는 구실을 붙여 76명을 속칭 ‘버들못’ 위쪽 약 200m 지점으로 끌고가 집단 총살했다.

이 때 오국만씨(74)는 아버지(오병용)와 어머니(고운기)를 잃었다. 형이 함께 소개하지 않고 도망쳤다는 게 이유였다. 오씨 역시 죽을 운명이었으나 구사일생했다. 오씨는 “15살 이하와 아기업은 여자는 살려줬는데, 당초 수용소에 들어갈 때 사태를 예감한 아버지가 17살인 내 나이를 15살로 낮춰 등록한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표선리로 소개한 주민들은 속칭 ‘당케’ 부근 백사장에서도 연이어 학살됐다. 토벌대는 총살을 하면서 주민들은 물론 피학살자의 가족까지 모아놓고 ‘만세!’라고 외치고 박수를 치게 하는 기막힌 짓을 벌이기도 했다.

#중산간 마을 중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본 표선면 가시리

겁에 질려 소개하지 않고 산에도 오르지 못한 채 들녘을 방황하던 주민들의 희생도 잇따랐다. 가시리 주민들 사이에서는 토벌대에게 희롱 당하다 아기와 함께 죽어간 한 여인의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었다. ‘4.3은 말한다’는 참혹했던 그 장면을 당시 토벌전에 참여했던 변윤길 옹의 입을 빌어 이렇게 기록했다.

“군경토벌대는 토벌갈 때 늘 성읍리 주민들을 총알받이로 앞장세웠습니다. 하루는 가시리에 갔을 때 여러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군인들은 즉각 따르륵 총을 쏘았습니다. 산에 오르지도 못한 채 숨어 지내던 노인과 부녀자들이었지요. 결과적으로 산에 오른 사람은 살고, 마을에 남았던 사람이 죽은 겁니다. 그런데 아무개 경찰은 참으로 몹쓸 짓을 많이 했어요. 그는 한 젊고 예쁜 여자를 잡아와 ‘옷을 벗어 저기까지 뛰어갔다 오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여자는 아기까지 업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시키는대로 했지만 그 경찰은 총을 쏘았습니다. 쓰러진 그녀 위에서 아기가 울어대자 한 군인은 ‘아기 혼자 여기 내버려 봐야 살 수 없다’며 아기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군인은 자기도 끔찍했는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총을 쏘더군요. 나는 사태 후 그 경찰을 만났을 때 ‘너도 인간이냐’고 욕을 했습니다.”

▲ 소개령으로 해안마을로 이주하는 주민들
이리하여 당시 350여 가구가 살고 있던 가시리에서 무려 500여명이 죽었다. 가구당 1명 이상이 숨진 셈이다. 이런 희생의 대부분은 군경에 의해 이뤄졌고, 토벌작전이 아닌 소개령 이후에 이뤄졌다.

이런 엄청난 사건을 치른 가시리 주민들은 군인과 경찰이라면 '공포' 그 자체였다.

오국만씨는 "소개령 이전부터 성읍에 있던 경찰이 가끔 가시리에 오게 돼 젊은 사람을 보면 죽이거나 폭행을 당하는 게 다반사였다"며 "경찰이 '빨갱이'로 지목하면 '빨갱이'가 되고, 죽이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일반 주민들을 죽였다"고 말했다.

#다른 경찰과 달리 주민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준 강계봉 순경

하지만 모든 경찰이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가시리 주민들에게 지금도 '은인'이나 '귀인'으로 존경받는 경찰이 있었다.

오국만씨의 가시리 주민들의 큰 존경을 받고 있는 ‘강 순경’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 강계봉 순경에 대해 증언하는 오국만씨
"강 순경을 처음 본 것은 소개령 이후 표선국민학교 교실에서 수용생활을 시작하던 1948년 음력 10월 22일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강 순경은 수용소 치안을 담당했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대접해 줬습니다. 다른 경찰들처럼 폭행이나 폭언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그런 경찰만 있었으면 우리 부모님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은인입니다"

소개령 이후 토산으로 이주해 강 순경과 직접 만나보지 못했던 오태경씨(75) 역시 칭찬 일색이었다.

"4.3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강 순경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이었단 얘기가 대부분입니다. 또한 그분은 '파리 목숨' 같은 우리 중산간 마을 사람들을 많이 살렸다고 합니다"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는 경찰이 '폭도'로 지목받던 중산간 마을 사람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목숨을 살려주니 어떻게 존경받지 않을 수 있을까.

수소문 끝에 위미리에서 생존해 있는 ‘강 순경’을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강계봉 옹(83)이었다.

강 옹은 남원읍 위미리 출신으로 어렸을 때 도일했다가 해방 후 고향 제주로 들어왔다가 1948년 6월 경찰에 투신했다.

#가시리 주민들이 불쌍했기 때문에 잘 대해줬을 뿐

인자한 모습의 강 옹은 가시리 주민들의 뜻을 전하자 겸손해하며 손사레를 쳤다. 강 옹은 "가시리 주민들은 소개령으로 표선국민학교에서 수용돼 있었다"며 "나는 이들의 치안과 감찰을 담당하는 일개 순경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 가시리 주민들이 불쌍했기 때문에 잘 대해줬을 뿐이라는 강계봉씨
강 옹은 "학교에서 수용생활을 하고 있는 가시리 사람들이 불쌍하게 생각해 좋게 대해준 것 밖에는 없다"며 "사람들을 살렸다는 것도 가시리 주민들의 생각일 뿐"이라고 말했다.

강 옹은 "당시는 계엄령 상황이어서 경찰은 군에 협조하는 역할이었다"며 "표선리에 9연대 1소대가 주둔해 면사무소 앞에서 '입산' 의심이 가는 일가족들을 1열로 세워 총살시키는 등 많은 사람들이 죽였다"고 회고했다.

이어 강 옹은 "군인과 경찰이 과도하게 진압한 적도 많았다"며 "이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도민들도 많았다"고 당시 군경의 잘못을 토로하기도 했다.

강 옹은 1950년대 구좌파출소장을 끝으로 9년 동안의 경찰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고향 위미에서 농사를 지으며, 위미리장과 노인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강 옹의 행적은 잔인하고 참혹했던 당시 상황과 대비돼 진흙탕의 연꽃과 같이 빛나고 있었다.

역사의 기록들은 당시 상황이 더러운 진흙탕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비록 한 떨기일지언정 우리가 기억하고 기려야 할 것은 그 속에 피어난 연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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