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민의 제주 생활사] (14) 고렛돌, 다듬잇돌

‘고렛돌’은 아무 데나 있지 않았다

‘고렛돌’은 ‘고레’를 만드는 돌이다. ‘고레’는 곡식을 가는 데 쓰는 도구인 맷돌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맷돌을 ‘고레’라고 한다. ‘고레’는 ‘골다’(磨)의 명사형이다. 맷돌이나 ‘고레’는 둥글넓적한 돌 두 짝을 포개고 윗돌 아가리에 갈 곡식을 넣으면서 손잡이를 돌려서 간다. 제주도 사람들은 제주도 일정한 지역에서만 ‘고렛돌’을 마련하여 ‘고레’를 만들었다.

구좌읍 행원리 ‘질난밧’ 남동쪽, ‘높은술’(행원리 41, 42번지) 동녘의 동서로 긴 능선을 이룬 동산을 ‘고렛동산’이라고 하였다. 고시홍 작가는 《행원리지》에서 ‘고렛동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렛동산’에는 ‘고레’(맷돌)를 만들 때 사용되었던 강질의 돌이 많았다. 행원리 ‘알드르’에서는 이곳에서만 ‘고렛돌’을 구했다. ‘고레’를 제작하여 곧바로 곡식을 갈면 돌가루 냄새가 난다. 돌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곡식 찌꺼기를 맷돌에 넣으면서 헛돌리는데 이것을 ‘허궁체’라 한다. 그리고 ‘고레’의 날이 닳아지면 쟁기의 부품인 보습으로 바닥을 쪼아 날을 세웠는데, 이때도 곧바로 돌가루 냄새를 없애기 위해 ‘허궁체’를 돌린다. 최후로는 ‘알동네’ ‘벤수넴’[변수남] 하르방(대정 출신)이 홍인옥의 묵은 집에 살면서 ‘고렛동산’에서 ‘고렛돌’을 캐어내고 ‘고레’를 만들어 팔았다. 

구좌읍 행원리 ‘고렛동산’에서 만든 ‘고레’는 제주도 이외의 육지부로도 팔려나갔다. 행원리에 육상양식단지(2만0233평, 6만6885.9㎡)를 만들려고 포클레인 굴착기로 ‘고렛동산’을 까부수어 버렸다.

행원지구 육상양식단지 조성사업 입간판(1999. 3. 1) / 사진=고광민
행원지구 육상양식단지 조성사업 입간판(1999. 3. 1) / 사진=고광민

안덕면 화순리 서쪽에 있는 논오름(179.4m)과 안덕면 감산리 일대 빗물이 모여 ‘창곳내’로 흘러드는 곳이 있다. 이 일대를 ‘굴렁팟’(화순리 193번지)라고 한다. ‘굴렁팟’은 ‘고레’를 만드는 ‘고렛돌’을 캐어냈던 곳이기도 하였다. 안덕면 감산리 민속자료실에는 ‘굴렁팟’에서 생산한 ‘고레’를 소장하고 있다.

고레(지름 40.3㎝, 높이 20.1㎝)<br>‘고레’는 위짝과 아래짝으로 구성되었다. 회전하는 중심에 꽂힌 여문 나무를 ‘중수리’, 위짝에 있어 ‘중수리’를 싸서 돌게 된 구멍을 ‘중수리고망’이라고 한다. ‘중수리’를 만드는 나무는 ‘솔피낭’(쇠물푸레나무)이다. 위짝에는 쌀을 넣는 구멍과 ‘족낭’(때죽나무)으로 만든 ‘ㄱ’ 자 모양의 손잡이가 꽂혀 있다. 쌀을 넣는 구멍 위쪽 주위에는 둥그렇게 홈을 냈다. 이를 ‘고렛홈’이라고 한다. 다시 ‘고렛홈’ 한쪽에 구멍을 냈다. 이 구멍을 ‘고렛혹’이라고 한다. ‘고렛혹’은 ‘고레’ 위짝 ‘고렛홈’에 낸 구멍으로, 이곳으로 알곡을 집어넣어 갈게 된 구멍이라는 말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고레’에서 메밀, 콩, 벼, 나무 열매 따위를 갈았다. 두 사람이 ‘고레ᄌᆞ럭’(맷손)을 마주 잡고 앉아 돌리는 수도 있었다. / 사진=고광민
고레(지름 40.3㎝, 높이 20.1㎝)
‘고레’는 위짝과 아래짝으로 구성되었다. 회전하는 중심에 꽂힌 여문 나무를 ‘중수리’, 위짝에 있어 ‘중수리’를 싸서 돌게 된 구멍을 ‘중수리고망’이라고 한다. ‘중수리’를 만드는 나무는 ‘솔피낭’(쇠물푸레나무)이다. 위짝에는 쌀을 넣는 구멍과 ‘족낭’(때죽나무)으로 만든 ‘ㄱ’ 자 모양의 손잡이가 꽂혀 있다. 쌀을 넣는 구멍 위쪽 주위에는 둥그렇게 홈을 냈다. 이를 ‘고렛홈’이라고 한다. 다시 ‘고렛홈’ 한쪽에 구멍을 냈다. 이 구멍을 ‘고렛혹’이라고 한다. ‘고렛혹’은 ‘고레’ 위짝 ‘고렛홈’에 낸 구멍으로, 이곳으로 알곡을 집어넣어 갈게 된 구멍이라는 말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고레’에서 메밀, 콩, 벼, 나무 열매 따위를 갈았다. 두 사람이 ‘고레ᄌᆞ럭’(맷손)을 마주 잡고 앉아 돌리는 수도 있었다. / 사진=고광민

애월읍 금성리와 한림읍 귀덕리 경계선을 따라 ‘정짓내’가 흐른다. ‘정짓내’를 ‘금성천’(錦城川)이라고도 한다. ‘어음천’이 ‘금성천’과 만나는 지점에서 ‘고레’를 만드는 ‘고렛돌’이 생산되었다. 이곳에서는 ‘고레’는 물론 여러 가지 돌그릇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려고 캐어낸 돌멩이를 ‘정짓냇돌’이라고 하였다. 애월읍 상가리 박상봉(1923년생, 남) 씨는 1949년에 이곳에서 애월읍 납읍리 사람들이 만든 ‘돗도고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돗도고리’는 넓적한 돌판에 홈을 파서 만든 돼지 먹이통이다.

‘정짓냇돌’로 만든 ‘돗도고리’(지름 56.0㎝, 높이 21.0㎝)<br>‘돗도고리’는 넓적한 돌판에 홈을 파서 만든 돼지 먹이통이다. ‘돗도고리’는 애월읍 상가리 박상봉(1923년생, 남) 씨네 집에서 쓰던 것이다. 박씨는 ‘돗도고리’를 1949년 안팎에 이웃 애월읍 납읍리 사람들이 ‘정짓내’에서 만든 것을 샀다. 이제는 쓸모없는 것이 되었으니, 화분으로나 쓰려고 한가운데 구멍을 뚫었다. / 사진=고광민
‘정짓냇돌’로 만든 ‘돗도고리’(지름 56.0㎝, 높이 21.0㎝)
‘돗도고리’는 넓적한 돌판에 홈을 파서 만든 돼지 먹이통이다. ‘돗도고리’는 애월읍 상가리 박상봉(1923년생, 남) 씨네 집에서 쓰던 것이다. 박씨는 ‘돗도고리’를 1949년 안팎에 이웃 애월읍 납읍리 사람들이 ‘정짓내’에서 만든 것을 샀다. 이제는 쓸모없는 것이 되었으니, 화분으로나 쓰려고 한가운데 구멍을 뚫었다. / 사진=고광민
‘정짓냇돌’로 만든 ‘돗도고리’(지름 56.0㎝, 높이 21.0㎝)<br>‘돗도고리’는 넓적한 돌판에 홈을 파서 만든 돼지 먹이통이다. ‘돗도고리’는 애월읍 상가리 박상봉(1923년생, 남) 씨네 집에서 쓰던 것이다. 박씨는 ‘돗도고리’를 1949년 안팎에 이웃 애월읍 납읍리 사람들이 ‘정짓내’에서 만든 것을 샀다. 이제는 쓸모없는 것이 되었으니, 화분으로나 쓰려고 한가운데 구멍을 뚫었다. / 사진=고광민
‘정짓냇돌’로 만든 ‘돗도고리’(지름 56.0㎝, 높이 21.0㎝)
‘돗도고리’는 넓적한 돌판에 홈을 파서 만든 돼지 먹이통이다. ‘돗도고리’는 애월읍 상가리 박상봉(1923년생, 남) 씨네 집에서 쓰던 것이다. 박씨는 ‘돗도고리’를 1949년 안팎에 이웃 애월읍 납읍리 사람들이 ‘정짓내’에서 만든 것을 샀다. 이제는 쓸모없는 것이 되었으니, 화분으로나 쓰려고 한가운데 구멍을 뚫었다. / 사진=고광민

제주도 이외의 육지부로 팔려나간 ‘고레’를 찾았다

1995년 5월 20일(금), 제주항에서 완도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제주도 이외의 육지부에서 백성들이 썼던 도구와 함께, 과연 제주도 ‘고레’가 제주도 이외의 육지부로 팔려나갔는지를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전라남도 완도군에 있는 소모도를 지나 대모도로 들어갔다. 대모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 모도리에 있는 섬이다. 모도리는 동쪽과 서쪽에 각각 하나씩 2개의 동네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모도 동쪽 동네 김금난(1908년생, 여) 씨 집에서 도구를 탐사하고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고개를 넘어 서쪽 동네로 들어섰다. 

모도리 서쪽 동네에 있는 모도리 1,197번지 서귀용(1927년생, 남) 씨 집에 들어섰다. 그 집에 제주도 ‘고레’(맷돌)가 있었다. 서씨 어머니 김○○(1905년생) 씨는 제주도 ‘고레’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김씨는 16세가 되는 해(1890년)에 청산면 모도리 동쪽 동네에서 서쪽 동네로 시집을 왔다. 이 집안에서는 오랫동안 제주도 ‘고레’를 쓰고 있었고, 제주도 ‘고레’를 ‘제주맷돌’이라고 하였다. ‘제주맷돌’은 김씨 시아버지가 장사꾼에게 사서 쓰고 있는 것이다. ‘제주맷돌’이 무뎌가면 보습으로 쪼아 날을 세우기도 하였다.

제주맷돌(지름 41.0㎝, 높이 17.4㎝)<br>제주도 이외 육지부 사람들은 제주도에서 생산된 ‘고레’를 ‘제주맷돌’이라고 일렀다.&nbsp;/ 사진=고광민
제주맷돌(지름 41.0㎝, 높이 17.4㎝)
제주도 이외 육지부 사람들은 제주도에서 생산된 ‘고레’를 ‘제주맷돌’이라고 일렀다. / 사진=고광민

‘제주맷돌’ 손잡이가 예사롭지 않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속내를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제주맷돌’ 위짝 손잡이 구멍 아래쪽이 떨어지고 말았다. 손잡이를 박을 수 없게 되자 그 옆에 새롭게 손잡이 구멍을 냈다. 이 구멍에 맷손을 끼우고 ‘제주맷돌’을 돌렸지만 중심이 잡히지 않아 성가셨다. ‘제주맷돌’을 돌릴 때마다 위짝은 아래짝 복판에 박힌 나뭇조각 ‘중수리’에서 빠져나오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궁리하다가 다시 원래 ‘제주맷돌’ 손잡이 구멍 위쪽에 구멍을 내어 쇠막대기를 꽂고, 비닐 테이프를 감아 손잡이를 만들어 애지중지 쓰고 있었다.

제주맷돌 위짝. / 사진=고광민
제주맷돌 위짝. / 사진=고광민

제주도에서 다듬잇돌은 생산되지 않았다

제주도는 화산섬이니 돌멩이에는 구멍이 숭숭하였다. 구멍이 숭숭한 제주도 화산석으로는 다듬잇돌을 생산하여 옷을 다듬을 수 없었다. 제주도 화산석으로 다듬잇돌을 만들어 풀을 먹인 옷을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드려 다듬이질한다면, 옷은 구멍이 숭숭 뚫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은 원래 다듬잇돌에서 다듬이질하는 일이 없었으니, 제주도에서 다듬잇돌을 생산하는 일도 없게 되었다. 김정(金淨, 1486∼1520)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에서, 제주도 사람들은 “다듬잇돌에서 옷을 다듬지 않는다(擣衣無砧)”고 하였다. 그리고 협주(夾註)에서는 옷감이나 옷을 “손으로 다듬는다”(以手敲打)고 하였다. 그 당시에도 제주도 사람들은 다듬잇돌로 옷을 다듬지 않았으니, 제주도에는 19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이에 따른 홍두깨, 다듬잇돌, 다듬잇방망이 따위도 전승되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다듬이질 소리 들리다

1985년 8월 9일 자 <동아일보>는, <KBS ‘한국의 소리’ 조사 31.5% 다듬이질 소리 꼽아>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KBS라디오가 전국의 청취자 985명을 대상으로 한국을 상징하는 소리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다듬이질 소리가 31.5%로 1위로 뽑혔다. (중략) 지역별로 보면 조사 대상 지역인 서울, 부산, 대구, 전주, 광주, 대전, 청주, 춘천, 제주에서 모두 다듬이질 소리를 으뜸으로 꼽았다. 

한국의 문화체육관광부는 2006년 7월 한국문화를 대표하는 100가지 문화상징을 발굴하여 발표하였다. 이때 한국을 상징하는 여러 소리 중에서 토속미(土俗美)의 으뜸으로 다듬이질 소리가 선정되었다. 언제부터 제주도에서 한국을 상징(?)하는 다듬이질 소리가 들리게 되었을까. 표선면 성읍리 김을정(1925년생, 여) 씨 집에 다듬잇돌이 있었다. 김씨네 다듬잇돌은 화강암으로 곱게 다듬어 만든 것이었다. 다듬잇돌 윗면은 살짝 볼록하고, 앞면과 측면은 마름모꼴이었다. 다듬잇돌을 앉히고 다듬이질을 하더라도 흔들림을 줄이려고 밑에 홈을 냈던 모양이다.

다듬잇돌(가로 56.4㎝, 세로 20.6㎝, 높이 10.0㎝) / 사진=고광민
다듬잇돌(가로 56.4㎝, 세로 20.6㎝, 높이 10.0㎝) / 사진=고광민

김씨는 나에게 다듬잇돌을 간직하게 된 연유를 들려주었다. 김씨 남편은 한평생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0년 무렵, 성산읍 시흥리에 있는 지금의 시흥초등학교로 발령받았다. 김씨는 남편 따라 성산읍 시흥리로 삶터를 옮겼다. 성산읍 시흥리에는 예나 지금이나 해녀들이 많았다. 그 당시 이 마을 해녀들은 음력 3월에 미역 따기를 끝내면, 선단(船團)을 갖추고 제주도 이외의 육지부 여기저기로 ‘물질’하러 나갔다. 이를 ‘바깟물질’이라고 하였다. ‘바깟물질’을 나갔다가 추석 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바깟물질’을 갔던 해녀들은 돌아올 때마다 다듬잇돌과 다듬잇방망이를 사오는 수가 많았다. 김씨는 이 마을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바깟물질’ 나갔던 어느 해녀에게 이 다듬잇돌을 사서 쓰다가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제주도 해녀들은 1900년대 전후부터 제주도 이외의 육지부로 ‘바깟물질’을 많이 나가게 되면서 하나둘 다듬잇돌이 들어왔다. 

제주도 옛사람들은 왜 다듬잇돌에서 옷을 다듬지 않았을까. 다듬이질에 따른 도구를 만들 재료가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좋은 옷으로 몸을 보기 좋게 꾸미며 옷치레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까. 다듬잇돌은 화강암 따위로 만들었으니, 제주도는 다듬잇돌을 만들 화강암이 나지 않는 섬이다. 제주도의 화산암은 구멍이 숭숭하다. 이것으로 다듬잇돌을 만들어 옷감이나 옷을 다듬는다면 구멍이 숭숭 뚫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 제주도에는 다듬잇돌에서 옷감이나 옷을 다듬지 않았던 것일까. 

제주도 해녀들은 ‘바깟물질’을 나갔다가 귀향할 때마다 왜 그 무거운 다듬잇돌을 들고 왔을까. 제주도 여성들은 1910년부터 해방(1945년)이 될 때까지 일본 방직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수도 있었다. 방직공장에서는 무명실로 서양목(西洋木)처럼 너비가 넓은 광목(廣木)을 대량으로 만들어냈다. 이래저래 제주도에도 광목이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도 다듬잇돌로 다릴 만큼 옷치레할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을까.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제주도 화산석은 ‘고레’(맷돌)를 만들기에는 더없이 좋았지만, 다듬잇돌을 만들기에는 더없이 나빴다. 그래서 제주도 ‘고렛돌’은 제주도 이외 육지부로 수출하는 수도 있었지만, 다듬잇돌은 수입하여 쓸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에서 다듬잇돌 수입은 1900년대 이후라고 가늠된다. 다듬잇돌을 만들 수 없었던 제주도에서 태어나 맨손으로 풀 먹인 옷을 다듬었던 나의 증조할머니,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맨손으로 옷을 다듬는 옛 모습을 부탁하여 관찰하고 싶다. 맨손으로 옷을 다듬이질할 때도 소리는 났을 것이니, 그 소리까지도 들어보고 싶다. 그리고 제주도의 돌그릇은 강질(剛質)의 바윗돌이 있는 곳에서 채취한 돌로 ‘고레’와 여러 가지 돌그릇을 만들었으니, 강질의 바윗돌을 캐어내어 돌그릇을 만들었던 곳은 모두 찾아보고 싶다. 

[고광민의 제주 생활사]는 14화를 끝으로 당분간 연재를 쉽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고광민

1952년 제주도 출생. 서민 생활사 연구자.저서 ▲동의 생활사 ▲고개만당에서 하늘을 보다 ▲마라도의 역사와 민속 ▲제주 생활사 ▲섬사람들의 삶과 도구 ▲흑산군도 사람들의 삶과 도구 ▲조선시대 소금생산방식 ▲돌의 민속지 ▲제주도의 생산기술과 민속 ▲제주도 포구 연구 ▲사진으로 보는 1940년대의 농촌풍경 ▲한국의 바구니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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