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고향 친목회1960년대 70년대에 제주도를 산 사람들은, 일본 재일교포에게서 도움을 않받은 사람이 있을까? 라고 자문자답해 본다. 친척이 일본 동포로 살고 있으면, 직접적으로 돈과 물건을 받아서 좋아했을 것이며, 친척이 없더라도 간접적으로 어떤 형태이든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필자는 일본에서 직접적인 도움을 받
[재일동포 그들은 누구인가] 쯔루하시 짝퉁 아줌마 경진이(1편에 이어) 익숙한 솜씨로 일할 수 있었다. 걱정이 하나 있다. 뉴간(入管, 入國管理廳 입국관리청)이 술집엘 쳐들어오는 것이다. 싹 잡아 들어가 검사를 한다. 결혼비자는 괜찮치만 학생비자는 다음 비자를 받을때 갱신이 되질 않는 것이다. 또 비자가 없는 여자들도 있어서 강제출국 시킨다. 어제는 오른편
쯔루하시에서 가방가게를 하고 있는 경진이.낮에는 공포에 떨면서 장사를 해야만 오늘 밥을 먹을 수 있고, 밤에는 그 공포에서 벗어났다고 술로 한시름을 놓는 매일의 연속이다.다른 일을 하고 싶지만, 할 만 한 일이 없다. 지금까지 배운 거라곤 술장사이지만, 이젠 여자가 나이가 들었다고 술장사
[재일동포 그들은 누구인가] 쯔루하시의 짝퉁 아줌마들도 쯔루하시에 이상한 바람이 불고 있다.최근에 오는 사람들, 나는 최근에 오는 New Comer 들을 '비행기 1세'라고 부른다.해방전 1세, 밀항 1세, 비행기 1세를 구분해서 이름 붙였다.비행기 1세들은 여권을 자유롭게 만들수 있는 1988년이후에 일본에 온 사람들이다.쯔루하시에 최근에 들어서 새로
'일본 오사까 쯔루하시' 가 아닌 '한국 제주도 쯔루하시'교토(京都)시내에 있는 대학에서 여학생이 나에게 묻는다. '선생님 집은 오사까 어디에요?''오사까 쯔루하시(鶴橋)''아... 짝퉁 동내'깜짝 놀랐다. 김치에 야끼니꾸(불고기) 동내라는 대답이 나올거라고 상상했는데, 짝퉁 동내란다.내가 근무하고 있는 대학은
우리 재일동포들은 예체능계에서 실력을 발휘하면서 일본 대중문화의 창달에 상당한 공헌을 하고 있다.일본의 국기라고 말할수 있는 야구.일본 프로야구 구단은 12개 구단이다. 그중에 2개 구단이 한국계이다. '롯데'와 '소프트 뱅크'이다. 롯데는 한국 롯데와 같다. 한국 롯데 회장과 일본 롯데 회장은 한 사람이다. 소프트 뱅크의 회장은 재일동포 출신으로
재일동포와 야키니쿠한국 불고기를 일본말로는 '야키니쿠(焼き肉)' 라고 부른다. 구운 고기라는 의미이다. '야키니쿠'란, 한국 불고기가 재일동포들에 의해 일본말 '야키니쿠'로 이름이 바뀌면서, 일본 식문화의 한 장르로서 일본사람들 입에 정착하게 된다. 이 '야키니쿠' 식문화 창시자가 우리 재일동포들이다.또 '야키니쿠'라면, 먼저
존경하는 분이 계시다.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에서 자랐고, 대학은 1960년대 한국 서울에서 공부하신 분이다. 사모님은 서울에서 대학때 연애결혼을 하셔서 한국에서 오신 분이다.이분 내외는 세상을 정확히 보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이분과 사모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존경한다.이분의 아들에게 어릴때 이런 이야
일본에 와 본 사람이면 다 알겠지만, 한국에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빠찡코다. 일본에는 약 1만5천 개의 빠찡코 점포가 있다. 또 전차 역 주변에는 아무리 작은 역이라도 빠찡코 가게가 있다. 큰 역은 수십 점포, 작은 역도 몇 점포씩은 꼭 있다. 어느 점포나 사람으로 가득하고, 남녀노소 할것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 거기에 고등학생까지 끼어든다. 물론 미성년자
한국에서 외국에 나가서 사는 동포는 약 7백만명이 있다. 미국에 약 200만명(합법이민및 기타등등을 포함), 중국에도 약 200만명, 일본은 귀화한 사람까지 합쳐서 약 100만명이다. 어느 나라이든 정든 고향을 떠나서 그 나라에 가서 산다는 것은 대단한 각오가 필요한 것이지만, 일본의 재일동포는 다른 나라의 동포와는 성격이 다르다.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본
동포들의 관혼상제는 한국에 비해서 상당히 합리적이다.한국에 있는 친지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부조돈 때문에 못 살겠다' 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일본에서는 '인사는 있어도 부조는 없다' 라고 표현을 할 정도로 합리적이다. 부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처럼 부조가 부조를 부르는 그런 부조는 없다. 꼭 알리고 싶은 곳만 알리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일본 밀항의 최고 성공은 등록을 만드는 것이다. 등록을 만든다는 것은 외국인등록을 필하여 정식 외국인으로서 일본에 살수 있는 자격을 받는 것이다. 정식 외국인이 되면 영사관에서 여권을 발급 받을수 있으며, 당당히 비행기를 타고 꿈에도 그리는 고향 제주도를 다녀올수 있다. 이렇게 등록을 만들어서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간다면 제주도지사도 부럽지 않았다
강제 송환이지만 귀국 길이다. 이제 수용소와 작별하고 배를 타러 간다. 버스를 타고 수용소를 나와서, 오무라(大村) 만(灣)에서 배를 탄다. 오무라 수용소 2층에서 보면 배도 보이고, 배를 타는 사람도 보이고, 서로 손을 흔들어 작별을 한다.오무라 만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옆에 있는 도시 나가사키(長崎) 시, 나가사키 항구는 바로 바깥
오무라 수용소는 한국의 대북 공작장소로써, 또 북한의 대남 공작장소로도 이용되기도 했다. 북한은 한국에 간첩을 침투시킬 목적으로 북한에서 일본으로 밀항시켜 일부러 실패를 한다. 그러면 오무라 수용소로 가게 되며, 한국에서 밀항을 왔다고 하면 한국으로 강제 송환 된다. 자연스럽게 한국으로 침투가 가능해진 것이다. 한국 정보당국은 이런 루트를 통한 간첩을 검거
오무라 수용소를 보면, 일본 정부는 우리 동포들을 얼마나 미워했는지를 알 수 있다.1952년부터 7년이상 징역형을 받은 형법위반자 동포들을 실질적으로 한국으로 강제송환 시킬 수 없었지만, 계속 한국으로 송환시킬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수 있다. 최근에 공개된 1970년대의 한국과 일본의 외교문서에는 만약 한국정부에서 인수를 거부한다면 북한으로 보내겠다고 엄포
오무라 수용소가 있었던 그 자리는 한국사람을 가두었다가 한국으로 보내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부터 우리 한국과는 인연도 깊은 곳이다.오무라 수용소가 있는 나가사키(長崎)현 오무라시는, 나가사키시(長崎市)의 바로 옆이다. 제주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은 나가사키이며, 1990년대 제주시와 나가사키시를 2시간만에 달리는 고속배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수용
필자는 1955년생이다. 필자가 '오무라 수용소' 라는 단어를 들은 것은 초등학교 때, 1960년대이다. 밀항 갔다가 잡히면 오무라 수용소에 보내지고, 그곳에 좀 있다가 한국으로 강제송환 되기까지 수용되는 곳으로 알고 있었다. '오무라 수용소' 라는 단어는 그후부터 지금까지 어떤 단어보다 더 내 머리속에 확실히 남아있다. 나 뿐만 아니라 1950년대
밀항은 어떻게 했을까?1950년대 밀항과 1960년대와 70년대 밀항은 사뭇 다름을 인터뷰를 통해서 알수 있다. 1950년대 밀항은 제주도 산지항에서 배를 탔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1960년대 70년대에 제주도에서 배를 탔다는 사람은 없었다. 주로 부산에서 배를 탔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밀항배를 탈때는 부산 영도도 한몫을 한다. 부산 영도는 제
왜 한국사람들은 특히 제주도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일본으로 갈려고 했을까? 일본 밀항의 가장 큰 이유가 가난이라고 하지만, 꼭 가난만이 사람들을 일본으로 가게 했을까? 가난이 가장 큰 이유이기는 하지만, Japan Dream도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당시는 일본 제품(일제)는 너무 좋았다. 한국제 물건과는 비교가 않될 정도로 품질이 좋았다. 교포 친척들이
잘 갔다고 연락 왔다고 한다.돈 온단다.1년에 큰 밭 하나씩 산다고 한다.등록 만들었다고 한다.비행기 타고 온단다.비행기 타고 귀국했더니 도지사 부럽지 않았다.밀항.제주도 사람 중에서 '우리 집안은 밀항과 관계없다'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있을까? 제주도 사람중에 사촌이내 친척 중에 밀항 경험이 없는 집안이 있을까?당시의 밀항은 제주도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