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지름떡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던 추석이 지났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말라던 것은 햇과일을 비롯한 음식만은 아닐 터. 조상을 뵙고 그 아래로 가지를 친 혈육들과의 정도 포함되는 거다. 넘쳐도 탈, 모자라도 탈인 게 음식이고 사랑이다. 갈수록 추석의 바람과는 달리 물질은 넘치고 정은 날로 여위는 느낌이다. 친척집을 돌며 차례를 지내고 나서 먹는 쌀밥과 떡은 참 맛있었다. 어르신들께서는 당신 몫의 떡이나 고기를 아이들에게 넘겨주셨다. 이를 제주에서는 ‘반 받아주신다’고 하는데 그때 할아버지...
(45) 바롯국 제주가 태생인 사람들은 대부분 국을 좋아한다. 육해공 고기는 물론 나물이나 해산물을 이용한 제주의 국은 정말 다양하다. 오래 밥을 먹어 온 사람들은 국물 같은 게 없으면 밥이 내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별 찬 없는 보리밥을 내릴 때도, 밥으로는 채우지 못한 배를 채울 때도 국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국이 모두의 입맛을 충족시킨 것도 아니고 맛있었던 것도 아니다. 밥상 앞에서 숟가락소리만 내는 아이들에게는 국을 많이 먹어야 궁량이 생긴다며 다독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되어서도 반갑지 않...
(44) 우무냉국 감쪽같이 여름 간다.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몰이를 하며 가을 쳐들어온다, 그동안 친했던 찬 음식들도 정 떨어져 간다. 끝날 거 같지 않은 더위에 생각 없이 사다놓은 우무가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물끄러미 날 본다. 텃밭에 늙은 물외를 따다가 씨를 파내고 채 썬다. 우무도 채 썰어 놓고 볶은 콩가루와 물을 붓는다. 국간장과 식초, 설탕으로 간한다. 새콤 달콤 고소한 국물이 입으로 후루룩 들어온다. 기분 좋은 맛이다. 이렇다 할 향기도 맛도 색도 없는 물외와 우무가 덩달아 새콤 달콤 고소하...
[윤창훈의 과학이야기] (2) 장수식품 ㊺ 채소는 샐러드보다 수프로 건강 때문에 식탁에 채소 샐러드를 올리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생채소를 그대로 먹으면 항산화 성분은 거의 흡수되지 않는다는 게 최근에 알려졌다. 항산화 성분은 식물 세포의 내부에 존재하며, 세포는 세포벽이라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이 벽을 파쇄하지 않으면 내부의 항산화 성분이 외부로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소나 말 등의 동물과 달라서 세포벽 성분인 셀룰로스(섬유소)를 분해하는 효소가 없어 세포벽을 파쇄할 수 없다. 생채소는 씹는 정도로는 세포...
(43) 오메기떡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이 더운 계절에 오메기떡을 먹는단 말인가. 그것도 시원하고 쫄깃한 떡을 말이다. 오메기떡은 변했다. 변신이 무죄라는 말은 오메기떡을 두고 하는 말 같다. 변했기에 다시 살아나 명물이 될 수 있었다. 먹으려고 오메기떡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술을 담그려면 오메기떡을 만들어야 했다. 할머니는 술을 만드셨다. 60년대 말쯤 ‘아무라도 집에 술 있느냐고 물어보면 모른다’고 답하라던 말을 기억한다. 그리고 70년대 들어서면서는 술을 담그지 않으셨다. 할아버지가 돌...
(42) 게웃젓 얼마나 맛이 있길래 ‘게웃젓은 애첩에게도 안 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란다. 게웃은 전복내장을 말한다. 전복내장으로만 담근 것이 아니라 전복 살도 같이 섞어 담근다. 내장으로만 담그거나 내장이 더 많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어서 전복젓이라 하지 않고 게웃젓이라 했는지도 모르겠다. 맛도 맛이지만 얼마나 귀한 물건인가. 목숨을 걸고 비창을 들고, 열 길 물속을 들락거리며 잡아 올린 진상품이었다. 잡은 사람들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괘씸하고 슬픈 존재가 전복이었다. 전복을 찌고 말려 숙복이라는 걸...
(41) 깻잎지 연일 폭염주의보, 경보가 내린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종일 에어컨 바람 밑에 있는 사람들은 나무 그늘이 그립고, 나무 그늘을 곁에 두고도 뙤약볕 쬐며 일하는 사람들은 냉방이 부럽다. 적당하게 섞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제 여름은 안간힘을 다해 더위를 견디는 일만 남았다. 더울 때는 끼니도 귀찮다. 밥상머리 둘러앉은 가족들을 떠올리며 애를 써 보지만 하는 것은 물론 먹는 것조차 귀찮다. 아궁이 앞에서 땀 흘리며 끼니를 차려내시던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 새삼 눈물 나게 ...
(40) 성게젓 먹는 걸 빼놓고 사는 재미를 말 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산과 바다, 그 양팔에 안겨 산다는 건 축복이다. 산해진미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끔 먹을 복을 누릴 수 있어서다. 저장기술이 나아져 아무 때나 먹자고 들면 못 먹을 바는 아니지만 제철의 날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그 산과 바다가 주는 풍경을 거느리고 먹을 수 있다면 말이다. 어쩌다 그런 횡재를 하는 날, 제주에 산다는 게 말 할 수 없이 좋다 봄나물이 마무리를 해 갈 즈음해서 바다는 살이 오르기 시작한다. 중산간 마을에서 ...
(39) 돔베고기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흐른다. 비 그친 사이 내리쬐는 볕살은 따끔따끔하고 구름에 싸인 해는 뭉근뭉근 찐다. 비가 내려도, 내리지 않아도 습한 기운은 온 정신과 몸을 짓누른다. 요즘같이 다양한 농작물로 농업경영을 하는 농업의 시대는 장마철도 바쁜 농가가 있다. 하지만 식량작물 중심의 농사 시절에 장마철은 한가했다. 남자들만 한가했다는 게 정확할지 모르겠다. 우후죽순이 따로 없었다. 때와 장소, 날씨를 불분하고 자라는 잡초들과의 전쟁은 여자들 몫이었으니. 삼삼오오 수눌어 가며 그 더운 ...
(38) 쌈 우리음식의 또 한 가지 자랑은 쌈이 아닐까 한다. 쌈을 싸는 재료도, 싸 먹는 음식도, 싸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아마 한국음식 중에 제일 많은 재료와 방법을 가진 음식이 아닐까 한다. 게다가 제 마음까지 야물딱지게 넣고 싸서 상대의 입속에 넣어 줄 수 있는 게 쌈 아닌가. 세상에 이런 음식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우리는 어느 계절 어떤 자리와 장소를 막론하고 쌈을 즐긴다. 옛날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재료나 방법이 무한 진화하고 있을 뿐이다. 쌈은 삶은 거, 구운 거, 볶은 것은 물론 날것...
(37) 초피 자연은 저마다의 이름처럼 냄새를 가지고 있다. 우리 삶에서 향은 행복과 가깝고 냄새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것들과 친하다. 냄새는 익숙해져서 향이 되기도 하고 향기는 또 질려서 냄새 따위가 되고, 또한 오랜 시간 사람들과 한데 어우러지면서 문화가 되기도 한다. 자연 그대로의 생명은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냄새도 피우지 않는다. 그러니까 향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연본능의 산물이다. 초피의 자기 보호본능은 예술이다. 강한 향과 얼얼한 맛에, 날카로운 가시까지 달고 있으니 말이다. 제주사람들이 아끼...
(36) 개역 볕살이 뜨겁다. 어느새 씰룩씰룩 자란 새싹들이 싱그러운 그늘을 만들어낸다. 이런 그늘의 맛은 상록수가 만드는 그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상록수가 만드는 촘촘한 그늘이 부모님께 얻어먹는 맛이라면 나풀나풀 쏟아낸 햇가지가 볕살 흩뿌리며 만들어 내는 그늘은 자식들이 주는 선물 같다. 어느 그늘이건 여름날 그늘이 존재 한다는 건 축복이다. 특히나 바깥일을 하다가 찾아든 그늘 맛은 자주 경험할 필요가 있다. 꿀 보다 단 물을 맛 볼 수 있고, 가까이 하기엔 다소 껄끄러운 흙에도 벌렁 등을 붙이고, 그...
(35) 자리물회 바짝바짝 기온이 오른다. 겨울이 끝 모를 추위가 구렁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라면 여름은 더위의 끝을 올려다보며 하는 등산 같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보면 어느 날 밤 달라진 공기를 만난다. 잘 해 냈지 라며 별을 올려다보는 것도 잠시, 내려서야지 하는 시원섭섭함이 밀려온다. 어김없이 가 버릴 그 여름이 이제 시작이다. 꼭짓점을 새로 찍는다는 더위조차도 아직은 풋풋하고 발랄하다. 이런 날 점심은 자리물회다. 구이, 조림, 강회 등 여러 가지로 먹지만 자리돔 하면 단연 첫 번째는 ‘자리물회...
(34) 몸국 얼마 전 수망리 마을 체육대회가 있었다. 시내 공동주택에 살다가 마을주민이 되고나서 처음 참여하는 행사였다. 아침부터 스피커소리가 온 동네를 깨웠다. 아이 어른 할 거 없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마을운동장에 모였다. 반별로 과일이며 간식거리를 한가득 쌓아놓고 이기고 지는 경기 보다는 얼굴 보고 박수치고 웃는 일이 그저 좋은 날이었다. 한 쪽에선 점심을 차리느라 분주했다. 옆 반에는 고사리육개장을 끓이고 우리 반에서는 몸국을 끓였다. 도시나 다른 곳으로 나가 사는 사람들까지 아이들을 데리...
(33) 자리젓 그리워하는 음식을 보면 그 사람의 고향을 짐작한다. 설령 그것이 없으면 못 견딜 만큼 좋아하는 게 아니더라도 말이다. 고운 정 미운 정이 섞여 더 진한 정이 드는 것처럼 냄새조차도 싫을 만큼 물린 음식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요즘이야 식생활이 양적 질적으로 풍부해져 그런 음식이 흔하지 않겠지만 그런 음식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청장년 시절을 다 보내고 슬금슬금 추억을 꺼내먹기 시작 할 때면 누구랄 것도 없이 숟가락 들고 끼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맛 집 순례 자랑도 아닌데...
(32) 상외빵 햇볕이 점점 두터워져 간다. 솜털을 벗어던지며 새순들도 초록 살이 오르고 밀 보리는 하루하루 익어간다. 아니다. 밀은 어디로 갔는지 띄엄띄엄 보리만 익어간다. 밀 재배는 거의 사라졌지만 저렴한 밀가루의 공습으로 음식은 정착되었다. 오히려 쌀을 위협하고 있을 정도다. 밀은 쌀이 궁핍한 과거, 제주에서 ‘빵떡’을 만들어냈다. 빵도 아니고 떡도 아닌 것이, 빵도 같고 떡도 닮은 것이 ‘빵떡’이다. 떡을 대신 했으니 떡이라 해도 될 거 같고, 빵 만들 듯이 만들었으니 빵이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기...
(31) 고사리육개장 제주의 대표 산나물은 고사리다. 봄철 잦은 비 날씨와 안개는 제주에만 있는 ‘고사리장마’다. 고사리가 많이 나고 잘 자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른 봄 아래쪽부터 나기 시작한 고사리는 봄을 따라 한라산 중턱 깊은 숲까지 올라가며 여름이 보일 때쯤 끝이 난다. 지금은 나들이 삼아, 소일거리 삼아, 재미삼아, 체험으로 간다. 어떤 날은 고사리보다 사람이 더 많게 보이는 들도 있다. 그렇게 꺾어도 여름철이면 들은 활짝 핀 고사리로 가득해 있다. 고사리는 꺾이고 꺾이면서 아홉 번이나 나온다고 ...
(30) 톳밥 봄볕은 활동적이며 찰지다. 머무는 자리마다 싹이 돋고 꽃봉오리가 터진다. 텃밭에 터주 대감인 부추, 미나리가 기지개를 켜며 올라온다. 그래봤자 봄철 밥상은 가난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년기 대부분을 할머니 손에 자랐다. 떨어진 동백꽃을 다 주워 모아도, 송아지를 못살게 굴어도 고사리 꺾으러 간 할머니와 저녁은 늘 더디 왔다. 그 봄날 할머니와 같이 먹던 톳밥은 잊을 수 없는 음식이다. 톳밥은 춘궁기에 밥을 늘리기 위해 해 먹던 음식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보릿고개를 벗어난 시기라 누구나 보...
(29) 마농지 마농지 담글 시기다. 마농지는 제주의 대표 장아찌다. ‘지’는 장아찌를 말한다. 장아찌는 주로 채소류를 된장이나 고추장, 간장에 담가 삭힌 전통발효음식이다. 저장음식으로 든든한 밑반찬이다. 채소를 갈무리하는 시점에 간장보다는 주로 된장이나 고추장에 담근다. 제주음식에서 장아찌는 흔하지 않다. 된장이나 고추장에 담그는 경우는 없고 육지부와는 달리 간장에 담갔다. 마늘, 무말랭이, 반치라고 하던 파초줄기가 전부였던 것 같다. 그것마저 거의 사라졌지만 마농지만 예외다. 사계절 신선채소가 흔해서 ...
(28) 해삼토렴 봄은 남쪽 바다로 부터 올라온다. 해초를 살찌우며 소리 없이 올라온다. 봄 오면 달래, 냉이, 쑥 등 산나물을 생각하지만 바닷가 사람들은 톳이나 미역을 캐는 바다에 먼저 빠진다. 긴 겨울 물살을 이겨낸 미역이나 톳은 산나물보다 더 진한 봄내를 풍긴다. 삶의 터전으로 치자면 땅위보다 몇 배는 더 척박한 곳이 물속 아닌가. 그래서 해초가 풍기는 봄 내음은 산나물과 비교할 바가 아닌 것이다. 다만 지난날처럼 누구나 그 진한 봄 내를 맡으러 바다 속으로 발을 들여 놓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