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용 원광대 명예교수

제주4.3평화재단이 11월 13일부터 14일까지 개최한 ‘제15회 제주4.3평화포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와 4.3의 세계화라는 주제로 열렸다. 포럼에서 토론자로 참여한 김재용 원광대 명예교수는 제주4.3을 이해하기 위해 ‘제주 단선반대 항쟁’이란 개념을 강조했다. [제주의소리]는 김재용 명예교수의 발표문을 정리해 특별기고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편집자 주] 

육지의 그 누구도 성취하지 못하였던 단선반대항쟁의 성과를 이룬 제주 민중은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켜내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독립된 민주 공화국을 만들려고 하였던 전 세계 피압박 민중들의 비원을 이끌어 내었다는 점에서 가히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은 4.3평화기념관에 전시된 백비.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육지의 그 누구도 성취하지 못하였던 단선반대항쟁의 성과를 이룬 제주 민중은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켜내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독립된 민주 공화국을 만들려고 하였던 전 세계 피압박 민중들의 비원을 이끌어 내었다는 점에서 가히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은 4.3평화기념관에 전시된 백비.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48년 3월 12일 유엔 조선위원회가 유엔 소총회에서의 결정, 즉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 결정을 찬성 4, 반대 2 그리고 기권 2로 통과시킴으로써 남쪽에서의 단독선거가 완전히 확정되었다. 

이 결정에 가장 먼저 반대하면서 전국적인 저항운동을 펼친 것은 7거두(김구, 김규식 등) 성명 이후 이어진 남북협상파였고, 그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지역이 바로 제주였다. 

제주의 유일한 신문이었던 ‘제주신보’가 이 성명서를 전재하면서 남북협상을 통한 단선반대운동을 강하게 밀고 나가자, 박경훈 같이 제주 민전에 몸담았던 인사들뿐만 아니라 제주 민중 전체가 들고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남북협상을 통한 단선반대운동이 제주에서 강하게 일어난 것을 이해하려면, 그 전 해인 1947년 3월 1일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통한 통일독립을 촉구한 제주 민중의 움직임을 먼저 주목해야 한다. 

1947년 3월 1일 조천과 애월에서 온 도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통한 통일독립을 희구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관덕정에서 열렸다. 당시 서울에서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지지하는 쪽은 남산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반대하는 쪽은 동대문 운동장에서 집회를 열었고 결국은 시내 한복판에서 양측이 충돌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육지와 달리 제주에서는 아무런 내부적 분열 없이 제주 민중이 통일독립을 희구하는 행사를 열었다. 이는 특기할 일이다. 바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기에 남북협상운동이 시작되자 제주 민중이 앞장서서 단선반대 항쟁을 일으킨 것이다.

박경훈과 ‘제주신보’를 중심으로 한 남북협상을 통한 단선반대운동이 강하게 일어나고, 제주 전 지역의 민중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자 남로당 제주위원회는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8년 3월 15일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 지도부는 회의를 거쳐 이 거대한 단선반대 항쟁에 나설 것을 결정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남로당 중앙위원회의 지도하에 진행되었던 1948년 ‘2.7 구국투쟁’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남로당 제주위원회가 제주지역에서 가장 강하게 불고 있던 이 남북협상운동에 독자적으로 참여를 결정하고 단선반대 항쟁에 합류한 것은, 만약 이 거대한 흐름에 참여하지 않으면 더 이상 제주 민중 앞에 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38이남에서 남북협상을 통한 단선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이미 김구와 김규식 등 다양한 경로로 남북협상을 제안 받았던 김일성과 김두봉도 마냥 외면할 수 없었다. 과거 중국에서 김구와 소통하였던 김두봉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김일성과 소군정을 설득하여 결국 남쪽의 남북협상 제의에 호응을 하게 된다. 

1948년 3월 25일 남북협상에 응한다는 메시지를 방송을 통해 이남으로 보내자, 남쪽의 남북협상운동은 폭발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 ‘제주신보’는 미군정도 막지 못할 정도의 이 격렬한 여론을 전하면서 제주 민중의 결정적인 호응을 호소하였고, 이는 우왕좌왕하던 유해진 지사마저 동요시킬 정도로 여파가 컸다. 

3월 15일의 지도부 회의 이후 아직 소규모로 투쟁하고 있던 남로당 제주위원회는 남북회담의 합의 소식을 접하자 다시 지도부 회의를 하여, 이 역사적인 흐름에 직접적으로 동참하기 위하여 4월 3일 봉기를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1948년 3월 30일부터 단선 등록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직후를 선택한 것이다. 

제주 단선반대항쟁의 주체였던 제주의 남북협상파와 부 주체였던 남로당 제주위원회의 노력으로,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날에 북제주 2지역에서는 선거를 좌절시키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항쟁은 미국과 소련에 반대하면서 통일독립을 성취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상에서 일어난 탈식민화 운동의 첫 자리에 놓이는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운동이었다. 

물론 4월 30일 김구와 김규식이 제한된 성과를 안고 남으로 돌아오자, 미군정을 뒷배로 하는 단선지지 세력은 김익렬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박진경을 앉히면서 본격적인 ‘빨갱이’ 몰이에 나섰고, 소군정을 뒷배로 한 남로당 중앙은 5월 7일 연락원을 파견하여 제주 민중의 자치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제주 민중의 단선반대항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제주 민중의 꿈은 좌절되었고, 결국 국가폭력에 노출되어 큰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육지의 그 누구도 성취하지 못하였던 단선반대항쟁의 성과를 이룬 제주 민중은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켜내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독립된 민주 공화국을 만들려고 하였던 전 세계 피압박 민중들의 비원을 이끌어 내었다는 점에서 가히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국가폭력에 희생된 이들의 고통을 드러내는 일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품었던 항쟁의 꿈을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명예회복이 아니겠는가.

한국인에게 통일독립을, 인류에게 탈식민화의 전망을 열어준 1948년 5월 10일을 기념하는 일에 우리 모두가 나서야 할 때이다.


김재용
1960년 통영 출생. 원광대학교 명예교수이자 지구적세계문학연구소 대표,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문학포럼 대표, ‘지구적 세계문학’ 발행인 겸 편집인. 저서로 ▲분단구조와 북한문학 ▲협력과 저항 ▲풍화와 기억 ▲세계문학으로서의 아시아문학 ▲4.3항쟁과 탈식민화의 문학(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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