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146) 겨울다도해 

 

다도해 겨울 뱃길엔 헐벗은 것들만 남아있다
낯익은 피붙이들이 낮게 깃든 그 해역엔
섬진강 하혈下血이 번져 
하늘 끝도 붉었더라

섬 비탈 늙은 해송 지쳐 늘어진 가지 위엔
장모님 낙심 같이 한밤 내 눈이 쌓이고
가난은 남도 처갓집 
불빛으로 뜨고나

영산강 낙동강물이 가슴 풀고 울었던 밤
떠돌다 지친 섬들이 불을 켠 채 잠이 들고
바람 잘 새벽녘에야 
윗목으로 드는 바다.

/1988년 고정국 詩

#시작노트

제주에서 여객선을 타고 완도에 내려, 도항선을 네 번씩이나 갈아타면서, 저물녘 다도해 항로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 해역에 짤막짤막한 수평선에 나직나직 엎드린 섬들이 마치 가난한 처갓집 형제들처럼 다가왔다가 멀어지곤 했습니다. 

섬진강을 가운데 두고 동쪽으로는 영남지방, 서쪽으로는 호남지방으로 나누는 지역감정 또한 극심한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첫수 초장에 “섬진강 하혈이 번져/하늘 끝도 붉었더라”라는 자극적 표현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등단 2년 전인 1986년도에 「혹통퐁낭」이 저의 처녀작이라면, 이 「겨울다도해」는 등단 후 첫 작품인 셈입니다. 

한반도 남녘땅은 ‘호남’과 ‘영남’으로 등을 돌려 있었지만, 이곳 다도해에 흘러온 영산강, 낙동강물이 섬진강물을 중재로 서로 가슴 풀고 울고 있다는 시대적 나의 간절함을 여기 「겨울다도해」에 담고 싶었습니다. 

전라남도 완도군에 위치한 소안도와 당사도, 항일투쟁의 시발점이었던 이곳은, 지금도 집집마다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습니다. 분기별로 날짜를 잡고 그 섬에서 일주일정도 머물다 오곤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섬에는 제주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굴뚝새를 비롯해 꾀꼬리, 노랑부리저어새, 추장새라 일컫는 후트티, 쇠딱따구리 등의 희귀종 새들이 집 근처에 찾아와 놀다가곤 한답니다. 그리고 11월이면 시베리아에서 날아와 이듬해 2월까지 수백 마리의 백조(고니)가 겨울을 넘기고 간답니다. 

배낭에 책 한 권, 라면 몇 개, 햇반 몇 개에다, 칫솔 하나 달랑 꽂고 훌쩍 갔다 훌쩍 오는 삶…, 오늘 이 「겨울다도해」가 나에게 선물한 시간과 공간을 최대한 향유하면서, 말 그대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