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악함은 생각하지 않는데서 온다

인문학은 무엇인가. 인문학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을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와 자아 실현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로서 인간에게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모든 문제 의식의 출발점이 된다. 우리 공동체의 유지 발전에 필수적인 공공재인 셈이다.

현실에서는 인문학이 위기라고 한다. 대학은 인문학이 돈벌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푸대접을 한다. 일부 대학들은 인문학의 대표 주자인 문사철(文ㆍ史ㆍ哲)에 학생이 없어 통폐합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립대 법인화 추세는 인문학 등 기초학문을 더욱 고사시킬 위험이 크다. 공공재인 인문학을 시장에만 맡겨 놓을 경우 학문의 기초가 무너져 사회 전반에 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얼마 전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높은 청년실업률은 대학에서 문사철의 과잉공급으로 인한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올 4년제 대졸자의 실업률은 공학계열(41.4%)이 인문 사회계열(33.4%)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높은 청년실업률의 책임을 엉뚱하게 인문학, 곧 문사철 전공자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에 한 재벌회장이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등 일련의 대형사고와 관련 부실공사의 원인을 모 대학 공대 졸업생들 때문이라고 말한 것과 비슷한 논리다. 논리적으로 따져보자면, 불확실한 믿음을 지나치게 부풀린 ‘불확실성 논증’이다.

과연 문사철은 공허한 논쟁이나 일삼는 효용가치도 없는 학문인 것인가. 문사철 전공자를 직장에서 편하게 일하려는 철부지로 간주하고, 동양 철학으로 포장한 ‘점집’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몰이해와 경직된 인식에 폭소와 서글픔을 금할 수 없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에 의하면 “희극적 웃음은 개인의 비사회적 태도에 대한 사회적 경고이자 징벌”이라고 한다. 인문학에 대한 조롱이 희극적 웃음을 유발하고 사회적 징벌을 받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까 걱정된다.

최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인문학적 처방이 제시되고 있다. 애플과 구글 등 정보기술(IT)분야를 선도하고 있는 기업에도 이미 인문학 바람이 거세다. 특히 구글은 올해 채용 예정인 6천 명중 4천~5천명을 인문분야 전공자로 뽑을 계획이라고 한다. 잘 나가는 기업의 최고 경영자부터 일반 사원에 이르기까지 인문학 배우기가 한창이다. 실용성만 강조하는 인문학 열풍에 대해 자본주의적 소비 욕망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그렇지만 대학에서 축출된 인문학이 사회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있는 이유는 뭘까.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과 이해는 모든 문제 해결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자본과 기술, 경쟁에서의 승리만으로 인간이 행복해질 수는 없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호 인정ㆍ존중ㆍ공감ㆍ사랑이 우선해야 한다. 기업 경영의 원천은 사람에 대한 통찰력, 구성원의 상상력, 그리고 상호 협력이다.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기반으로 조화로운 경쟁을 해야 오랫 동안 생존할 수 있다. 기존 지식을 전복시키는 인문학적 통섭의 사유가 필요한 이유다.

기술 지상주의는 기능과 편의성 등만 중시할 뿐 사회적 심리적 파장에 대해서는 도외시 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폰의 사생활 침해 논란, 후쿠시마 원전 재앙과 같은 문제는 도덕적 철학적으로 숙의가 필요하다. 기술이 주는 혜택에 빠져 무관심ㆍ무감각ㆍ무비판으로 일관할 때 그 해악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인문학적 성찰은 필수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기술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세상 대부분의 악함은 악한 의도 때문이라기보다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소득 수준이 곧 사람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소득은 숫자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영국 런던정경대의 리처드 레이어드 교수는 1인당 국민소득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국민의 행복지수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는 ‘행복의 역설’을 주장한 바 있다. 물질 만능주의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는 얘기다. 돈에 기댄 행복 파티는 이제 끝났다.

▲ 권영후 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장
지금은 인문학과 동맹을 맺어야 ‘행복의 역설’ 시대를 넘어 설 수 있다. 인문학의 재발견과 인본주의적 모색이 진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인문학적 사고가 우리 삶의 중요 축이 되어야 한다. 한 때의 유행이라거나 현실과 유리된 사치로서의 인문학은 배격되어야 한다.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잃고, 어떤 대가를 치르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깊이 살펴 보아야할 시점이다.  / 권영후 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장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