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출가해녀'

억척스러움의 대명사 '제주 여성'이 다양한 모습으로 조명되고 있다. 제주지역 여성들의 문화사를 살펴볼 수 있는 연구 서적 '제주여성사II: 일제강점기'를 통해서다. 제주발전연구원(원장 양영오)은 이 책에서 일제강점기 제주지역 여성의 삶을 들여다 보고 있다. 23명의 전문 필자가 총 26개 주제로 글을 담았다. 이 중 몇 가지를 정리해 소개한다. /편집자주

일제강점기 제주해녀는 일제와 육지 어업인들에 양쪽으로 핍박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성훈 숭실대학교 겸임교수는 최근 출간된 ‘제주여성사II’에서 ‘국내 출가해녀’를 주제로 일제강점기 출가 해녀들의 삶의 궤적을 쫓았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대한 일제의 수탈은 바다도 빠트리지 않았다. 일본인 잠수들이 제주도 연안으로 몰려와 전복, 해삼, 소라 등을 마구잡이로 잡아갔다.

제주 연안바다가 황폐화되자 제주 해녀들은 더 나은 어장을 찾아 육지로 갈 수 밖에 없었다고 이 교수는 말한다.

일본인에 밀려 육지 연안으로 간 제주해녀들은 다시 한 번 서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육지 바다의 원래 주인들과 충돌했다. 이들은 제주 해녀를 침략자로 여겼다.

울산과 기장은 우뭇가사리와 미역의 국내 최고 어장이었는데, 우뭇가사리를 채취하려 한 제주 해녀가 미역을 따려고 한 것으로 오해했다.

제주해녀에 대한 차별과 구박도 심했다. ‘보작이년’, ‘제주년’, ‘제주놈’하며 구박하기도 했다.

여기다 한국인 객주를 앞세운 일본인의 중간착취도 고역이었다. 이를 막기 위한 자구책으로 1920년에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탄생했다.

▲ 서해안 해녀들이 바다로 뛰어들고 있는 모습. <출처=강만보 사진작가> ⓒ제주의소리

1910년부터 1930년 사이에 국내 출가 제주 해녀수는 2500~3000명가량 됐다.

이들은 뛰어난 잠수 기술로 일본인 잠수업자들을 밀어냈다. 경상남도 연안 수온은 7월 평균 18.6도, 8월 21도인데 일본인 해녀들은 1개월 조업 중 겨울 1주일을 견딘 반면 제주해녀는 15일 동안 조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 어민들은 물안경을 쓰고 어업 했던 데 반해 제주해녀들은 맨눈으로 물질작업을 해 생산량에선 일본인들에 절반 이상 뒤졌다. 일본인들은 10~14관을 채취할 때 제주 해녀들은 5~6관 정도를 채취했다.

종전 직전 1944년경에는 의약품과 화약 원료로 쓰이던 감태 채취에 제주 해녀가 징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교수는 김영돈(1999)을 인용해 “징용으로 감태를 채취했었던 제주해녀들은 자그마한 보수를 받으면서 감태만 채취했었다”고 했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출가 물질을 나간 해녀들의 수입이 제주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1934년 제주도 연안에서 작업한 해녀 5천5백명이 27~28만원을 벌어들인 반면 출가해녀 5천명은 약 70만원을 벌어들였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봄에 다른 지방으로 출가해 5~6개월 정도 물질을 하고 가을 추석 무렵에 제주도로 귀향했다.

이 교수는 “그들(제주 출가해녀)의 삶과 문화를 구체적으로 규명하기는 어렵다. 당시 국내로 출가한 해녀들의 삶을 기록한 자료가 엉성하기 때문”이라고 출가 해녀에 대한 연구의 아쉬움을 덧붙였다.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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