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의 시네마 줌②]「태극기 휘날리며」

요즘처럼 극장을 찾는 일이 즐겁고 흐뭇한 때도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한국영화 관람객 1000만 돌파 시대'라는 이벤트성 광고는 뒤로하고라도 그 양과 질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수입이 짭짤했던 조폭시리즈에서 눈을 돌린 충무로는 지금 예민한 남북분단을 다룬 방화들로 해빙을 맞고 있는 것이다.

간첩이라는 단어가 이렇듯 흔하게, 그리고 거리낌없이 쏟아져 나온 때가 또 있었던가. 벌써 20여 년 전에 나온 임권택 감독의「짝코」를 기억하는 관객들이라면 아마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끼고도 남으리라.

그 이름만 들어도 기억이 선명한「남부군」,「쉬리」,「공동경비구역JSA」,「이중간첩」,「간첩 리철진」,「실미도」, 그리고 최근에 개봉한「태극기 휘날리며」에 이르기까지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는 흥행에서도 그 재미가 쏠쏠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영화들의 주요 관객이 전쟁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3세대와 4세대라는 점이다.

총 제작비 147억, 초대형 블록버스터, 사전 기획 1년 3개월, 엑스트라 동원 인원 2만여 명, 20억원 규모의 평양시가지 세트, 할리우드 모방에서 벗어난 한국판 할리우드 영화 등등 온갖 수식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태극기 휘날리며」는 두 개의 얼굴(이데올로기와 휴먼드라마)로 그려지는 전쟁영화다.

그러나 감독은 순진해 보이지만 영리하게도 한국영화의 전형적인 이데올로기 컷을 뒤로하고 할리우드의 휴먼 컷을 슬쩍해 대중 앞에 선보인다. 나아갭태극기 휘날리며」는 전쟁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전후세대가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그 한몫을 부여받을 여분의 호주머니를 잊지 않는다.

유골 발굴작업으로 시작되는「태극기 휘날리며」는 전쟁서사에 비해 그 스토리가 지극히 단순하다. 한 편의 영화가 관람객의 눈과 귀에 호소하는 매체임을 꿰차고 있는 듯 감독은 1950년 6월 종로거리를 시작으로 대구역사-낙동강 방어진지-평양시가전투-1951년 7월 대전 국군병원에 이르기까지, 그 1년간의 기록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로 초점을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지옥의 묵시록」,「불랙 호크 다운,「라이언 일병 구하기」등 스크린을 꽉 채운 메이저급 전쟁영화를 기억하고 있는 마니아들이라면 적잖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반세기의 분단비극을 다루고 있지만「태극기 휘날리며」는 분단비극의 도화선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적 이념이나 대립현상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전후세대가 만든 영화답게 이 모든 이데올로기는 가족애와 극진한 형제애 속으로 빨려들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장면을 하나 꼽는다면 배급 쌀 두 되를 타먹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한 죄로 반공청년단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진태의 약혼녀 영신(이은주 분)이 전부라고 할까. 그녀의 억울한 죽음에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건 그 시절 슬픈 자화상을 한 이 땅의 어머니다. 배곯는 자식들에게 밥숟가락을 떠넘기고자 한 그녀의 죄목에 우익을 물어 무엇하고 좌익을 물어 무엇하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어요."
팔월 대보름에나 튀어나올 법한 진태(장동건 분)의 약혼녀 영신의 이 한마디에 찬물을 끼얹은 건 무엇이었을까? 불행하게도 그날은 1950년 6월 24일이었다. 다음날 전쟁이 발발하자 두 형제는 강제징집을 당하고, 그들은 전쟁터에서 유서를 써낸다.

그러나 진태의 목표는 분명하다. 징집되어 끌려오기 전 구두닦이였던 그에게 이념이나 사상, 적의 개념은 하찮고 무의미할 따름이다. 늘 1등만 하던 동생 진석(원빈 분)을 살리기 위해 뛰어든 전쟁터인 만큼 그 역할만 수행해내면 그만이다.

영화관을 가득 채운 소녀들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온 것도 이때부터다. 태극무공훈장을 타면 동생을 제대시켜준다는 중대장의 말에 진태는 보다 적극적인 가담자로 변모해가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쟁의 논리에 그만 설득 당하고 마는 것이다.

아버지들의 아귀다툼으로 시작된 전쟁에 총알받이로 나서는 그 아버지의 자식들. 어느 전쟁사를 보더라도 이 명제는 숙명과도 같다. 그러나 감독은 너무도 친절하게 비극의 전쟁터에 절대적인 선으로 형제애를 깔고 절대적인 악으로 전쟁을 깔아버린다.

그뿐이랴. 선악의 접점에 진태를 내세우는 영리함을 발휘해낸다. 이산가족의 아픔을 통해 한국사회가 지닌 끈끈한 가족사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지켜본 탓이리라. 한 자루 만년필을 통해 동생이 아군에 의해 죽었다고 판단되자 형은 인민군 영웅으로 옷을 바꿔 입지 않던가.

그런 시절이 있었다. 낮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밤에는 인공기가 펄럭이던. 영화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진태와 진수 앞에 두 편의 시가 나란히 겹친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으리라.

'내 청춘은 봉오리 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르는/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여러 차례의 살육에 복종한 생명보다도/더한 복수와 고독을 아는/고뇌와 저항일지도 모른다'

한 편의 시는 모윤숙의「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이고, 다른 한 편은 '목마와 숙녀'를 노래한 박인환의「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시인은 해군종군작가단체에 가담을 하고, 나는 지도자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님을 잘 알면서도 사회와 싸웠다는 박인환은 육군종군작가단체에 가담을 했던가.

우리는 더러 그것을 회색휴먼에 사로잡힌 허무로 단정해버리거나 이중성격자라며 단죄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나, 그러나 불행하게도 박인환 시인은 생을 마감하도록 전쟁의 상흔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동족이 동족을 죽여야 하는 그 살육의 피비린내가 너무 참혹해 인간의 본질을 되묻곤 했던 것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이켜보면, 밤낮을 뒤바꿔버리던 깃발은 크고 작은 전쟁을 겪어오는 동안 얼마나 상징적이며 위험성을 내포한 전위물이었던가. 민족성도 과하면 극우로 돌변하는 그 경계에서 복합예술의 가능성에 박수를 보낸다.

※ 필자인 박영희 시인은 1962년 전남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 태생으로 1985년 문학 무크 「民意」로 등단, 시집 「조카의 하늘」(1987), 「해 뜨는 검은 땅」(1990), 「팽이는 서고 싶다」(2001)를 펴냈으며, 옥중서간집 「영희가 서로에게」(1999)도 있다. 시론집 「오늘, 오래된 시집을 읽다」와 평론집 「김경숙」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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