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시민운동 20년 산증인, 한자리서 다시 쓴 '그날'
범도민회 창립멤버부터 현 활동가까지...화두는 '사람'

지난 20년, 제주 사회는 많은 것이 변했다. 좋은 변화도 있었고, 나쁜 변화도 있었다. 그래도 변치 않는 단 한 가지.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는 것.

격동기 제주 사회운동의 산증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올해로 출범 20주년을 맞은 제주참여환경연대는 지난 27일 단체를 거쳐 간 시민사회운동가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20년 만에 처음 마련된 자리였다. 이날 저녁 제주시 연동의 한 식당에 모여든 26명의 옛 ‘투사’들은 저마다의 기억을 맞춰 보느라 분주했다. 단체 이름만도 네 번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991년 ‘제주도개발특별법 제정반대 범도민회’ 창립 멤버부터 2011년 제주참여환경연대 활동가들까지. 이들이 기억하는 시민사회 최고의 이슈는 모두 제각각이었다.

▲ 27일 제주참여환경연대 20년 역사의 산증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제주의 지난날과 오늘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들을 풀어놨다. ⓒ제주의소리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정책위원장이 참가자들을 대신해 이력을 정리해 나갔다.

“1993년 ‘외지인 토지 소유실태 공개 운동’에 앞장 섰던 김국남 씨입니다”

◆ ‘한 장 지도’가 보여준 개발 수혜자의 정체

“시민 제보에서 시작됐어요”

모자를 푹 눌러 쓴 김국남 씨는 의기양양한 기색 없이 담담하게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현장을 뛰어다니는 게 일이었다고 했다.

제주도개발특별법 통과 이후 지정된 개발 지구 상당수가 외지인 소유라는 제보였다.

“확인을 위해 개발 지구에 대한 토지대장을 일일이 떼기 시작했어요. 현장과 대조하며 외지인과 도민 소유지를 가려내기 위해서였죠. 당시 지금 같은 인터넷이 있었나요. 모뎀 하나 덜렁 있었으니 작업이 원시적일 수밖에요. 토지대장을 떼는 것도 한 사람이 뗄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었어요. 모든 회원을 동원해서 한 사람이 수십장씩 떼는 편법을 동원했죠”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가려낸 외지인과 도민 소유지를 한 장의 지도에 표시하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 소위 ‘노른자’ 땅은 외지인, 주변의 녹지 단지는 도민 소유로 드러났죠. 게다가 그 노른자 땅의 상당수는 사학재단이나 일부 재벌들의 소유로 밝혀졌어요.”

파장은 컸다. 제주도개발특별법 통과 전부터 개발 수익이 도민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이후 외지인 토지 소유에 대한 도민 사회의 반발도 커졌다. 동시에 범도민회가 도민 사회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제주도개발특별법 반대 범도민회 결성대회. ⓒ제주의소리

 골프장 단 7개 만으로도 환경 문제 물고 늘어져

고 정책위원장이 골슬머리에 안경을 쓴 남성을 지목하며 말했다. “골프장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김현국 전 환경국장입니다”

1993년 김 전 환경국장이 활동하던 당시 제주도내 골프장은 7개였다. 지금은 4배로 늘어난 28곳이 운영중이지만, 지금보다 더 치열한 싸움이 진행됐었다.

김 전 환경국장은 “환경문제와 수익성이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됐다”고 했다.

맹독성 농약을 골프장 그린에 뿌려 환경을 망치는 것은 물론이고 ‘땅 투기’ 논란도 이어졌다.

김 전 환경국장은 “골프장 허가만 받고 제대로 운영하지 않은 곳도 많았다. 이후 땅 값이 오르면 이를 파는 등 투기용 골프장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1993년 당시 ‘제주도개발특별법 철폐와 민주화실천 범도민회’는 환경영향평가 기준을 엄격하게 하는 데 싸움의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제주도개발특별법이 본격 적용되면서 이듬해 골프장 수가 20여개로 급증했다. 지금은 30여개에 육박하는 골프장을 떠올리며 김 전 환경국장은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 1997년 범도민회 시절 '작은 권리찾기 운동본부'가 출범했다. ⓒ제주의소리

 박원순 변호사와 제주 시민사회 첫 인연

‘투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한 중년 여성이 소개됐다. “1997년 화북 주공아파트 권리 찾기 운동에 나섰던 신경심 씨입니다”

당시 문제가 된 화북 주공 아파트 입주민 대표로 참여환경연대와 인연을 맺은 신 씨처럼 당시 운동은 자발적인 시민들이 주체가 돼 움직였다.

신 씨는 “주공이 입주민들과는 상의 없이 아파트 섀시 가격, 가스 가격을 쥐락펴락 했어요. 결정적으로 아파트 입주 후에도 가스가 나오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죠”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반발은 주권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때 지금의 서울시장인 박원순 변호사와 제주 시민사회 진영의 첫 만남이 이뤄진다.

"박원순 등의 변호사들이 나서서 보상을 받아냈고, 이후 아파트 입주민 대표자와 주공이 함께 가격 협상 테이블에 안게 됐어요”

권리 찾기 운동으로 결집된 이 지역의 에너지는 이후 ‘아파트 공동체 복지’ 운동으로 이어졌다. 주공으로부터 받아낸 보상금을 전액 아파트 복지시설에 썼다고 했다.

“이후 한 경비인이 입주민 아동을 성추행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이때 주민들이 나서 고발했고, 가해자로부터 사과를 받아내고 해직까지 시켰어요”

 작은 발걸음 모여 만든 큰 가치...제주 첫 오름 동호회

제주참여환경연대에는 수많은 작은 소모임이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 중 하나인 ‘오름사랑모임’은 13년여 전 ‘오름’이란 이름이 대중에게 생소하던 당시 만들어진 도내 첫 오름 모임이었다. ‘오름을 사랑하고 보존하자’는 것이 기치였다.

모임은 한때 큰 버스를 대절해서 가야할 정도로 상당한 인기를 구가했다. 이들은 오름 주변의 유적지와 생태 기행을 함께 하며 오름의 소중함을 널리 알려갔다.

2007년 돌연 모임이 중단된다.

이성만 오름사랑모임 전 회장은 “오름을 내려올 때가 됐다는 판단이 있었다”고 말했다. 알쏭달쏭한 답에는 설명이 필요했다.

“오름 인구가 늘면서 더 이상 오름을 오르는 것이 오름을 사랑하는 일이 되지 않게 됐다. 참여환경연대 소식지에 이같은 생각을 밝혔을 때 많은 회원들이 공감을 해주었다”

오름을 즐기던 이들은 이제 ‘오름 모니터링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전 회장은 “오름의 훼손 정도를 살피고 오름 오르기가 지속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 20년 전인 1991년 양용찬 열사의 분신 자살은 제주도개발특별법 반대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사람의 길이 역사다”

범도민회 창립 공동대표였던 양동윤 4.3도민연대 공동대표는 당시 그들이 실현하려 했던 가치와 비교해 현재 제주사회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궁금했다.

양 공동대표는 “‘민중 주최’가 당시 우리의 중심 가치였고, 이를 지키기 위해 뜨겁게 살았다”면서 “그것이 지금 얼마나 실현됐느냐에 대해선 의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20년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시간 동안, 제주도개발특별법 이후 제주의 강산은 그 보다 더 많이 바뀐 모습이다. 오름이 깎이고,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40분 만에 오가는 도로가 생겼다. 송전탑은 거미줄 처럼 오름들을 올라섰다.

이슈도 변했다. 2006년 특별자치도 출범과 함께 의료민영화, 내국인 영리병원 설치, 관광객 전용 카지노 등이 새로운 논란으로 떠올랐다. 제주해군기지 싸움은 그 끝을 알 수 없이 5년여 지속됐다.

암울해 보이는 제주 사회 현실에서도 지난 20년 역사의 산증인들은 꿋꿋히 현장을 지키는 ‘사람’들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있었다.

고 정책위원장은 “역사는 사람이고,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한다.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한 명 한명이 모두 역사다. 역사가 흩어질 위기에 쳐해 있다. 그 역사를 다시 한 번 끌어 안고, 이제 역사를 다시 써 보자는 것이 이번 모임의 취지였다”고 말했다.

그는 시인 신영복 선생의 20주년 축전시를 소개하며 의미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푸른 나무는 곳곳에 있어도 숲이 되지 못 한다.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이들이 숲을 이뤄왔다. 이 숲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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