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후 칼럼] 한-미 자유무역협정 국회 비준과정을 보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국회 비준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앞날에 나타날 ‘사탄의 맷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탄의 맷돌’은 영국시인 월리엄 블레이크의 서사시 <밀턴>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는 산업혁명으로 혼란에 빠진 19세기초 영국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산업혁명이 인간을 통째로 갈아서 바닥 모를 퇴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는 공포의 상징이다.

한-미 FTA는 끝 간 데 모르고 달려온 신자유주의의 폭력적 질주에 급가속을 걸어 우리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탄의 맷돌’이다.  한-미 FTA는 단순한 무역자유화가 아니다. 우리 경제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이다. 경쟁과 양극화, 작은 정부와 규제완화, 민영화, 기업 인수ㆍ합병 등이 더욱 심화된다고 보아야 한다. 한-미 FTA의 수혜자는 미국에 수출을 많이 하는 소수 대기업이고, 농어민과 중소상인, 중소기업, 제약산업 등 다수는 피해자다. 가진 자에게 더 주고, 없는 자를 극심한 경쟁의 허허벌판으로 내몰며 압박하는 정책이다. 

한-미 FTA로 무역장벽이 사라지고 기업 활동이 활발해져 수출시장이 확대된다면우리 살림살이도 나아질 수 있겠는가.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다국적 대기업들이 거둘 엄청난 이익이 국민에게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양극화는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진전되어 중산층이 괴멸하고, 빈민층은 무한대로 확장되는 비극적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무역확대로 경제 규모가 커지면 빈곤층은 축소되어야 하는데 모순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왜 나타나는 것일까.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대외 무역이 지속적으로 팽창하면서 이와 더불어 빈곤이 증가하는 것은 대외무역이 빈곤을 개선해 주는 효과가 미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해외 무역으로 번영의 정점에 서있는 미국에서도 나타난 현상이다. 최근 미국 스탠포드대학이 조사한 보고서에 의하면 제조업을 포함해 전통적으로 중산층이 종사하던 일자리가 꾸준히 줄어들면서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미국의 빈곤층은 16%로, 무려 5000만 명이 최저생계비 이하로 생활하고 있다. “우리의 가난은 그들의 풍요로움의 원천이고, 우리의 고통은 그들에겐 이득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코리올라누스>에 나오는 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99%의 사람들이 처한 현실이 이를 압축적으로 말해준다.
 
우리의 삶도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는 올해의 통계결과가 잇따르고 있다. 대학생수 373만명 중 휴학생이 111만명(30%)으로, 이중 55%가 등록금을 벌기위해서라고 했다. 청년실업율도 매우 높다. 높은 분들은 경쟁력이 없어서, 눈이 높아서라고 젊은이들에게 핀잔을 주기도 한다.

은퇴를 앞둔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불안한 노후의 돌파구로 중소매업에서 창업에 몰두하고 있다. '제살 깎아먹기 경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서비스업이 은퇴자들의 '폐기물 처리장‘이 될 것이라는 말까지 회자된다. 한-미 FTA 이후 전문화된 대기업들이 중소매업에 진입하면 자영업자들은 경쟁력을 잃고 빈곤층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현재 노인 1인가구 빈곤율이 76.6%로 한국 전체 빈곤율(14.6%)의 5배를 웃돌아 노인부양 비용은 앞으로 큰 사회적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가계부채가 9백조원을 넘어섰고 증가추세도 가파르다. 빈곤화가 진행되면서 가난한 서민들의 세금이라는 복권은 3조원 이상 팔려 대호황을 누리고 있다. 지난 20년간 중산층이 11.7%포인트나 감소하고, 저소득층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고 한다. 불평등과 소득격차가 커지면 사람들은 스트레스와 불안감, 자존감 상실 때문에 자살을 결심하기도 한다. 2010년 자살률은 인구 10만명 당 31.2명으로 OECD(평균 자살률 11.3명) 회원국 중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집권층은 성장과 낙수효과 타령이나 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 자화상이다. 한-미 FTA로 부자 아니면 가난한 자만 있는 극단적인 나라가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 권영후 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장. ⓒ제주의소리
한-미 FTA를 옹호하는 논리는 네델란드의 의사였던 버나드 맨더빌이 <꿀벌의 우화>에서 ‘개인의 악덕이 사회에는 이익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차별적인 무역자유화가 능사는 아니다. 자유무역은 강자의 것으로, 사회적 이익을 창출하는 혁신적 경쟁보다는 파괴적 경쟁을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 다수에게 빈곤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이타적 본성에 대한 통찰이 우선되어야 한다. 다수의 낙오자와 빈곤층의 편에 서서 더불어 사는 공동체정신을 되살리는 것이 필요하다. 한-미 FTA에 대한 재검토와 사회 통합을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이 제시되어야 한다. / 권영후 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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