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안따라가기(17)] 금능해안

협재해안의 모래사장은 검은 바위를 구불구불 돌아 금능리까지 이어진다. 금능리 초입에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이곳을 '선지터'라 부른다. 명성은 협재해수욕장이지만 이곳의 아름다움은 협재해수욕장에 뒤지지 않는다. 썰물 때 드러나는 야트막한 동산 같은 하얀 모래사장은 그 어느 무대보다 깊은 마음의 떨림을 준다. 모래사장은 경사가 아주 완만하여 썰물 때는 몇 백 미터 물이 뒤로 달아난다. 그 때 가까이 다가오는 비양도, 하늘을 날다가 사람들이 발견하고는 '산이 날아 다닌다'라고 외치자 그자리 멈추어 서 섬이 되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바닷물이 한껏 뒤로 물러 날 때는 마치 비양도가 가까이로 다가오는 것 같다.

▲ 금능 모래사장의 아름다운 모습, 썰물이 되면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진다.ⓒ홍영철
바닷물이 멀리 달아나면 '선지터'의 서쪽에는 거대한 동심원이 나타난다. 금능 '모(아래아)른원'이다.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 크고 둥근 모습이 차차 나타나는데 보름달이 떠오르는 듯 하다.  '모(아래아)른원'은 돌담을 쌓은 길이가 192m로 이렇게 큰 원담은 보기 드물다. 이 원은 백사장 주위에 멸치 떼가 자주 들어옴으로 주로 멸치를 잡았고, 수확량이 많아 멸치를 잡아서 먹다가 너무 많이 남아서 밭에 거름으로 주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모른원'과 그 서쪽의 '소원'은 이 마을 사람들이 고기잡이나 바릇잡이를 하는 곳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 금능 모른원의 모습, 둘레가 200m 가까이 되는 큰 원담이다.ⓒ홍영철
원담을 둥글게 돌아서 걷다보면 어느새 금능리 마을포구인 '버렝이개'가 나온다. '버렝이'는 제주말로 벌레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놀림도 많이 받았다. 한자로는 배령리(盃令里)로 쓰는데 마을 가운데 술잔모양의 언덕이 있어서 이렇게 쓴다고 한다. '버렝이'가 먼저인지 '배령리'가 먼저 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버렝이개'를 한자로는 배령포(排齡浦)로 쓰는 것으로 보아 '버렝이'가 먼저 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버렝이'라고 불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마을 신작로에서 '버렝이개'로 접어드는 길에는 양쪽으로 바닷물이 안쪽으로 깊이 들어왔다. 천연지형으로 포구가 있는 좁은 만으로 물이 들어 온 것이다. 길 동쪽의 '집알물'이라는 용천수가 있는 곳은 아직 바닷물이 나들고 있으나, 길 서쪽의 '펄낭'이라는 모래갯벌은 메워져 버렸다. 그리고 포구 앞쪽의 빌레들도 포구확장을 하면서 시멘트로 덥혀 버렸다. 자연적인 지형이 방파제구실을 하여 많은 생물들이 서식처가 되었던 곳인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메워지고 있다.

'버렝이개'에서 좁은 마을길을 돌고 돌아서 배령연대를 찾아 나섰다. 입구를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마을을 몇차례 돌고 난 후에야 겨우 길을 잡았다. 배령연대는 최근에 새로 단장되었다. 이 곳의 연대는 다른 연대와는 달리 방사탑처럼 둥근 모습이었다고 한다. 크기도 아담했다고 한다. 이 곳의 연대는 명월진 소속의 연대로 동쪽 한림리 지역의 마두연대와 한경면 금등리 지역의 대포연대와 교신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연결했던 양쪽의 연대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지금 새로 만들어진 연대는 옛모습과는 달리 최근 복원되어지는 연대들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한눈에 연대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곳만의 독특한 모습이 사라져 버린 것이 못내 아쉽다.

▲ 금능 배령연대의 모습, 획일적인 복원이 이루어져 아쉽다.ⓒ홍영철
배령연대 부근에는 빌레 사이에 작은 밭들이 있다. 어떤 밭은 돼지를 키우던 '통시'보다 작다. 지금은 이 밭들이 효용이 없어졌지만, 제주의 초가를 엮는 '새(표준어로는 띠)'를 생산하던 곳이다. 3평 정도 될까 말까 한 작은 밭에는 지금도 '새'가 자라고 있다. 제주의 마을들은 마을단위의 자급자족 생활을 했다. 마을끼리의 교역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큰 장터도 없었다. 그래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마을에 있어야 했다. 밭에 곡식을 심고 나면 지붕을 엮을 '새'를 재배할 공간이 없는데, 바닷가 바위 틈의 작은 틈새까지도 이용하여야만 했던 것이다. 돌 틈 사이에 어렵게 자리를 마련한 '새왓(띠를 가꾸는 밭)'들은 한편으로는 궁색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젠 이런 밭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현실에 묘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 천일사초가 자라는 자오락왓과 작은 규모의 새왓이 들어서 있다.ⓒ홍영철
금능리 마을 서쪽에는 '능향원'이라는 곳이 있다. 마을 안쪽의 신작로와  일주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에는 포제단과 포제단 양쪽에 본향당이 있다. 양쪽에 있는 본향당은 동쪽이 '술일본향당(戌日本鄕堂)'이고 하르방신을 모신 곳이다. 서쪽이 '축일본향당(丑日本鄕堂)'인데 할망신을 모신 곳이다. 양쪽의 본향당은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옮겨 왔는데, 유교식 제례를 지내는 포제단 양쪽에 무속신들이 자리한 것은 기묘한 일이다. 마을사람들에게는 별 것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본향당의 앞에 붙은 '술일(戌日)'과 '축일(丑日)'은 각각 제사를 지내는 날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이 마을 사람들은 포제단에도 가고 신당에도 간다. 신당에 촛불이 밝혀져 있고, 비념이 아직 식지 않고 있다.

▲ 금능 능향원 입구와 금능 축일본향당, 술일본향당.ⓒ홍영철
※ 홍영철님은 제주의 새로운 관광, 자연과 생태문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대안관광을 만들어 나가는 (주)제주생태관광(www.ecojeju.net )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제주의 벗 에코가이드칼럼’에도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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