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적 시각 벗어난 '검정교과서' 잇따라 출간

제주도교육청이 최근 4·3자료집 발간과 함께 일선 학교에 배포, 교육자료로 활용토록 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4·3교육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올해부터 본격 시행되는 교육인적자원부의 검정 고교용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가 과거 냉전적 시각에서 벗어나 '제주4·3'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어 올바른 4·3교육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이고 있다.

그동안 중·고교 국사 교과서는 모두 정부가 발행하는 '국정'(國定) 뿐이었으나 고교용 근·현대사에 한해 민간에서 발행한 교과서에 대해서도 교육인적자원부가 '검정'(檢定)하는 제도가 지난해부터 시행됨으로써 4·3 등 그동안 왜곡되게 다뤄졌던 사건들이 재조명될수 있는 길이 확대됐다.

올해까지 채택된 고교용 검정 '한국 근·현대사'는 모두 6종.

이중 일부는 종전과 같이 냉전적 시각으로 4·3을 기술했으나 대한교과서의 경우 사건의 원인과 배경은 물론 군·경의 초토화 작전으로 인한 양민들의 무고한 희생을 다루고 있고, 금성출판사는 북촌리 집단학살사건을 다룬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을 소개하는등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한교과서는 우선 4·3의 배경에 대해 "광복 후에 모든 국민은 통일국가 수립을 바랐으나, 냉전체제가 굳어지면서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며 4·3을 '단독정부 반대세력과 군·경의 충돌'로 규정지었다.

또 1947년 '3·1사건'(3·1절 기념식을 마치고 시가행진을 하던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과 관련 "군정당국은 민심을 수습하기 보다는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아래 수천명의 일반 주민들까지 투옥함으로써 주민들의 반감을 샀다. 이 사건은 1948년 제주도 4·3사건이 일어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4·3의 계기가 3·1사건에 있음을 시사했다.

대한교과서는 '제주도 4·3사건은 왜 일어났는가?"라고 의문을 던진 뒤 "단독선거 저지를 통한 통일국가 수립, 그리고 경찰과 극우세력의 탄압에 저항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고 당시 무장대의 슬로건을 소개하고,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 계열에서 바늘로 터뜨린 것이 제주도 사태의 진상"이라고 말한 이 인 당시 검찰총장의 신문 인터뷰 내용을 실었다.

대한교과서는 또 4·3특별법 제정과정과 그에따른 4·3중앙위원회 구성, 특별법이 규정하고 있는 '4·3의 정의'를 소개한뒤 학생들에게 4·3의 원인과 특별법 제정 이유 등을 과제로 던졌다.

대한교과서는 4·3관련 서술 말미에 "무장봉기를 주도한 것은 수백명 밖에 안되는 좌익세력이었다. 그런데 국군과 경찰은 이들을 진압하면서 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는 초토화작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수많은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며 주민피해 상황을 기술했다.

금성출판서 교과서는 4·3에 대해 '멀어지는 통일 정부의 길'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격렬한 반대투쟁 과정에서 공산주의자와 일부 주민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미군정과 군인, 경찰, 우익 청년단체들이 진압에 나서면서 수만명의 도민들이 희생됐다고 소개해 수많은 주민이 희생된 책임이 미군정과 정부에 있음을 적시했다.

반면 일부 교과서는 4·3이 매우 간략히 기술돼 그 전모를 알수 없거나 냉전적 시각을 담고있어 시정돼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천재교육이 발행한 교과서는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제주도와 여수, 순천 지역에서 대규모 소요가 발생하자 먼저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소요를 통제하기 위하여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고만 기술했다.

또 두산동아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전후하여 대규모의 유혈 사태가 잇따라 발생하였다. 제주도에서는 1948년 4월3일에 좌익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도민들이 경찰 지서를 습격하는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며 4·3을 '무장 폭동'으로 규정했다.

제주4·3사건처리지원단 관계자는 10일 "중·고교 국정 국사 교과서는 교과서 수정·보완때 진상보고서 반영 여부를 결정하겠다"며 "고교용 검정 '한국근·현대사는 집필자가 수정을 요청해올 경우 적극 수용한다는게 교육인적자원부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와관련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해 10월 확정된 4·3진상조사보고서를 인권교육의 참고자료로 활용하겠다고 밝힌데다, 교육인적자원부는 7개항에 이르는 4·3중앙위원회의 대정부 건의안의 하나인 '진상보고서 교육자료 활용'을 위해 중·고교용 국정 국사 교과서 수정·보완 계획을 밝힌 바 있어 4·3교육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3일 제주언론인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4·3의 교과서 반영 문제와 관련, "국가가 그것을 일률적으로 정하는 문제는 조금 더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시간을 두고 검토할 사안임을 시사했다.


다음은 대한교과서에 실린 '한국 근·현대사' 수록 내용


3-3 제주도 4 3사건과 여수 순천 10 19사건

광복 후에 모든 국민은 통일 국가 수립을 바랐으나, 냉전 체제가 굳어지면서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세력과 군 경이 충돌하는 유혈 사태가 남한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제주도 4 3사건과 여수 순천 10 19사건이었다.
1947년, 제주도에서 3 1절 기념식을 마치고 시가 행진을 하던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주민들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면서 총파업을 벌이며 항의하였다. 그런데 군정 당국은 민심을 수습하기보다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을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수천 명의 일반 주민들까지 투옥함으로써 주민들의 반감을 샀다. 이 사건은 1948년에 제주도 4 3사건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탐구활동] 제주도4 3사건과 여수 순천 10 19사건은 왜 일어났는가?

자료 1. 도움글 / 좌익 세력의 무장 봉기

5 10 총선거를 둘러싸고 좌 우 세력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1948년 4월 3일 500명 가량의 좌익 세력은, 단독 선거 저지를 통한 통일 국가 수립, 그리고 경찰과 극우 세력의 탄압에 저항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경찰 지서와 서북 청년회 등의 우익 단체들을 습격하였다. 이로써 제주도에서는 총선거가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자료 2. 자료읽기 / 제주도에 공무원들의 부패가 극심하다

제주도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된 것은 시정 방침에 신축성이 없다는 것과 공무원들이 부패하였다는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제주도라는 곳은 워낙 살기 어려운 곳이고, 특히 공무원들은 제주도에 가는 것을 무슨 정배나 가는 양으로 생각함으로써 인재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제주도로 안 가고 보니, 명예나 돈이나 바라는 친구들이 어찌 바른 행정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부패상은 작년에 내가 갔을 때 이미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 계열에서 바늘로 터뜨린 것이 제주도 사태의 진상이라 할 것이다. - 이인 검찰총장(서울신문, 1948년 6월 17일)

[열린과제]

1. 자료를 참고하여 좌익 세력이 제주도 4 3사건과 여수 순천 10 19사건을 일으킨 까닭을 설명해 보자.
2. 자료 2는 제주도 4 3사건의 원인을 무엇이라고 보고 있는지 설명해 보자.
3. 다음 글을 읽고 제주도 4 3사건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이유를 조사하여 보고서로 작성해 보자. 관련자료는 제주4 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홈페이지(www.jeju43.go.kr) 등에서 찾을 수 있다.

1999년 12월, 국회는 여야 의원 216명에 의해 발의된 '제주4 3 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을 의결하였다. 이에 따라 2000년부터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4 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구성되었다. 4 3 특별법은 제주도 4 3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에 일어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위의 탐구 활동에서 보듯이,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를 주도한 것은 수백 명밖에 안 되는 좌익 세력이었다. 그런데 국군과 경찰은 이들을 진압하면서 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는 초토화작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수많은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1954년에 끝이 났지만, 그 과정에서 주민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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