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제주음악씬의 중심, 더 도어즈를 가꾼 그녀 이경숙

“도어즈가 문을 열기도 전에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던 많은 날들이 있었다...도어즈의 최대 무기는 방대한 라이브러리에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우리를 기다리던 거대한 LP장과 CD 꽂이에 빼곡하던 음반들, 게다가 그 모든 음반을 들어봤다는 사장, L누님은 신화적 존재였다. 웃음소리가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을 능가하던 L누님은 도어즈의 여왕이었다. 그리고 시내 음반점에서 일하던 L누님의 친구들이 저마다의 ‘포스’를 내뿜으며 바에 앉아 있을 때면 마치 교무실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록 스쿨’의 교무실 말이다.”

- 제주의 음악평론가 노루, ,‘지역 음악 씬: 제주의 음악 공간과 씬의 형성(2012.05.16)'

▲ 그녀는 사진은 물론 언론과의 인터뷰에도 잘 응하지 않는 편이다. 혹시 무섭거나 미디어를 꺼려하는것인가 걱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정말 별 거(!) 없다. "전 잘난 것도 아니고, 제가 말 잘하는 것도 아니고, 뭐 해줄 말도 없고... 그러다 보니 안하게됐어요(웃음)" ⓒ제주의소리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 제주에서 음악 좀 안다는 이들에게 중앙로 뒷골목에 위치한 ‘더 도어즈’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좀 처럼 듣기 힘든 다양한 음악과 이색적인 분위기가 입소문들을 타고 애호가들을 끌여들였다. 크게 울려퍼지는 음악 한가운데 떠다니면서 언더그라운드에서부터 팝스타까지, 힙합에서 재즈까지 다양한 음악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공론의 장이 형성됐다. 탄탄한 내공을 지닌 음악고수들의 대화를 듣다보면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는 기분이었다.

주말마다 펼쳐지는 파티와 인디밴드들의 공연도 이 곳의 매력거리였다. 당시 제주지역 중고등학생 밴드 사이에서 마치 신처럼 여겨졌던 ‘에로스’를 비롯해 제주지역 뮤지션들부터 홍대 밴드들까지 다양한 팀들이 도어즈에서 무대를 장식했다.

그리고 이 공간을 이끈 도어즈의 사장 L누님, 이경숙(42)씨는 음악매니아들에게는 신화적 존재다. 방대한 음악적 지식은 물론 문화 다방면에 있어서 친절한 큐레이터이자 걸어다니는 문화백과사전과도 같았던 것.

더 도어즈의 탄생, 자연스럽게 그리고 유쾌하게

도어즈라는 독특한 문화공간의 시작은 ‘제주도에도 홍대 클럽 같은 곳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였다. 90년대 초반 음악가들의 메카,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떠오른 홍대에서 머물면서 느낀 답답함인 것. 20대 초반, 홍대에 다니는 친구와 함께 홍대 정문에 살며 접한 것들은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줬다. 수 만장의 LP로 가득찬 신촌 ‘우드스탁’. 명곡들을 들으며 술을 마시고 내키면 얼마든지 춤도 추고 몸을 흔들 수 있는 분위기에 그녀는 매료됐다. 

“신촌의 우드스탁, 홍대의 블루스하우스 발전소라는 클럽이 있었는데 그게 홍대의 인디 분위기를 주도했던 세 곳이죠. 그곳에서 ‘이런 데도 있었구나!’하고 문화충격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제주도에도 이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이 세 개의 분위기가 합쳐진 게 더 도어즈라고 할 수 있어요”

중앙로 뒤편 골목에 도어즈가 처음 생긴 것은 1995년 3월. 엄밀한 말하면 그녀는 사장이나 개업자는 아니었다. 함께 홍대에서 음악을 즐기고 공유하던 이들이 먼저 도어즈를 연 것.

“제가 문을 연 게 아니고 친한 언니오빠 4명이서 문을 연 거죠.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오픈할 때부터 벽돌도 나르고, 니스칠도 하고, 가서 도와주기도 하다보니 오픈멤버처럼 됐지만 사업적으로 같이 한 건 아니었어요”

그러던 그녀가 운영을 맡게 된 것은 초창기 멤버들이 하나둘 씩 다른 일을 찾게 되면서 자연스레 그녀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 것. 대략 1997년쯤이라고 했다.

“한 사람씩 결혼도 하고 다른 일을 하게 되면서 나가게 됐고, 맨 마지막에 남은 언니 한 명이랑 저랑 동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도어즈에 자주 갔었고 물정을 잘 알고 음악과 술, 노는 것도 좋아하니 자연스럽게 바통터치가 된 거죠”

그때부터 그녀는 본격적으로 도어즈의 L누님으로서의 명성을 쌓게 된다. 처음 1년 간의 시간을 그녀는 행복한 시절로 추억한다. 음악을 배우고, 문화적 스펙트럼을 넓히며 내공을 다지는 기간이 된 것. 

“처음 도어즈는 외국인들의 아지트였어요. 학원강사들인데 끝나면 도어즈에 집결했죠. 주말마다 밤새워서 파티를 했어요. 이들과의 만남은 새로운 걸 선물해줬죠. 한국사람이 신청하는 음악과 다양한 국가에서 온 외국인들이 주문하는 음악은 또 다르거든요. 외국 사람들에게 신청곡을 받으면 ‘첫 날은 왜 이런 걸 들어’하고 의문이 생기다가 세 번 네 번 들으니 ‘죽인다’는 느낌이 드는 거에요. 같은 가수라도 한국 사람의 롤링스톤즈와 외국인들의 롤링스톤즈는 달라요. 서로 선호하는 곡이나 접근방식이 다르거든요”

이미 음악에 있어서는 조예가 있었지만 새로 받아들이는 음악의 폭이 넓어지면서 그녀 인생의 큰 즐거움이 됐다.

“1년 정도는 음악을 배운다는 도어즈 가는 시간만 기다렸어요. 사람들 만나는것도 너무 재밌고, 오늘은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오늘은 어떤 음악을 배울까 설레는 맘이 가득했죠”

중앙로를 떠난 도어즈, 도어즈를 떠난 그녀

구도심의 침체는 도어즈에게도 영향을 줬다. 2000년대에 들어서 사람이 하나둘씩 떠나고 떠나고 거리가 휑해지니 이씨도 겁을 먹게 된다.

“도어즈도 사실 있으려면 있을 수 있었죠. 중요한 건 그 동네에 아무도 없다는 거였어요”

시간이 지날 정도로 사람이 없어졌다. 심지어 도어즈에 도둑이 들기도 했다. 거리가 침침하고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워졌다. 도어즈로 올라가는 계단은 외부의 눈에 잘 띠지 않아 중고등학생들의 담배 피는 장소가 되 버렸다. 계단 전체가 담배꽁초와 가래 범벅이 됐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무섭다라구요. 그러던 어느 날 음악 때문에 친해진 고등학교 동창친구가 시청에 있는 자기네 가게 위층이 비었다고 이사오라는 거에요. 한 번 마음이 흔들리니 다잡기 힘들더라구요. 5분만에 바로 결정을 하고 바로 이사를 하게됐어요”

그렇게 지금으로부터 4년 6개월 전, 도어즈는 처음 위치한 중앙로를 떠나 지금의 시청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새로운 시청의 핫 플레이스가 됐다. 

▲ 시청으로 옮긴 더 도어즈의 모습. 수천장의 LP와 귀를 울리는 큰 음악, 아늑한 분위기는 중앙로 시절 그대로다. ⓒ제주의소리

중앙로에서 시청 시기에 이르기까지 더 도어즈를 거쳐간 알바생만 해도 100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들 대부분이 아직도 연락을 하며 지내고 함께 특별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지난 2005년에는 홍대에서 큰 규모의 도어즈 10주년 기념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2009년부터 이 곳을 물려받은(!) 새로운 사장 강지운(33)씨도 그 알바생들 중 한 명이었다. L누님의 호탕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처럼 그가 도어즈를 맡게 된 과정도 ‘별다른 것 없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과거 중앙로 도어즈를 종종 들르기도 했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친해진 사이가 된 후 그녀는 선뜻 김씨에게 ‘이 가게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하게된다.

제안을 받은 강씨 역시 더 도어즈라는 공간과 그 곳의 사람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기쁜마음으로 사장을 맡게 된다. 별다른 대의명분이나 ‘문화공간을 지켜야지!’이런 생각이 아니라 그냥 ‘개인적으로 좋아서’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L누님이 13년간 머물렀던 도어즈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책임지는 삶’에서 벗어나고픈 심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말하는 책임이라는 단어는 자유로운 삶을 옭아매는 족쇄와 같은 맥락이다. 

“무리하게 책임지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사실 제가 몇 달은 제주에 머물고 또 몇 달은 멀리 여행을 다니는 데 사실 도어즈를 두고 한국을 떠나자니 늘 걱정이 되더라구요. 그것마저도 책임감이 된 것이죠. 그래서 맘 편히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는 안되겠다, 그래서 넘겨주고 여행을 바로 떠났죠”

그녀는 일 년 중 몇 달은 한국에, 몇 달은 외국에서 보낸다. 지구별 여행자인 셈이다. 그녀의 삶을 이끄는 것은 어떤 통속적인 가치나 목표가 아니라 진정으로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 쉽게 말해 ‘재미’다.

“이 모든 게 재미를 위해서 하는 거지 내 인생의 다른 목표나 무슨 이데올로기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에요. 무리한 책임을 지면서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책임지지 않기 위한 삶을 위해서 오히려 노력을 더 많이 해야 하죠. 사실 이렇게 살기가 더 힘들죠. 책임을 안 지기 위해서 자주 모험을 하고 있는거죠. 위태위태하게 (웃음)”

더 도어즈를 그만둔 후 백패커스라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도 그녀를 옭아매는 책임이 되어 버렸고, 그녀는 1년만에 다시 자유롭게 스스로를 풀어놓는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늘 배우고 새로운 것을 느끼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돈’이다. 그녀는 반쯤 농담 겸 진담으로 “지금 대출로 겨우 버티고 있어요”라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신세기의 유목민 같은 이미지를 풍기는 그녀의 삶이 부럽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에휴... 역마살에다가 빚만 많은데요’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뻔하고 재미없는 축제 이제 그만

늘 돈 걱정을 해야하고 책임지는 삶을 부담스러워 하는 그녀지만 또 새로운 일을 벌리는 데도 일가견이 있다.

우도에서 기존의 축제와는 다른 음악 페스티벌을 계획중인 것. 그녀는 단순히 무대만 세워서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닌 지역주민과 소통하고 그들에게도 이익이 돌아가고, 또 마을 전체가 온통 축제에 빠질 수 있는 시간들을 구상하고 있다. 

“우도란 장소만 빌리기엔 의미가 없죠. 그렇다면 우도 도민들하고 축제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자유분방하게 이뤄지는 프린지적인 개념이죠. 메인무대는 있지만 여길 떠나서 섬 전체에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게끔 하는 거에요. 방문자 모두에게 숙식은 이런 거 제공은 해주고. 메인무대를 떠나서 우도 전체 길에서도 전시를 할 수 있고, 중간에 정자가 있으면 연극도 할 수 있고, 또 밴드가 마을 거리 곳곳에서 스피커 하나 틀어놓고 공연하고. 그 2~3일 축제기간만큼은 시끄러워도 뭐라고 안 하는 조건에서, 보호속에서 거리에서 춤과 음악. 모든 곳을 무대로 쓸 수 있게 하고싶어요”

▲ 더 도어즈의 터줏대감이었던 이경숙씨는 그녀의 본명만큼이나 'L누님'이라는 애칭으로도 유명하다. 카메라를 갑자기 들이대자 수줍어하고 있는 그녀. ⓒ제주의소리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역 주민들이 맘에 들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얼마 전 간략한 구상을 들고 몇몇 주민들을 만났는데 반응이 너무 좋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100% 주민들이 동의한 게 아니라며, 마을 주민들을 정식으로 찾아가 일일이 마음을 전할 계획이다. 관에서 동원하는 형식적 축제가 아닌 마을주민과 방문객, 뮤지션들이 하나가 되는 진짜 축제를 꿈꾸는 것. 그러면서 지금 지역사회의 형식적인 축제들을 꼬집기도 했다.

“축제가 마을 자체의 것이 됐으면 해요. 한국엔 그런 게 없잖아요. 한국인들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하는 축제가 없잖아요. 관이 주도가 되지 않으면 축제가 없는거에요. 제주도에도 수억원, 수십억원이 들어가는 대형축제가 많잖아요? 그런데도 너무 성의 없고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작 도민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이런 형식적인 것이 아닌 너무 재미있어서 하는, 자발적인 축제가 되었으면 해요. 그리고 나중에 저는 여기서 손을 완전히 떼서 그 마을의 브랜드가 되고 온전히 그 마을의 것이 됐으면 해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역밀착형 축제의 필요성’을 그녀는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 그녀는 그냥 ‘재미’를 따라 간다고, 책임지지 않는 삶이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누구보다 지역사회의 문화를 염두에 두고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데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중2때 들국화에 빠지면서 인생이 통째로 바뀌었다는 L누님 이경숙. 자유롭게 세상을 방랑하는 여행자인 그녀가 이젠 세상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 물론 의도적이거나 작위적이지 않게 조금씩, 자연스럽게, 재미있게.  <제주의소리>

<문준영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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